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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조선]]
|본관 = [[울산 김씨|울산]](蔚山)
|필명 = 자(字) 후지(厚之) <br /> 호(號) [[하서]](河西){{·}}담재(湛齋) <br /> 시호(諡號) 문정(文正)
|학력 = [[1540년]] 별시 문과 병과 급제
|직책 = 조선국 전라도 옥과현감<br/>(朝鮮國 全羅道 玉果縣監)
'''김인후'''(金麟厚, [[1510년]] ~ [[1560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성리학자]]이며, [[문묘]]에 종사된 [[동방 18현|해동 18현]] 중의 한 사람이다.
 
[[전라도]] [[장성군|장성]] 출신으로, 본관은 [[울산 김씨|울산]](蔚山)이며, 자는 후지(厚之), 호는 [[하서]](河西){{·}}담재(湛齋),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고 시문에 뛰어난 자질을 보여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10살 때 모재 [[김안국]](金安國)에게 ≪소학≫을 배웠다. 이후 [[성균관]]에 입학하여 [[1531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때 퇴계 [[이황]](李滉)을 만나 함께 학문을 닦았다. [[1540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에 임용되었으며, 이듬해 호당(湖堂)에 들어가 [[사가독서]]하고, 홍문관 저작이 되었다.
그는 천문·지리·의약·산수·율력(律曆)에도 정통하였다. 제자로는 변성온(卞成溫)·기효간(奇孝諫)·조희문(趙希文)·[[정철]](鄭澈)·오건(吳健)ㆍ양자징(梁子徵) 등이 있다
 
시문에도 능해 10여 권의 시문집을 남겼으며, 도학에 관한 저술은 일실(逸失)되어 많이 전하지 않는다. 저서로는 ≪하서집《하서집(河西集)·≪주역관상편《주역관상편(周易觀象篇)·≪서명사천도《서명사천도(西銘事天圖)·≪백련초해《백련초해(百聯抄解) 등이 있다.
 
[[문묘]]에 종사되고, [[장성 필암서원]]과 옥과 영귀서원에 주향되었다.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에 추증되었다.
[[1531년]](중종 26) 22세 성균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같이 합격한 동방(同榜)은 화담 [[서경덕]], 대곡 [[성운 (1497년)|성운]], 휴암 [[백인걸]], 임당 [[정유길]], 금호 임형수 등이 있다.<ref>참찬 [[송순]]이 일찍이 현감 오겸과 더불어 말하기를 [[신묘년]]의 사마 방목에 미치자 대곡 [[성운 (1497년)|성운]], 화담 [[서경덕]], [[하서]] 김인후, 휴암 [[백인걸]], 임당 [[정유길]]을 내리 세니, 오겸이 크게 놀래며 「한 명단 안에 어진 자가 어찌 그리 많은가.」라고 하였다.</ref> 이듬해 할아버지 훈도공(訓導公)이 돌아가셨다.
 
[[1533년]](중종 28) [[성균관]]에서 퇴계 [[이황]]과 만나 교우 관계를 맺고 함께 학문을 닦았다. [[기묘사화]]를 겪은 지가 얼마 되지 않아 선비들이 학문을 소홀히 하며, 도학에 대해 말하기를 꺼려하는 풍조였는데, [[퇴계]]와 한번 보고 서로 깊이 뜻이 맞아 끊임없이 토론하고 연구하며 서로 도와 학문과 덕을 닦은 소득이 있었다. 후일 [[퇴계]]는 「더불어 교유한 자는 오직 '[[하서]]' 한 사람뿐이었다.」고 술회했을 정도로 그와의 돈독한 우의를 표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퇴계]]가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자 그는 정표로 ‘증별시(贈別詩)’를 지어 주었다.<ref>≪퇴계언행록≫에《퇴계언행록》에 이르기를 퇴계가 돌아 갈 때 ‘증별시’를 써 주었는데, "선생은 영남의 수재로다. 문장은 이백·두보요. 글씨는 왕희지·조맹부로세"라 하였다. 후일 퇴계가 "기묘의 변을 겪은 뒤라서 사람들이 다 학문하는 것을 꺼리고 싫어하며 날마다 희학으로 일 삼는데, 선생은 씻은 듯이 스스로 새롭게 나가 동정과 언행을 하나같이 법도에 따르니 보는 자가 서로 손가락질하며 비웃었는데, 더불어 교유한 자는 오직 '김하서' 한 사람일 뿐이었다."라고 하였다.</ref> 이와 같이 성균관에 있으면서 [[이황]]을 비롯한 휴암 [[백인걸]]·임당 [[정유길]]·금호 임형수·미암 [[유희춘]]을 비롯한 많은 현능들을 만났다.
 
[[1536년]](중종 31) [[성균관]]에서 스승 [[최산두]]의 부음을 듣고 상복을 입고 머리에 가마(加麻)를 하고 스승의 죽음을 애도하였으며, 기일에는 치제(致齋)를 올렸다.<ref>우리나라에서 스승을 위해 가마(加麻)한 것은 그가 처음으로 세상에 밝혀졌다.</ref>
[[1543년]](중종 38) 34세 여름 6월 홍문관 부수찬 지제교 겸 경연검토관으로 승진하였으며, 7월 주강(晝講)에 나아가 시사를 논하는 자리에서 그는 홀로 개연히 상소문을 올려 [[조선 중종|중종]]에게 수신·자성의 도를 진술하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았다.
 
『바른 선비들을 《소학》의 무리라 하여 배척하는 낡은 정치 풍토가 만연해 있는 조정의 기강과 풍속을 바로 잡을 것과, [[기묘년]]에 희생된 사람들이 한때 잘못한 일은 있더라도 그 본심은 터럭만큼도 나라를 속인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무거운 죄를 입었습니다. 그 후에 죄를 지은 사람 중에 비록 죽어도 남은 죄(大逆不道)가 있는 자들이 세월이 오래되어 더러는 복직된 자도 있사온데 [[기묘년]] 사람들은 오히려 상의 은혜를 입지 못하였사오니, 신은 홀로 온편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더 나아가 [[기묘년]] 사람들이 숭상하던 ≪소학≫《소학》· ≪향약≫《향약》 등은 버려지고 쓰지 아니합니다. ≪소학≫과《소학》과 ≪향약≫은《향약》은 성현의 글인데도 불구하고 지금의 선비들이 시속에 빠져 읽어서는 안 될 글이라 하며 버리니 매우 온편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지적 하는데 그 사연이 매우 간절하고 절실하였다.
 
때는 [[기묘년]] 으로부터 20여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조야에서는 당시 일을 꺼리고 두려워하며 감히 꺼내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문신으로서 처음 [[기묘사화|기묘명현]](己卯名賢)의 신원 복원을 개진하였는바 이는 감히 죽기를 각오하지 않고서는 홀로 할 수 없는 일로, 도통적 의리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ref>[[1519년]] (중종 14년) 기묘 명현 : [[조광조]]·[[김식]]·[[김정]]·기준·윤자임·[[한충 (조선)|한충]]은 귀양 같다가 사형 당하고, [[김구]]·[[박세희]]·[[박훈 (1484년)|박훈]]·[[홍언필]]·[[이자 (1480년)|이자]]·[[최산두]]·[[유인숙]]는 유배를 당하고, [[안당]]·[[이장곤]]·[[김안국]]·[[김정국]]·[[김세필]]·[[정광필]]·신명인 등은 사림을 두둔하다 파면을 당했다.</ref> 이를 계기로 사림의 입이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조선 중종|중종]]은 [[기묘사화|기묘명현]]의 신원 복원에 대해서는 허락하지 않고, 다만 폐기토록 지시한 ≪소학≫《소학》· ≪향약≫에《향약》에 대해서만 철회토록 허락하였다.
 
[[1543년]](중종 38) 8월 그는 [[기묘사화|기묘명현]]의 신원 복원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이 같은 상황을 더는 견딜 수 없어 하며, 연로하신 부모를 뵙는다고 청원하여 귀근(歸覲) 하였다. 겨울 12월 연로하신 부모 봉양의 걸양(乞養)을 청하여<ref>양친의 나이가 모두 칠십이오니 마지막의 봉양을 원하옵니다라고 하였다.</ref> 고향과 가까운 [[옥과면|옥과]]현감에 제수되고, 춘추관의 겸직은 그대로 띠었다.<ref>[이종범의 호남인물열전] [36] '묵죽도'에 새겨진 도덕문명정치의 꿈. 조선일보(2012.08.20)[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8/19/2012081901268.html].</ref> 이때 호남관찰사로 와 있던 규암(圭庵) [[송인수]](宋麟壽)와 더불어 학문을 닦고 글을 주고받으며 정이 매우 두터웠다.
[[1545년]](인종 원년) 36세 가을 7월 [[조선 인종|인종]]이 갑자기 승하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목을 놓아 통곡하며, 더는 살고 싶지 않은 듯이 하여 매우 깊은 심장병이 발작했다. 그리고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가 이내 소생하였다. 곧이어 [[을사사화]](乙巳士禍)가 발생하자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고향 [[장성군|장성]]으로 돌아와 다시는 벼슬할 마음을 끊고, 산림에 은둔한 채 술과 시로 울분을 토로하며 세월을 보냈다.<ref>[이종범의 호남인물열전] [39] 어두운 시대, 영화 거부하며 술과 공부…조선일보(2012. 09. 3)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9/02/2012090201409.html].</ref>
 
[[1546년]](명종 원년) 4월에 ≪효경간오≫《효경간오》(孝經刊誤) 발문을 지었는데, 이는 옥과 현감으로 봉직할 당시 [[유희춘]](柳希春)이 한양에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본읍에 들러 [[주희|주자]](朱子)의 ≪효경간오≫ 효경간오》라는 책을 보여 주자, 이를 매우 흐뭇해하면서 친히 베껴놨던 것인데, 이제 그 책 말미에 발문을 붙여 그 뜻을 넓혀서 배우러 오는 자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이와 같이 고향에 묻혀 절의를 고수하던 그가 택할 수 있는 길은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뿐이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이래 강학에 전심하여 소문을 듣고 찾아온 학도들에게 순순(諄諄)히 가르침을 베풀되, 반드시 먼저 ≪소학≫을《소학》을 읽히고 다음에 ≪대학≫을《대학》을 읽히는데, 한결같이 주문공의 성법(成法)에 따랐다. 두 아들을 가르침에 있어서도 역시 ≪소학≫을《소학》을 십 년이나 읽도록 하며 딴 책으로 바꾸어 주지 않았다.
 
==== 훈몽재 훈학 ====
[[1548년]](명종 3) 봄에 어버이를 모시고 [[순창군]] 쌍치면 둔전리 점암촌(鮎巖村)에 우거(寓居)하여, 초당을 세우고 편액을 [[훈몽재 유지|훈몽]](訓蒙)이라 걸고, 여러 학생들을 훈회하였는데, 반드시 먼저 ≪소학≫을《소학》을 읽고 다음에 ≪대학≫을《대학》을 읽게 하였다. [[순창군|순창]] 점암은 나무와 돌이 빼어나게 좋으며, 강 언덕에 반반한 바위가 있어 능히 수십 인이 앉을 만 하였는데, 제자 양자징(梁子澂)을 비롯한 조희문(趙希文) 등과 더불어 ≪대학≫을《대학》을 강의 하였다. 세상이 이를 '대학암'(大學巖)이라 일컬는다. 또 상류에는 [[낙덕정|낙덕암]](樂德巖)도 있다. 이와 같이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체념한 체 산림에 은둔하여 후학 양성과 시와 술을 벗 삼아 세월을 보냈는데, 오히려 마음이 태평스러웠다. [[1549년]](명종 4) 봄 2월에 ≪대학강의(大學講議)≫ 발문(跋文)을 짓고, 추만 [[정지운]]의 ≪천명도≫를《천명도》를 얻어 보고 이를 대폭 수정 보완해 인성의 본질을 파헤치는 탁견을 제시한 ≪천명도≫《천명도》(天命圖)를 저술하여 조선 [[성리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10월에 부친 참봉공 상을 당하여 12월에 고향 [[장성군|장성]]으로 돌아와 맥동 원당골에 장사하였다.
 
==== 인종에 대한 절의 ====
라 하였다. 그는 대개 생각하기를 문자가 생긴 이래로 여러 성인들이 표준을 세워 있었으나 그 쇠운(衰運)에 미쳐서는 [[공자]](孔子)가 없었으면 여러 성인의 도가 전하지 못했을 것이요, [[공자]](孔子) 이후로 여러 현인들이 전통을 이어왔으나 그 어두워짐에 미쳐서 [[주희|주자]](朱子)가 없었으면 [[공자]](孔子)의 도가 밝혀지지 못했을 것이니 [[공자]](孔子) , [[주희|주자]](朱子) 두 부자의 사업과 공렬은 천지의 사이에 우뚝하고 빛나서 여러 성인이나 현인들이 이보다 더할 수는 없다 하였다. 그러므로 사(詞)와 시에 나타내어 후학의 길을 열어 주었으니 그의 식취(識趣) 범위는 이 시에서 그 대강을 볼 수 있다.
 
이 때에 영응(永膺) 이지남(李至男)이 와서 배우기를 여러 해 였었는데, 일찍이 ≪초사≫《초사》(楚辭)를 배우고자 하므로 그는 읽다가 마치지 못하고 문득 비분(悲憤)을 이기지 못하여 시를 써 주었는데 다음과 같았다.
 
{{인용문|옥빛에다 난의 향기 그 가정에 맞는 인품, 대숲 밖 오막집에 이소경을 익히누나.
대개 그는 [[을사사화|을사년]] 이후로 평일에 늘 울읍(鬱悒)하여 궁한 사람이 돌아갈 데가 없는 듯이 하였으며, 그 음풍(吟諷)하는 사이에 나타난 것이 많이 이와 같았다.
 
[[1549년]](명종 4) 봄 2월에 ≪주자대전≫《주자대전》(朱子大全) 중에서 ≪대학《대학 강의≫강의》(大學 講義)를 얻어 보고 ≪대학《대학 강의≫강의》 발문(跋文)을 지었다. 또 그 무렵 성리학자들의 관심이 ≪천명도≫《천명도》(天命圖)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추만 [[정지운]](鄭之雲)이 「사단은 이에서 생기고, 칠정은 기에서 생긴다.」로 표현해 이를 도식화하고 해설을 붙인 ≪천명도≫를《천명도》를 완성하였는데, 이를 받아 본 그는 이를 대폭 수정 보완해 인성의 본질을 파헤치는 탁견을 제시한 ≪천명도≫를《천명도》를 그려 조선 [[성리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이 논의에 퇴계 [[이황]]도 적극 참여했는데, [[이황]]도 역시 그의 도학 문자를 보고 의견과 해설의 정밀함에 대해 깊이 공경하였다..<ref>1543년 추담 정지운 천명도 저술, 1548년 하서 김인후 천명도 저술, 1553년 퇴계 이황 정지운의 천명도 개정판 저술</ref> 이러한 그들의 심오한 토론은 뒷날 [[이황]]과 [[기대승]] 간의 「사칠 논변」(四七 論辯, 사단과 칠정에 관한 이황과 기대승의 토론)이 일어나게 된 사상적 배경이 됐다.
 
[[1552년]](명종 7) [[양산보]](梁山甫)가 ≪효부≫《효부》(孝賦)의 장편을 지어서, 그가 일찍이 시운을 따라 글을 지었는데, [[송순]]이 직접 생각을 정리하여 원 글의 뒤에 품평하였다. 문집에 실려 있다.
 
[[1556년]](명종 11) 화담 [[서경덕]](徐敬德)은 '심학'(心學)으로써 당시 숭상하는 바가 되었는데, 그는 일찍이 ≪독주역시≫《독주역시》(讀周易詩)를 지었는데, 그는 이 시를 보고서 「성인의 말씀은 곧 천지의 도이니 영이라고 할 수 없다.」고 차운하였다. 이는 서화담이 공부하는 사람들을 계도하는 방식이 점진적인 과정을 거치지 않고, 하학 공부를 소홀히 하면서 단번에 깨달음을 얻으려는 지름길로 이끌 우려가 있기 때문에 이를 깊이 걱정하여 마침내 그의 시에 화답을 해서 바로잡은 것이다.
 
여름 5월에 무장 고을 유생 안서순(安瑞順)이 정륜(鄭倫), 김응정(金應貞)과 함께 상소하여 [[을사년]]에 무고함을 입은 명현의 원통한 상황을 진술하여 아뢰는데, [[윤원형]]이 안서순과 나주출신 정륜은 모의하여 역적을 두둔한 죄로 참형하고 집안의 재산을 몰수하였으며, 진사 김응정(金應貞)은 소장을 썼다하여 멀리 귀양을 보냈다. 또 [[윤원형]]이 기필코 그를 연루시켜 사림에 화를 씌우려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를 않았다.
 
[[1557년]](명종 12) ≪태극도설≫《태극도설》(太極圖說) ≪서명≫《서명》(西銘) 등의 글이 지닌 깊은 뜻을 생각하고 찾아서 읽기를 천 번에 달했다. 이에 이르러 ≪주역관상편≫《주역관상편》(周易觀象篇)와 ≪서명사천도≫《서명사천도》(西銘事天圖)를 저술하고, 또 배우는 자들에게 글로 써서 보이기를 「염계의 도설은 도리가 정미하여 글월은 간략하되 뜻은 만족하고, 장자의 명은 규모가 광활하여 뜨지도 않고 새지도 않으니 만약 천자가 고명하면 먼저 태극에서부터 공력을 써야 할 것이나 그렇지 못하면 서명을 이해하고서 태극에 미처 가야 한다. 태극은 덕성의 근본이요 서명은 학문의 법도이니 요컨대 어느 한쪽도 폐해서는 아니 된다.」라 하였다. ≪서명사천도≫와 ≪태극도설≫《서명사천도》와 《태극도설》은 잃어버려 세상에 전하지 않는다.
 
[[1558년]](명종 13) 서울로 과거보러 가던 고봉 [[기대승]](奇大升)이 찾아와 ≪태극도설≫《태극도설》(太極圖說)을 논하였다. 10월 [[기대승]]이 문과에 급제하고, 그해 11월 휴가를 얻어 귀향하던중 일재 [[이항 (1499년)|이항]](李恒)에게 들러 ≪태극도설≫을《태극도설》을 재 강론했는데, [[이항 (1499년)|이항]]이 「태극(太極) 음양(陰陽)이 일물(一物)」이라고 주장하고, [[기대승]]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여 종일 토론하였으나 의론이 귀결되지 못했다. 이에 [[기대승]]이 그를 찾아와 뵙고 어느 쪽이 옳고 그른가를 묻자 그는 [[기대승]]의 의견이 맞다고 하며 그리고 종일토록 강론을 하다가 파했다.
 
또 소재 [[노수신]](盧守愼)이 ≪숙흥야매잠≫《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의 주해를 저술하여 퇴계 [[이황]] 및 그에게 강의하고 질문한 것이 왕복으로 묶어 수백 언 이었는데 퇴계 [[이황]]은 누차 자기 의견을 버리고 그의 설을 많이 따랐다.
 
여기서 소재 [[노수신]]은 『마음이 몸을 주재한다.』고 하였는데, 그는 이에 대해 비판하며, 『마음이 몸을 주재하지만 기가 섞여서 마음을 밖으로 잃게 되면 주재자를 잃게 되므로, 경으로써 이를 바르게 해야 다시금 마음이 몸을 주재할 수 있게 된다』는 「주경설(主敬說)」을 주장하였다.
 
송나라 채구봉(蔡九峯)의 ≪홍범설시도설≫《홍범설시도설》(洪範揲蓍圖說)은 밝고 또 차비한데도 뒷사람들이 오히려 자세히 알지 못하는데, 그는 채구봉(蔡九峯)의 설로 근본을 삼고, 자기의 설을 부가하고 진술하여 매우 정성스럽게 새로 만들어 이름을 ≪홍범설시작괘도≫《홍범설시작괘도》(洪範揲蓍作卦圖)라 하고, 제자 양자징(梁子澂)에게 전수하니 이에 '주·채(朱蔡: 朱子蔡沈)'가 전수한 깊은 뜻이 비로소 밝혀졌다.
 
[[1559년]](명종 14) [[이항 (1499년)|일재]]가 「태극과 음양은 일물이라」는 뜻의 글을 극론하여 [[기대승|고봉]]을 통해 글로 보내자, 그는 [[이항 (1499년)|일재]]에게 편지를 보내, 『기군에게 보낸 서간에 대해 감히 의(議)하지는 않겠습니다만 대개 이(理)와 기(氣)는 혼합하여 천지간에 가득 찬 것은 무엇이고 그 가운데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는 동시에 저마다 갖추지 않은 것이 없으니, 태극이 음양에서 분리되어 있다 할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도(道)와 기(器)의 분별은 계한(界限)이 없을 수 없으니 태극 음양이 일물이라 할 수는 없을 상 싶습니다.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태극이 음양을 탄 것이 사람이 말(馬)을 탄 것과 같다.」 하였은즉 결코 사람을 말이라 할 수는 없겠지요.』라 하였다.
그해 겨울 고향에 내려와 있던 [[기대승]]과 더불어 「사단칠정」(四端七情)의 설을 강론하는데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으며, [[기대승|고봉]]은 [[이황|퇴계]]의 『사단칠정 이기호발』에 대해 깊이 의심하여 그에게 질문하니, 그는 물흐르듯 막힌바 없이 세밀한 분석과 변론을 극히 투철하고 정밀하게 해주었다.
 
또 소재 [[노수신]](盧守愼)이 정암(整庵) 나흠순(羅欽順)의 ≪곤지기≫《곤지기》(困知記)를 바탕으로 「도심은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고, 인심이 느껴서 드디어 통한다.」고 주장 하자 그는 이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며 「성인의 인심 도심은 대개 모두 동처(動處)를 지적하여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의 사후 [[이황|퇴계]]와 [[기대승|고봉]]은 그의 설을 존중하고 [[노수신|노소재]]의 설을 적극 공격하였는데, 그의 전론은 유실되어 전하지 못한다.
 
[[1560년]](명종 15) 정월 그는 세상을 버렸다. 3월 후학 [[기대승]]이 삼가 술과 과일을 준비하여 영전에 전(奠)을 올렸다.<ref>제문(祭文) : 경신 3월 7일 후학 고봉 기대승은 삼가 주과(酒果)로써 근자에 작고하신 하서 선생 영정에 올리며 아뢰옵니다. 아아 선생이시여 이 지경에 이르셨단 말입니까, 은미(隱微)한 성언(聖言)을 장차 뉘가 들어 찾아내며, 후학들을 장차 뉘가 들어 깨닫게 하오리까. 너무도 하옵니다. 우리 도가 쇠퇴함이여! 세상에 어찌 다시 선생 같으신 분이 계시오리까. 제가 병으로 인해 고향에 돌아온 것은 선생에게 의지하여 의혹난 폐혹(蔽惑)을 제거하리라 바라고 있었사온데, 갑자기 이 지경에 이를 줄을 뉘 일렀겠사옵니까, 어찌하여 하늘도 믿지 못할 것이 이와 같단 말입니까. 아아! 선생께서 진택(眞宅: 유택)으로 돌아가시리니 이제는 종유(從遊)의 즐거움과 사모하고 우러르던 소회는 이로서 마지막이라, 어찌하오리까. 어찌하오리까. 공경히 한 잔을 올리오며 영결종천(永訣終天)하옵니다 아! 슬프옵니다.</ref>
 
===문집 간행 ===
* [[1568년]] (선조 원년) 2월 ≪하서집≫《하서집》(河西集) 초고본을 간행하였다.(서문은 문인 조희문이 찬하였다.)
* [[1686년]] (숙종 12) 4월 ≪하서집≫《하서집》(河西集) 중간본을 간행하였다.(서문은 [[송시열]], 발문은 [[박세채]]가 찬하였다.)
* [[1796년]] (정조 20) 9월 ≪하서집≫《하서집》(河西集) 3차 중간을 하교하였다.(문묘 종사시 유집)
* [[1802년]] (순조 2) 5월 ≪하서집≫《하서집》(河西集) 3차를 간행하였다.(발문은 돈암 [[이직보]]가 찬하였다.)
 
===서원 제향 및 사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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