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 혁명: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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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반란군 출신들과 지지자들 사이의 권력기반을 넓히기 위해 쿠바 정부는 권력을 잡자마자 혁명 시민군을 조직했다.
 
[[1959년 2월]] 피델 카스트로는 쿠바의 총리가 되었다. 그는 즉시 국가 경제의 개혁에 착수하여, 임대와 전기 요금을 내리고 집권 첫 해인 1959년 5월, 토지개혁법으로 거의 보상 없이 사유 토지 및 재산을 몰수하였고, 400 헥타르 이상의 토지와 공공 시설을 유상 몰수하여 국유화하였으며, 민영 부문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한편, 도박 산업을 금지시켰다. 또한 정부는 쿠바에서 많은 미국 시민권자들을 축출하였다.<ref> {{뉴스 인용 |제목 = CIA conspired with mafia to kill Castro |url = http://www.guardian.co.uk/world/2007/jun/27/usa.cuba |확인날짜=2009-04-05 }}</ref><ref>{{웹 인용 | url=http://www.carpenoctem.tv/mafia/lansky.html | 제목=Meyer Lansky | 확인날짜=2009-04-06 |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50403170341/http://www.carpenoctem.tv/mafia/lansky.html | 보존날짜=2005-04-03 | 깨진링크=예 }}</ref> 쿠바 변호사 마리오 라소는 크기에 관계없이 농장들을 정부가 점유했다고 썼다. 쿠바의 중상류층이상류 중산층이 소유하던 토지, 기업, 회사도, 피델 카스트로 가족이 소유한 농장도 국유화되었다. 이러한 조치들은 피델 카스트로 정부에 의하여 시에라 마에스트라 선언에서 기초한 프로그램이라는 명분으로 착수되었다.<ref>{{웹 인용 |url=http://www.chibas.org/raul_chibas_manifiesto.php |제목=Familia Chibás > Raul Antonio Chibás > Manifiesto Sierra Maestra |확인날짜=2009-04-06 |언어=스페인어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30117013342/http://www.chibas.org/raul_chibas_manifiesto.php |보존날짜=2013-01-17 |깨진링크=예 }}</ref> 쿠바의 중산층은 카스트로가 정권을 잡자마자 거의 대부분 쿠바를 탈출하였다. 이들 망명자의 거의 대부분은 바로 물 건너 미국의 마이애미에 정착하여 격렬한 반 카스트로 운동을 벌이며 미국의 대외 정책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초기에는 토지개혁 등 민주주의혁명의 성격을 띠었으나, 1960년 후반 이후부터는 공산주의혁명으로 이행하기 시작하였다. 미국 소유의 원유, 전화, 전기 회사와 설탕 공장의 국유화에 따라 미국의 이익이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으면서 미국과의 관계도 악화되었다. 대신에 미국은 쿠바의 설탕 수입을 줄였고 소련은 쿠바의 설탕 잉여분을 사들였으며 무역과 기술 대표단을 파견하였다. 1960년 말까지 혁명 정부는 총 250억 미국 달러에 달하는 사유 재산을 국유화하였다.<ref name="Lazo">Lazo, Mario, ''American Policy Failures in Cuba--Dagger in the Heart!'' 1970 Twin Circle Publishing Co., New York, pp.198-200, 240</ref> 이중 미국인의 재산은 불과 1억 미국 달러를 상회했을 뿐이다.<ref name="Lazo"/><ref> Faria, Miguel A. ''Cuba in Revolution--Escape from a Lost Paradise'', 2002, Hacienda Publishing, Macon, Georgia, pp.105,182,248</ref> 또한 1960년 8월 6일에 미국과 다른 외국 소유의 재산도 모두 국유화되었다. 이에 미국은 미국 내 쿠바인의 자산을 동결하고 쿠바에 대한 통상 제한을 강화하는 것으로 대응해서 지금까지 거의 50년간 지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