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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그는 [[을사사화|을사년]] 이후로 평일에 늘 울읍(鬱悒)하여 궁한 사람이 돌아갈 데가 없는 듯이 하였으며, 그 음풍(吟諷)하는 사이에 나타난 것이 많이 이와 같았다.
 
[[1549년]](명종 4) 봄 2월에 《주자대전》(朱子大全) 중에서 《대학 강의》(大學 講義)를 얻어 보고 《대학 강의》 발문(跋文)을 지었다. 또 그 무렵 성리학자들의 관심이 《천명도》(天命圖)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추만 [[정지운]](鄭之雲)이 「사단은 이에서 생기고, 칠정은 기에서 생긴다.」로 표현해 이를 도식화하고 해설을 붙인 《천명도》를 완성하였는데, 이를 받아 본 그는 이를 대폭 수정 보완해 인성의 본질을 파헤치는 탁견을 제시한 《천명도》를 그려 조선 [[성리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이 논의에 퇴계 [[이황]]도 적극 참여했는데, [[이황]]도 역시 그의 도학 문자를 보고 의견과 해설의 정밀함에 대해 깊이 공경하였다..<ref>1543년 추담 정지운 천명도 저술, 1548년 하서 김인후 천명도 저술, 1553년 퇴계 이황 정지운의 천명도 개정판 저술</ref> 이러한 그들의 심오한 토론은 뒷날 [[이황]]과 [[기대승]] 간의 「사칠 논변」(四七 論辯, 사단과 칠정에 관한 이황과 기대승의 토론)이 일어나게 된 사상적 배경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