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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양무운동은 상군(湘軍)과 회군(淮軍)을 이끌고 [[태평천국]]을 진압한 [[증국번]]과 [[이홍장]] 그리고 [[좌종당]] 등 지방에 있는 한인(漢人)관료에 의해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중앙권력의 핵심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운동의 추진에는 여러가지 어려움이 있었다. 양무운동시기의 권력의 중심은 [[서태후]]에게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친왕]]은 신설된 총리아문의 장관으로 구미외교를 전담하여 양무정책 추진의 중심이었다. 그는 군기처내에서 문상 등 일부 관료의 지지를 얻었으나 반대파의 견제를 받았으며 [[청불전쟁]]의 발발([[1884년]])과 함께 탄핵을 받아 사임하게 되었다.
양무운동의 대표자 [[이홍장]]은 [[증국번]]의 막우(幕友)로 발탁된 후 회군을 조직하고 [[상하이]] 지방의 경제력을 배경으로 급성장하였다. 그는 [[증국번]]의 뒤를이어 [[1870년]] 직례총독에 임명되어 [[1895년]] [[청일전쟁]]의 패배로 사임할때까지 직례총독과 북양통산대신에 재직하면서 양무운동을 적극 추진하고 [[청나라]] 말기 외교문제를 풀어 나가는데 큰 활동을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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