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나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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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국방비의 증가와 대상인, 대지주 증가로 일어난 세수(稅收) 감소 등에 대해 개혁이 촉구되어 6대 황제 [[북송 신종|신종]](神宗)은 [[왕안석]](王安石)을 등용하여 국정개혁에 나섰다. 이 움직임은 '''[[왕안석]]의 신법(新法)'''이라 불리었고, 주로 영세농민의 보호와 대상인, 대지주의 억제를 목표로 했으나, 신법은 지주, 상인세력과 그쪽 출신인 관료(구법파(舊法派)의 대반대에 부딪혔다. 이들의 다툼은 나날이 격렬하게 증가하여 서서히 송나라의 국력을 기울게 하였다.
 
이때쯤 만주에서 일어난 [[여진족]]은 [[1115년]] 스스로 [[금나라]]를 세웠고, 송나라는 금나라에 대해 함께 요나라를 공격하자는 약속을 맺었고(해상의 맹세), [[1121년]] 요나라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송이 금나라에 대항하기 위해 요나라의 잔당과 손을 잡은 사실이 드러나 금나라의 분노를 사서 1127년 카이펑이 공격당해 함락되고 황제 [[흠종]](欽宗), [[태상황]](太上皇) [[북송 휘종|휘종]](徽宗)을 북쪽으로 사로잡아 갔다([[정강의 변]](靖康之變). 흠종의 동생이었던 강왕(康王) [[조구]](趙構)는 남쪽으로 천도하여 임안(현재 [[항주]])에서 황제를 선언하여 '''고종'''으로 즉위하였다. 이 이후부터 송나라는 남송이라고 불리었다. 송나라는 여진족 금나라에 먹혔고 몽골인 원나라에 먹히면서 멸망하였다.
 
=== [[남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