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카 개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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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역사}}
'''다이카 개신'''(大化改新)은, 일본 [[아스카 시대]]의 [[고토쿠 천황|고토쿠 오키미]] 2년, 일본 연호로 [[다이카]](大化) 2년([[646년]]) 봄 정월 갑자 초하루(1일)에 발호된 「개신(改新)의 조(詔)」를 토대로 한 정치개혁 운동이다. 나카노오에노 미코(中大兄皇子, 훗날의 [[덴지 천황]]) 등이 [[소가노 이루카]]를 암살하고 [[소가 씨]] 본종가(本宗家)를 멸한 [[을사의 변]] 뒤에 이루어졌다고 하며(이 암살사건까지 다이카 개신으로 포함시켜 부르기도 한다). [[치천하대왕|오키미]](大王, 천황온요미는 대왕이지만 천황의 뜻으로 사용)의 궁([[수도]])을 [[아스카]]에서 나니와 궁(難波宮, 지금의 [[오사카 시]] [[주오 구 (오사카 시)|주오 구]])으로 옮기고, 소가 씨를 포함한 아스카의 호족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정치 구조가 오키미 중심의 정치로 바뀌게 된 사건이자 「다이카」라는 일본 역사상 최초의 연호를 사용하였다.또한 천황이란 글자를 이때부터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 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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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사의 변 ===
''{{참고|을사의 변}}''
소가 씨는 [[소가노 이나메]](蘇我稲目) - [[소가노 우마코|우마코]](馬子) - [[소가노 에미시|에미시]](蝦夷) - 이루카의 4대에 걸쳐 정권을 장악하였다. 나카토미노 가마타리(中臣鎌足, 훗날의 [[후지와라노 가마타리]])는 이러한 소가 씨의 전횡에 불만을 품고 고구려나 백제 신라와 같은 중앙집권제와 같은 군주, 즉 오키미케(大王家, [[일본 황실]])로 권력을 되돌리고자 가루노 미코(軽皇子, 훗날의 고토쿠 오키미)에게 접촉했으나, 그의 기량이 부족함을 알고 그만두고 나카노오에노 미코에게 접근하였다. 함께 견수사 출신의 미나부치노 쇼안(南淵請安)에게 학문을 익히고 소가 씨 타도의 계획을 구상하게 되었다. 나카노오에노 미코는 같은 소가 씨족임에도 에미시・이루카 부자에게 비판적이었던 소가노 구라야마다노 이시카와마로(蘇我倉山田石川麻呂, 소가노 이시카와마로)의 딸과 결혼하고 사에키노 고마로(佐伯子麻呂), 가쓰시로노 와카이누카이노 쓰나다(葛城稚犬養網田) 등을 끌어들였다.
 
소가 씨는 [[소가노 이나메]](蘇我稲目) - [[소가노 우마코|우마코]](馬子) - [[소가노 에미시|에미시]](蝦夷) - 이루카의 4대에 걸쳐 정권을 장악하였다. 소가 씨는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와 같은 한반도의 국가의 교류로 세력이 막강하였다. 나카토미노 가마타리(中臣鎌足, 훗날의 [[후지와라노 가마타리]])는 이러한 소가 씨의 전횡에 불만을 품고 고구려나 백제 신라와 같은 중앙집권제와 같은 군주, 즉 오키미케(大王家, [[일본 황실]])로 권력을 되돌리고자 가루노 미코(軽皇子, 훗날의 고토쿠 오키미)에게 접촉했으나, 그의 기량이 부족함을 알고 그만두고 나카노오에노 미코에게 접근하였다. 함께 견수사 출신의 미나부치노 쇼안(南淵請安)에게 학문을 익히고 소가 씨 타도의 계획을 구상하게 되었다. 나카노오에노 미코는 같은 소가 씨족임에도 에미시・이루카 부자에게 비판적이었던 소가노 구라야마다노 이시카와마로(蘇我倉山田石川麻呂, 소가노 이시카와마로)의 딸과 결혼하고 사에키노 고마로(佐伯子麻呂), 가쓰시로노 와카이누카이노 쓰나다(葛城稚犬養網田) 등을 끌어들였다.
그리고 [[고교쿠 천황|고교쿠 오키미]] 4년([[645년]]) 6월 12일, 아스카의 이타부키 궁(板蓋宮)에서 나카노오에와 가마타리 등이 소가노 이루카를 참살하는 [[쿠데타]]를 결행하고, 다음날 소가노 에미시까지 자신의 저택에 불을 질러 자결함으로써 소가 씨족 중심의 정치체제는 막을 내렸다. 이것을 사건이 일어난 해의 간지를 따라 「'''을사의 변'''」이라고 부른다.
 
나카토미오 가마타리는 소가노 이루카에게 "삼한의 사신이 왔을 때 들고온 서신을 소가노 이루카에게 읽게하자"라고 다짐하였다. 이는 삼한의 사신이 야마토 정권에 보내는 서신이 모욕적이였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645년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사신들이 내일(來日)하였고 이 떄 소가노 이루카 대신은 필히 출석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大織冠伝에 의하면 삼한의 사신들을 부른 이유는 소가노 이루카를 불러 들이기 위함이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고교쿠 천황|고교쿠 오키미]] 4년([[645년]]) 6월 12일, 아스카의 이타부키 궁(板蓋宮)에서 나카노오에와 가마타리 등이 소가노 이루카를 참살하는 [[쿠데타]]를 결행하고,결행하였다. 다음날 소가노 에미시까지 자신의 저택에 불을 질러 자결함으로써 소가 씨족 중심의 정치체제는 막을 내렸다. 이것을 사건이 일어난 해의 간지를 따라 「'''을사의 변'''」이라고 부른다.
 
古人大兄皇子은 궁에 도망치면서 "한인(韓人)들이 이루카를 죽였다"라고 외쳤다고 한다.「韓人殺鞍作臣 吾心痛矣」
 
쿠데타를 일으킨 中大兄皇子은 야마토의 수도를 나라 아스카에서 오사카의 나니와로 옮기면서 아스카에 수많은 사슴들을 풀어놓았다. 이는 일본에서 "바보"를 뜻할 때 馬鹿라고 부르기 때문이며 소가노 이루카의 세력이 막강하던 수도 아스카에 바보들이 있었다라는 뜻을 내세우기 위해서이다.
 
=== 신정권 발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