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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년기와 소년기 ====
5~6세 무렵부터 이미 문자를 이해하고 시(詩)를 지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1514년]](중종 9) 5살 때 부친 참봉공이 [[천자문]]≫을》을 가르치는데, 눈여겨보기만 하고 질문에 대한 답을 하지 않자 참봉공이 화를 내며 「자식을 낳은 것이 이와 같으니, 아마도 벙어리인 모양이다. 집안이 말이 아니겠구나.」 하였다. 얼마 후에 손가락에 침을 묻혀 창벽에 글을 쓰는데 모두 [[천자문]]≫에》에 있는 글자였다. 그래서 참봉공은 비로소 기특히 여기었다. 또 일찍이 아는 사람과 시를 짓는데, 「넓고 아득한 우주에 큰 사람이 산다.」라는 글귀가 있었다. 하루는 생파를 손에 들고 겉껍질에서부터 차근차근 벗겨 들어가 그 속심까지 이르고서야 그치니, 이를 본 참봉공이 장난삼아 하는 줄로 알고 나무라자, 그는「자라나는 이치를 살펴보려고, 그렇게 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1515년]](중종 10) 6세 때 정월 보름달을 보고 《상원석(上元夕)의 시를 지었다. 또 어떤 손님이 와서 하늘을 가리키며 하늘천(天)자로 글제를 삼아 시를 지어 보라고 하니, 즉석에서 대답하기를 『형체는 둥글어라, 하 크고 또 가물가물, 넓고 넓어 비고 비어, 지구 가를 둘렀도다. 덮어주는 그 중간에, 만물이 다 들었는데, 기나라 사람들은 어찌하여 무너질까 걱정했지.』라고 하니 주변 사람들이 모두 놀래며 특이하게 여기었다.
 
[[1517년]](중종 12년) 8세 때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의 숙부 돈후재(敦厚齋) 조원기(趙元紀)가 전라 관찰사로 있을 때 그를 보고 기특히 여기며 더불어 시를 짓는데, 그의 뛰어난 재주와 높은 수준의 글 솜씨를 보고 「장성신동(長城神童), 천하문장(天下文章)」이라 칭찬했다.
 
==== 수학 ====
[[1519년]](중종 14) 10세 때 전라도 관찰사로 와있던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을 찾아뵙고 ≪소학《[[소학]]》(小學)≫을 배웠는데, [[김안국|모재]](慕齋)는 그를 기특히 여기며, 「이는 나의 소우(小友)이다.」고 하였다. 그리고 하은주 시대 「삼대(三代)의 인물」이라 일컬었다.
 
[[1522년]](중종 17) 13세 때 시를 잘 짓던 그는 스스로 「시를 배우지 아니하면 설 수가 없다.(不學詩無以立)」는 말을 성인의 교훈으로 생각하고, ≪시경《[[시경]]》(詩經)≫을 탐독하였다.
 
[[1526년]](중종 21) 17세 때 면앙정(俛仰亭) [[송순]](宋純)을 찾아가 뵙고 수업하였으며, 그 후로도 계속 왕래하며 문안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조광조]]·[[김정 (조선)|김정]]등 기묘 사림들이 화를 당하였어도 그들의 자치주의 노선을 밟을 수밖에 없었고, 또 정면으로 뛰어들어 그 어려운 유업을 짊어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후 그는 문신으로서 처음으로 [[조광조]]등 기묘 사림을 죽인 [[조선 중종|중종]]에게 [[기묘사화]]의 잘못됨을 개진하며, 무고하게 희생된 그들의 신원 복원을 청하였던 것이다. 이는 죽기를 각오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로 도통적 의리에서 나온 것이었다.
 
[[1528년]](중종 23) 19세 봄에 서울에 올라가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선비들에게 칠월 [[칠석]](七夕)날을 기리는 시험을 보였는데, 그도 응시하여 장원이 되었다. [[홍문관]] 대제학 [[이행 (조선)|이행]](李荇)이 기특히 여기며 사람이나 글이 모두 옥이라고 하면서도, 다만 혹시 남의 손을 빌리지나 않았나 의심하여 그를 성균관에 있게 하고 일곱 가지 글제를 내어 시험을 했는데 모두 그 자리에서 지어 권을 바쳤을 뿐더러, 시문의 운치가 모두 뛰어나니 [[이행 (조선)|이행]]은 크게 경탄해 마지않았다. 그 중의 「염부」, 「영허부」는 문집에 있다. 그때 지은 시권 《칠석부(七夕賦)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 내렸다.
 
[[1531년]](중종 26) 22세 성균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같이 합격한 동방(同榜)은 화담 [[서경덕]], 대곡 [[성운 (1497년)|성운]], 휴암 [[백인걸]], 임당 [[정유길]], 금호 임형수 등이 있다.<ref>참찬 [[송순]]이 일찍이 현감 오겸과 더불어 말하기를 [[신묘년]]의 사마 방목에 미치자 대곡 [[성운 (1497년)|성운]], 화담 [[서경덕]], [[하서]] 김인후, 휴암 [[백인걸]], 임당 [[정유길]]을 내리 세니, 오겸이 크게 놀래며 「한 명단 안에 어진 자가 어찌 그리 많은가.」라고 하였다.</ref> 이듬해 할아버지 훈도공(訓導公)이 돌아가셨다.
[[1540년]](중종 35) 31세 겨울 10월에 별시 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권지승문원 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에 등용되었다.
 
[[1541년]](중종 36) 여름 4월 [[사가독서|호당]](湖堂)에 들어가 [[사가독서]](賜暇讀書) 하였다. 함께 뽑힌 12사람과 더불어 계(契)를 닦고 이름을 「호당수계록(湖堂修契錄)」이라 했다. 이들과는 서로 학문적 교류가 각별하였다.<ref>호당수계록 13인 : 간재 [[최연 (강릉)|최연]], 십성당 [[엄흔 (1508년)|엄흔]], 추파 [[송기수의 묘역|송기수]], 송재 나세찬, 국간 윤현, 죽계 임열, 지산 [[이황]], 금호 임형수, 우암 김수, 상덕재 [[정유길]], 급고재 이홍남, 호학재 [[민기]]</ref> 겨울 10월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 겸 경연전경(兼 經筵典經) 춘추관 기사관(春秋舘 記事舘)에 제수되었다.
 
[[1542년]](중종 37) 가을 7월에 학식과 덕망이 높은 사람들이 맡는 [[대간|청요직]] 홍문관(弘文館) 저작(著作)에 승진되었다.
[[1543년]](중종 38) 34세 여름 6월 홍문관 부수찬 지제교 겸 경연검토관으로 승진하였으며, 7월 주강(晝講)에 나아가 시사를 논하는 자리에서 그는 홀로 개연히 상소문을 올려 [[조선 중종|중종]]에게 수신·자성의 도를 진술하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았다.
 
『바른 선비들을 《소학》의 무리라 하여 배척하는 낡은 정치 풍토가 만연해 있는 조정의 기강과 풍속을 바로 잡을 것과, [[기묘년]]에 희생된 사람들이 한때 잘못한 일은 있더라도 그 본심은 터럭만큼도 나라를 속인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무거운 죄를 입었습니다. 그 후에 죄를 지은 사람 중에 비록 죽어도 남은 죄(大逆不道)가 있는 자들이 세월이 오래되어 더러는 복직된 자도 있사온데 [[기묘년]] 사람들은 오히려 상의 은혜를 입지 못하였사오니, 신은 홀로 온편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더 나아가 [[기묘년]] 사람들이 숭상하던 《소학》· 《향약》 등은 버려지고 쓰지 아니합니다. 《[[소학]]》과 《[[향약]]》은 성현의 글인데도 불구하고 지금의 선비들이 시속에 빠져 읽어서는 안 될 글이라 하며 버리니 매우 온편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지적 하는데 그 사연이 매우 간절하고 절실하였다.
 
때는 [[기묘년]] 으로부터 20여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조야에서는 당시 일을 꺼리고 두려워하며 감히 꺼내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문신으로서 처음 [[기묘사화|기묘명현]](己卯名賢)의 신원 복원을 개진하였는바 이는 감히 죽기를 각오하지 않고서는 홀로 할 수 없는 일로, 도통적 의리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ref>[[1519년]] (중종 14년) 기묘 명현 : [[조광조]]·[[김식]]·[[김정]]·기준·윤자임·[[한충 (조선)|한충]]은 귀양 같다가 사형 당하고, [[김구]]·[[박세희]]·[[박훈 (1484년)|박훈]]·[[홍언필]]·[[이자 (1480년)|이자]]·[[최산두]]·[[유인숙]]는 유배를 당하고, [[안당]]·[[이장곤]]·[[김안국]]·[[김정국]]·[[김세필]]·[[정광필]]·신명인 등은 사림을 두둔하다 파면을 당했다.</ref> 이를 계기로 사림의 입이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조선 중종|중종]]은 [[기묘사화|기묘명현]]의 신원 복원에 대해서는 허락하지 않고, 다만 폐기토록 지시한 《[[소학]]》·《[[향약]]》에 대해서만 철회토록 허락하였다.
 
[[1543년]](중종 38) 8월 그는 [[기묘사화|기묘명현]]의 신원 복원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이 같은 상황을 더는 견딜 수 없어 하며, 연로하신 부모를 뵙는다고 청원하여 귀근(歸覲) 하였다. 겨울 12월 연로하신 부모 봉양의 걸양(乞養)을 청하여<ref>양친의 나이가 모두 칠십이오니 마지막의 봉양을 원하옵니다라고 하였다.</ref> 고향과 가까운 [[옥과면|옥과]]현감에 제수되고, 춘추관의 겸직은 그대로 띠었다.<ref>[이종범의 호남인물열전] [36] '묵죽도'에 새겨진 도덕문명정치의 꿈. 조선일보(2012.08.20)[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8/19/2012081901268.html].</ref> 이때 호남관찰사로 와 있던 규암(圭庵) [[송인수]](宋麟壽)와 더불어 학문을 닦고 글을 주고받으며 정이 매우 두터웠다.
[[1545년]](인종 원년) 36세 가을 7월 [[조선 인종|인종]]이 갑자기 승하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목을 놓아 통곡하며, 더는 살고 싶지 않은 듯이 하여 매우 깊은 심장병이 발작했다. 그리고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가 이내 소생하였다. 곧이어 [[을사사화]](乙巳士禍)가 발생하자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고향 [[장성군|장성]]으로 돌아와 다시는 벼슬할 마음을 끊고, 산림에 은둔한 채 술과 시로 울분을 토로하며 세월을 보냈다.<ref>[이종범의 호남인물열전] [39] 어두운 시대, 영화 거부하며 술과 공부…조선일보(2012. 09. 3)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9/02/2012090201409.html].</ref>
 
[[1546년]](명종 원년) 4월에 《효경간오》(孝經刊誤) 발문을 지었는데, 이는 옥과 현감으로 봉직할 당시 [[유희춘]](柳希春)이 한양에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본읍에 들러 [[주희|주자]](朱子)의 효경간오》라는 책을 보여 주자, 이를 매우 흐뭇해하면서 친히 베껴놨던 것인데, 이제 그 책 말미에 발문을 붙여 그 뜻을 넓혀서 배우러 오는 자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이와 같이 고향에 묻혀 절의를 고수하던 그가 택할 수 있는 길은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뿐이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이래 강학에 전심하여 소문을 듣고 찾아온 학도들에게 순순(諄諄)히 가르침을 베풀되, 반드시 먼저 《[[소학]]》을 읽히고 다음에 《[[대학]]》을 읽히는데, 한결같이 주문공의 성법(成法)에 따랐다. 두 아들을 가르침에 있어서도 역시 《[[소학]]》을 십 년이나 읽도록 하며 딴 책으로 바꾸어 주지 않았다.
 
==== 훈몽재 훈학 ====
[[1548년]](명종 3) 봄에 어버이를 모시고 [[순창군]] 쌍치면 둔전리 점암촌(鮎巖村)에 우거(寓居)하여, 초당을 세우고 편액을 [[훈몽재 유지|훈몽]](訓蒙)이라 걸고, 여러 학생들을 훈회하였는데, 반드시 먼저 《[[소학]]》을 읽고 다음에 《[[대학]]》을 읽게 하였다. [[순창군|순창]] 점암은 나무와 돌이 빼어나게 좋으며, 강 언덕에 반반한 바위가 있어 능히 수십 인이 앉을 만 하였는데, 제자 양자징(梁子澂)을 비롯한 조희문(趙希文) 등과 더불어 《[[대학]]》을 강의 하였다. 세상이 이를 '대학암'(大學巖)이라 일컬는다. 또 상류에는 [[낙덕정|낙덕암]](樂德巖)도 있다. 이와 같이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체념한 체 산림에 은둔하여 후학 양성과 시와 술을 벗 삼아 세월을 보냈는데, 오히려 마음이 태평스러웠다. [[1549년]](명종 4) 봄 2월에 ≪대학강의(大學講議)≫ 발문(跋文)을 짓고, 추만 [[정지운]]의 《천명도》를 얻어 보고 이를 대폭 수정 보완해 인성의 본질을 파헤치는 탁견을 제시한 《천명도》(天命圖)를 저술하여 조선 [[성리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10월에 부친 참봉공 상을 당하여 12월에 고향 [[장성군|장성]]으로 돌아와 맥동 원당골에 장사하였다.
 
==== 인종에 대한 절의 ====
오히려 부렵구려 주왕(周王) 비의 생이별은, 만난다는 희망이나 있으니.
 
[[1547년]](명종 2) 그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절의'를 고수하는 생활로 일관했다. 봄에 성균관 전적으로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가을에 공조정랑으로 제수되어 부름을 받고 길을 가다 병으로 사(辭)하고 돌아왔다. 또 전라도사(全羅都事) 제수되었으나 바로 체직(遞職)되었다.
 
체직 다음날 18일에 「양재역 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이 일어나 사림계 인사들이 극형에 처해지고 유배되었는데, 이들은 그의 사상적 동지요 절친한 벗들로 그들의 죽음을 매우 슬퍼했다.<ref>정미사화(丁未士禍) 라고도 한다. 이때 [[송인수]]·임형수 등은 사사되고, [[이언적]]·[[노수신]]·[[유희춘]]·[[백인걸]] 등 20여 명이 유배되었다. 특히 임형수와는 [[사가독서]] 계원으로 둘도 없는 친구였다. <도임사수 원사 작단가>란 시조를 지어 그의 억울한 죽음을 슬퍼했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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