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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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호적상 [[1902년]]) [[울릉도]] 출신이고, [[울산]]에서 성장 후, [[일본]]에 유학하여,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했다. 이관술 집안은 경남 울산군(현재는 울산광역시 울주군) 범서면 일대에서 이름난 양반 지주 가문이었다.
 
일본 유학을 마치고 [[1929년]] 서울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에 교사로 부임하였다. 어떠한 경우에도 학생 체벌을 하지 않은 이관술은 동덕여고에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최고의 인기교사가 되었다. 이 학교에서 학생들의 동맹휴학을 지도하는 것으로 사회 운동을 시작하였다. 제자들의 독서회 모임과 이를 기반으로 한 '경성 여학생 만세운동'은 그의 끓는 피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당시 동덕여고보에는 이관술의 이복동생 이순금도[[이순금]]도 재학 중이었다. 1930년 3월에 동덕에 편입한 뒤 [[이효정]]의 동기로 함께 어울렸고 후에 유명한 여성 공산주의 운동가가 된다. 이관술은 한국인과 일본인 학생들을 묶어 조일반제공동투쟁동맹이라는 조직을 건설했다가 체포되어 복역했다.
 
그는 1930년대부터 본격적인 항일혁명운동에 뛰어들었다. 반제국주의동맹-경성트로이카-경성콤그룹에서 핵심 지도자로 일하게 된 그는 가장 대중적인 지도자이자 혁명가였다. 1920년대 숱하게 명멸한 조선공산당의 오류를 답습하지 않고 [[이재유]]와 함께 서울 지역을 중심으로 노동운동을 진행해나갔다. 정책적 대안 마련을 위해 '노동조건조사표'를 작성해 공장의 노동조건을 조사하기도 했다. 그는 수배 중에 구두닦이, 고물장수, 솥땜장이로 위장해 일제경찰의 눈을 속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