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부흥운동: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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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가 [[660년]]에 멸망한 뒤 [[당나라]]는 웅진도독부 등 여러 도독부를 설치했으며, [[백제 의자왕|의자왕]] 등 백제인의 일부를 [[당나라]]로 끌고 갔다. 하지만 [[백제]]의 장군이나 장수로 지냈던 사람들이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흑치상지]]는 [[임존성]]을 거점으로 삼아 [[백제]]의 옛 성들을 일부 되찾는 데 성공을 했으며, 왕족 [[복신]](福信)과 승려 [[도침]](道琛)은 [[주류성]](周留城)에 웅거하고 [[661년]]에 백제부흥군을 이끌고 나당연합군을 공격하기도 했고, 그 기세가 자못 커서 200여 성을 회복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일본]]으로부터 왕자 [[부여풍]](豊)을 맞아다가 [[백제]]의 32대 왕으로 삼았으며, [[사비성]]·[[웅진성]] 등을 포위하여 주둔하는 당군의 식량이 궁핍한 위기에 이르는 일이 몇 차례에 걸쳤다. 이 부흥군과의 전투에서 당군이나 [[신라]]군은 패하기가 일쑤였다. 그러나 이 부흥 운동도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풍이 또 [[복신]]을 죽이는 내분이 생겨 와해되었다. [[663년]] [[9월]] [[당나라]]의 원병을 얻은 연합군이 이 기회를 포착하여 부흥군의 본거지인 [[주류성]]을 함락하였으므로, 4년에 걸친 부흥 운동도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또한 [[664년]]에는 [[지수신]]이 지키고 있던 [[임존성]]이 함락되었고 [[664년]] [[4월]]에 [[사비성]]에서 일어난 백제 부흥운동 역시 진압되었다. 이후에도 [[674년]]에 백제 부흥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부여융은 백제 멸망 직후 당나라로 끌려간 백제유민들 약 1만 명을 통치했다. 당나라가 한반도 흡수의 전초기지 목적을 가지고 야심차게 출범시켰던 웅진도독부는 만주 내 백제유민들의 자치기구 정도로 그 성격이 변하게 된다. 그래서 당나라에서는 이 웅진도독부를 '소 백제'라고 부르기도 했으며 추후 소고구려나 발해에게 통합된다. 요동에서[[요동]]에서 고구려-백제가 발해랑 합쳐짐에 따라 부여계가 삼국통일된 셈.
 
당으로 돌아간 부여융은 나당 전쟁이 완전히 종결된 676년 요동의 건안성에 웅진 도독부를 세우고, 백제 멸망 당시 당나라로 압송된 약 1만 명의 백제 유민들을 모아 지배했다. 당나라에서 부여융에게 내린 작위는 대방군왕. 옛 백제 왕들과 같은 동일한 직위였다. 
 
부여융의 손자인 부여경이 [[측천무후]] 대에 대방군 왕으로 임명된 것을 끝으로 작위 세습에 관한 기록이 전무한 것을 보면 8세기 초에 소멸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당의 역사서 《구당서》는 이 건안성이 발해에게[[발해]]에게 흡수된 것을 백제의 멸망이라고 보고있는데, 이는 건안성으로 이주한 백제 유민들을 염두한 것으로 보이긴 한다. 
 
== 평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