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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개돼지'들 지네 나라가 대단한 줄 앎 현실은 국제'좆만이'인지도 모르고 :)
== 역사 ==
{{본문|미국의 역사}}
=== 아메리카 원주민과 유럽의 식민지화 ===
{{참조|미국의 아메리카 원주민|아메리카의 유럽 식민지화|13개 식민지|신대륙 이주설}}
[[아메리카 토착민|알래스카 원주민]]을 비롯한 북아메리카 본토의 [[아메리카 토착민|원주민]]들은 주로 [[신대륙 이주설|아시아에서 이주]]해 온 것으로 여겨진다. 12,000년 ~ 40,000년 전에 아메리카에 온 것으로 보이는 이들<ref>{{웹 인용|url=http://anthropology.si.edu/HumanOrigins/faq/americas.htm|title=Peopling of Americas|publisher=Smithsonian Institution, National Museum of Natural History|month=June|year=2004|accessdate=2007-06-19}}</ref> [[북아메리카]]의 동남부와 서남부의 원주민 집단은 진보한 농경과 건축을 통해 국가 수준의 사회를 이룩했고 북미 전지역에 걸쳐 다양하고 복잡한 문화를 형성했으나, 유럽인들에 의해 전파된 [[천연두]] 등 수많은 외래 질병과 전쟁 및 노예화와 착취로 인해 수많은 [[아메리카 토착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1492년경 8천만 명에 이르렀던 원주민의 인구는 1650년경에는 8백만 명 정도로 줄어들었는데, 이는 유럽의 [[흑사병]]을 넘어선 인류의 대재앙<ref>{{저널 인용|author=Meltzer, D.J.|year=1992|title=How Columbus Sickened the New World: Why Were Native Americans So Vulnerable to the Diseases European Settlers Brought With Them?|journal=New Scientist|pages=38|url=http://www.newscientist.com/article/mg13618424.700-how-columbus-sickened-the-new-world-why-were-nativeamericans-so-vulnerable-to-the-diseases-european-settlers-brought-with-them.html}}</ref> 이라고 서술하기도 한다.)
 
[[파일:MayflowerHarbor.jpg|왼쪽|섬네일|1620년에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신대륙으로 갔다. 그림은 윌리엄 핼샐의 '플리머스 항구의 메이플라워 호', 1882년작.]]
 
1492년, [[제노바]] 출신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포르투갈]]의 지원을 얻지 못하자 [[이사벨 1세]]의 주도로 [[카스티야]]와 [[아라곤]]왕국이 연합하여 성립된 [[스페인]] 왕실과 계약을 맺어 카리브 해 제도까지 다다라, 원주민들과 처음으로 조우하였다. 1513년 4월 2일, [[스페인]]의 [[콩키스타도르|정복자]] [[후안 폰세 데 레온]]이 스스로 "[[플로리다의 역사|라 플로리다]]"(La Florida)라고 부른 땅에 처음으로 발을 디뎠는데, 이때가 유럽인으로는 처음으로 미국 본토에 도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지역에 스페인 정착지가 들어서고 연이어 오늘날의 미국 서남부지역인 멕시코까지 이어졌다. 프랑스인인 [[모피 무역|모피 무역상 쿠레르 데 브와]]들은 [[오대호]] 주변 지역에 누벨 프랑스라는 전초 식민지를 건설했으며, 마침내 [[프랑스]]는 [[멕시코 만]]에 이르는 [[북아메리카]] 내륙 지방 대부분을 자신들의 영토로 주장했다. 정착에 성공한 초기 영국인 정착지로는 1607년 [[제임스타운]]의 [[버지니아 식민지]]와, 1620년 [[청교도]]들의 [[플리머스 식민지]]다. 1619년에 이들 식민지는 이미 버지니아 회의를 구성했는데 이는 [[메이플라워 호|메이플라워 협약]]보다도 앞선 미국 최초의 민주적인 의회였다. 1628년에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회사의 칙허로 말미암아 이주민들이 대거 흘러들어오게 되며, 1629년에 [[메릴랜드 주|메릴랜드]]에, 1634년에 [[뉴 잉글랜드]]에는 10,000여명의 [[청교도]]들이 살게 되었다. 1610년대 말에서 미국 혁명에 이르기까지 약 50,000명의 죄수들이 영국령 아메리카 식민지로 이송되었다.<ref>{{웹 인용|work=Butler, James Davie|url=http://www.dinsdoc.com/butler-1.htm|title=British Convicts Shipped to American Colonies|publisher=Smithsonian Institution, National Museum of Natural History|month=October|year=1896|accessdate=2007-06-21}}</ref> 1614년부터 [[네덜란드]] 정착민들이 [[맨해튼 섬]]의 [[뉴암스테르담]] 등 [[허드슨 강]] 하구를 따라 정착했다. 이주해온 대다수의 인구는 [[잉글랜드]]의 [[청교도]], [[프랑스]]와 [[스위스]]의 [[위그노]], [[아프리카]]에서 노예로서 이주하거나 중남미 식민지에서 들어온(이미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력을 위해 도입되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었다. 이들은 [[뉴잉글랜드]]와 [[버지니아]]를 중심으로한 미드 애틀랜틱 지역, [[캐롤라이나]]를 중심으로한 남부 곳곳에 이주하여 미국의 역사가 태동했다.
 
[[파일:GezichtOpNieuwAmsterdam.jpg|섬네일|260px|뉴암스테르담, 후에 [[뉴욕]]으로 개명하고 급격히 발전하게 된다. 1664년작.]]
1674년, [[영국-네덜란드 전쟁]] 이후 [[네덜란드]]는 자신들의 아메리카 영토를 [[영국]]에 할양했으며, [[뉴네덜란드]] 주는 [[뉴욕]] 주로 개명되었다. 새 이주민 다수는 특히 [[미국 남부|남부]]로 몰렸는데, 이들은 계약 노동자들로, 1630년~1680년 사이에 [[버지니아]]의 전체 이주민 가운데 약 2/3가 계약 노동자들로 남부 대지주들의 [[플랜테이션]]이나 잡일을 위해 고용되었다가 계약 후에 자유 시민이 되었다.<ref>Russell, David Lee (2005). ''The American Revolution in the Southern Colonies''. Jefferson, N.C., and London: McFarland, p. 12. {{ISBN|0-7864-0783-2}}.</ref> 18세기에 들어, [[식민지 시대 미국의 노예 제도|아프리카 노예]]들이 담보 노동의 주요 원천이 되었다.
1729년 북부와 남부의 경제·사회적인 갈등으로 [[캐롤라이나]]가 [[노스캐롤라이나]]와 [[사우스캐롤라이나]]로 분리되고, 1732년 [[스페인]]을 견제하기 위하여 [[조지아 주|조지아]]에 식민지가 설치되면서, 이후 미합중국을 이루게 될 영국의 식민지 [[13개 식민지]]가 모두 성립됐다. 이들 각 주는 대부분의 남성 자유민들이 참여하는 선거를 통해 지방 정부를 두었는데, 옛 영국인의 권리에 헌신하고 [[공화주의]]를 고무시킨 지방 자치의 관념이 발전하였다. 모든 주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아프리카 노예 무역]]을 합법화했다.
 
아메리카 식민지는 [[출산율]]이 높고 [[사망률]]이 낮으며, [[여성]]을 포함한 [[이민]]자가 끊임없이 유입하여 [[인구]]가 급속히 증가했다. (미국의 평균수명은 영국의 평균수명보다 10세이상 앞서있었다.) [[프렌치 인디언 전쟁]]에서 영국군이 [[프랑스]]에게 [[캐나다]]를 빼앗았으나, 이 곳의 [[프랑스어]]를 쓰는 주민들은 남쪽 식민지와는 정치적으로 독립된 상태를 유지하였다. [[아메리카 토착민]]들을 제외한 이들 [[13개 식민지]]의 인구는 1770년에 260만여 명으로 당시 [[영국]]의 1/3 수준이었으며, 아메리카 인구의 1/5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노예들이었다.<ref>Blackburn, Robin (1998). ''The Making of New World Slavery: From the Baroque to the Modern, 1492–1800''. London and New York: Verso, p. 460. {{ISBN|1-85984-195-3}}.</ref> 아메리카 식민지는 [[대표 없이 과세 없다|영국에 조세를 납부]]했으나, 영국 의회에 대표자를 두지 못했다. 1730년대와 1740년대의 [[대각성 운동]]이라는 [[기독교 부흥주의]] 운동으로 종교와 종교 자유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또한 이 운동으로 인해 미국 대학의 역사가 시작되는데, 종교의 자유와 과학의 탐구를 위해 적지않은 대학들이 설립되었다. 1636년에 [[하버드 대학교]]가, 이후에 [[윌리엄 앤 메리 대학교]], [[예일 대학교]], [[프린스턴 대학교]],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등 소위 [[아이비리그]]로 지칭되는 명문 사립 대학들이 설립되었다.
 
=== 독립과 영토 확장 ===
{{참조|미국 혁명|미국 독립 혁명|미국 독립 전쟁|명백한 운명}}
[[파일:Declaration of Independence (1819), by John Trumbull.jpg|섬네일|독립 선언. [[존 트럼벌]] 그림. 1817-18년작.]]
 
1760년대와 1770년대 초 [[미국 혁명|혁명기]]에 아메리카 식민지와 영국 사이 대립으로 [[미국 독립 전쟁]](1775년 ~ 1781년)이 일어났다. 1775년 6월 14일,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제2차 대륙 회의|대륙 회의]]에서 [[대륙군]]을 창설했고, 사령관으로 [[조지 워싱턴]]을 임명했다. 1776년 7월 4일 이 회의에서 [[토머스 제퍼슨]]이 초안을 쓴 [[미국 독립 선언서|독립 선언서]]를 채택했다. 이 날이 오늘날 미국의 [[독립기념일 (미국)|독립기념일]]이다. 1777년 [[연합 헌장]]으로 결속력이 약한 [[국가연합]] 정부를 설립해서 1789년까지 존속했다.
 
[[프랑스]] 지원을 받은 아메리카 군대가 [[영국]]을 무찔러,([[요크타운 전투]]) 영국은 [[파리 조약 (1783년)|미합중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이들 주에게 [[미시시피 강]] 동쪽의 아메리카 영토에 대한 [[주권]]을 승인했다. 독립 당시 미국의 수도는 [[뉴욕]]이었다. 조세권을 가진 강력한 국가를 창설하길 바라는 사람들이 1787년에 [[미국의 헌법#필라델피아 회의에서의 작업|필라델피아 헌법회의]]를 조직하였다. 1789년에 [[미국의 헌법|미국 헌법]]이 비준되었으며, 1789년에 신생 공화국의 [[미국 제1대 의회|초대 상하원 의회]]가 출범하고 조지 워싱턴이 [[미국의 대통령|대통령]]에 취임했고, 1790년에는 수도를 [[필라델피아]]로 옮겼다. 연방 정부가 [[자연권|개인의 자유 및 다양한 법적 보호 보장]]의 제한을 금한 [[미국 권리 장전|권리 장전]]이 1791년에 채택되었다. 1800년에는 수도를 다시 [[워싱턴 D.C.]]로 옮겼다.
 
[[노예제]]에 대한 입장은 유동적이었는데, 미국 헌법 1조 9항에서는 아프리카 노예 무역 폐지를 20년간 유보했다. 북부 주에서는 1780년에서 1804년 사이에 노예제를 폐지했으나, 남부 주에서는 "특별한 관습"(peculiar institution)을 옹호하며 [[노예주]]로 남았다. 1800년경에 시작된 [[제2차 대각성 운동]]으로 [[복음주의]]가 [[노예 제도 폐지 운동]]을 비롯한 다양한 사회 개혁 운동의 원동력이 되었다.
 
[[파일:U.S. Territorial Acquisitions.png|오른쪽|섬네일|미국의 연도별 영토 확장.]]
 
미국은 서부로 영토를 확장하며 [[아메리카 인디언 전쟁]]이 일어났으며 인디언 제거 정책을 펴서 원주민들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보내졌다. 1803년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이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 매입|루이지애나를 매입]]하여 국토의 면적은 거의 두배로 늘어났다. 여러 이유로 영국과 벌인 [[1812년 전쟁]]은 승패가 분명히 갈리지는 않았으나 미국의 [[민족주의]]를 강화시켰다. 미국 군대가 [[플로리다]]를 수 차례 침입하면서 1819년에 미국은 [[스페인]]에게서 [[플로리다]]와 여타 [[멕시코 만]] 연안 영토를 할양받게 된다.([[아담스-오니스 조약]]) 1845년에 미국은 [[텍사스 공화국]]을 병합하였다. "[[명백한 운명]]"이라는 관념이 대중화 되는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ref>Morrison, Michael A. (1999). ''Slavery and the American West: The Eclipse of Manifest Destiny and the Coming of the Civil War''. Chapel Hill: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pp. 13–21. {{ISBN|0-8078-4796-8}}.</ref> 1846년 영국과 [[오리건 조약]]을 맺으면서 미국은 오늘날의 [[미국 북서부]]를 통치하게 된다. [[멕시코-미국 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하면서 1848년에 [[캘리포니아]]와 오늘날의 [[미국 남서부]]를 [[멕시코 할양지|할양]]받게 되었다. 1848년~49년의 [[캘리포니아 골드 러시]]로 서부 이주가 가속화되었다. 새로이 철도가 부설되면서 정착민들의 이동이 쉬워지고, 원주민과의 갈등도 커졌다. 50년 만에 4천만 마리 이상의 [[아메리카들소]](버팔로)가 가죽과 고기를 얻거나 철도망 확대의 편의를 위해 학살당했다. [[평원 인디언]]들의 자원이던 버팔로를 잃어 원주민 문화는 큰 타격을 입었다.
 
=== 내전과 산업화 ===
{{참조|남북 전쟁|미국-스페인 전쟁}}
 
[[파일:Battle of Gettysburg, by Currier and Ives.png|섬네일|왼쪽|"[[게티즈버그 전투]]", [[쿠리에 & 이브]]의 석판화. 1863년경.]]
 
노예주와 자유주는 주와 연방 정부간의 관계를 놓고 갈등했으며, 신설 주의 노예제 시행 여부를 놓고 폭력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런 가운데, 주로 노예제 반대 입장이었던 [[공화당 (미국)|공화당]] 후보 [[에이브러햄 링컨]]이 1860년에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링컨의 취임에 앞서 일곱 노예주는 분리 독립을 선언하여 [[남부 연합]]을 결성했다. (연방 정부는 이를 불법으로 규정하였다.) 남부 연합이 [[섬터 요새 전투|섬터 요새를 공격]]하면서 [[남북 전쟁|미국 내전]]이 발발하였으며, 노예주 네곳이 남부 연합에 추가로 가입했다. 이에 링컨은 [[노예 해방 선언]]에서 남부 연합 노예의 자유 선언을 했다. 1865년에 [[남부 맹방]]이 패배하여 미국 헌법은 세차례 수정되어 당시 노예 신분이었던 [[아프리카계 미국인|아프리카 노예]] 4백만여 명이 [[미국 제13차 수정 헌법|자유를 보장]]받았으며,<ref>[http://www2.census.gov/prod2/decennial/documents/1860a-02.pdf 1860 Census], U.S. Census Bureau, Page 7 lists a total slave population of 3,953,760.</ref> 미국 시민이 되었고, 투표권을 부여받았다. 이 전쟁으로 연방 정부의 권력이 크게 증대되었다.<ref>De Rosa, Marshall L. (1997). ''The Politics of Dissolution: The Quest for a National Identity and the American Civil War''. Edison, NJ: Transaction, p. 266. {{ISBN|1-56000-349-9}}.</ref>
 
[[링컨 암살 사건|링컨이 암살]]당하면서, 새로이 해방된 노예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한편 남부 주를 재건하고 재통합하는 목표로 했던 공화당의 재건 정책이 급진화되었다. [[1876년 미국 대통령 선거|1876년 대선]] 논쟁이 1877년의 합의로 해결되면서 미국의 재건 정책이 종식되었으며, 이내 [[짐 크로 법]]으로 수많은 아프리카계 미국 시민들이 시민권을 박탈당하였다. 북부에서는 도시화가 이루어지고 [[남유럽]]과 [[동유럽]]에서 전례없이 많은 이민자들이 유입되면서 미국의 산업화가 더욱 진전하였다. 1929년까지 지속된 이민 물결로 노동력이 유입되고 미국 문화가 변화하였다. 국가 기반 시설이 발전하면서 경제는 호황을 이루게되었다. 1867년 러시아에서 [[알래스카 매입|알래스카를 매입]]하면서 미국 본토의 영토 확장이 일단락되었다. 영토를 잃은 원주민이 1890년 [[운디드 니 학살]]로 최후의 대규모 무장 투쟁을 벌였으나 실패했다. 1893년, 태평양 [[하와이 왕국]]의 왕정이 미국 거류민들이 주동한 정변으로 전복되자, 1898년에 미국은 [[하와이 제도|이 군도]]를 병합했다. 같은 해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미국은 [[강대국]]의 면모를 보이게 되었으며, [[푸에르토리코]], [[괌]], [[필리핀]]을 병합했다.<ref>John M. Gates, [http://www3.wooster.edu/History/jgates/book-ch3.html War-Related Deaths in the Philippines] {{웨이백|url=http://www3.wooster.edu/History/jgates/book-ch3.html |date=20140629045949 }}, Pacific Historical Review, College of Wooster, August 1984.</ref> (50여년 뒤에 필리핀은 미국에서 독립했으나, 푸에르토리코와 괌은 미국 영토로 남아있다.)
 
=== 세계 대전과 대공황 ===
{{참조|대공황}}
 
[[파일:Dust Bowl - Dallas, South Dakota 1936.jpg|섬네일|왼쪽|1936년 [[더스트볼]]로 버려진 [[사우스다코타]]의 농장.]]
 
1914년에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할 때 미국은 중립 태도를 취했다. 미국인 대부분은 영국과 프랑스를 동정했으나, 많은 이들이 참전에 반대했다.<ref>Foner, Eric, and John A. Garraty (1991). ''The Reader's Companion to American History.'' New York: Houghton Mifflin, p. 576. {{ISBN|0-395-51372-3}}.</ref> 1917년 미국은 결국 [[연합국 (제1차 세계 대전)|연합군]]으로 참전하면서 전황은 [[동맹국]]에 불리하게 전개된다. 전후 상원은 [[국제 연맹]]을 창설한 [[베르사유 조약]]에 비준하지 않았다. 미국은 [[고립주의]]에 경도된 [[일방주의]] 정책을 추구했다.<ref>McDuffie, Jerome, Gary Wayne Piggrem, and Steven E. Woodworth (2005). ''U.S. History Super Review''. Piscataway, NJ: Research & Education Association, p. 418. {{ISBN|0-7386-0070-9}}.</ref> 1920년대에 [[여성의 권리|여권 신장]] 운동은 여성 투표권을 보장하도록 [[미국 제19차 수정 헌법|헌법이 수정]]되는 성과를 얻었다. 번영을 구가하던 [[광란의 20년대]](Roaring Twenties)는 [[대공황]]의 단초가 된 월 가의 대폭락 즉 [[검은 목요일]]로 끝나버렸다. 1932년에 대통령에 당선된 [[프랭클린 D. 루즈벨트]]는 경제 위기에 맞서 [[수정자본주의]]인 [[뉴 딜]] 정책으로 대응하였다. 하지만 1930년대 중반, 중부 지역에 극심한 사막화인 [[더스트 볼]](Dust Bowl) 현상으로 수많은 농촌이 빈곤에 빠졌으며 서부로 이주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초기에 미국은 중립을 유지하다, 1939년 9월에 [[나치 독일]]이 [[폴란드 침공 (1939년)|폴란드를 침공]]하면서 1941년 3월 [[무기대여법]]을 통해 [[연합국 (제2차 세계 대전)|연합국]]에 물자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 제국|일본]]이 [[진주만 공격|진주만을 급습]]하면서 미국은 [[추축국]]에 대항하여 연합군에 참전했다. 참전으로 미국의 자본 투자와 산업 능력이 높아졌다. 주요 참전국 가운데 유일하게 미국은 전쟁 덕분에 부유해진 나라였다.<ref>Kennedy, Paul (1989). ''The Rise and Fall of the Great Powers''. New York: Vintage, p. 358. {{ISBN|0670728197}}.</ref> 연합국의 [[브레튼 우즈 체제|브레튼 우즈 회의]]와 [[얄타 회담]]으로 미국과 [[소비에트 연방]]이 세계 정치의 중심에 서게 되는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게 되었다. 유럽 전선에서 연합국이 승리하자 1945년 [[샌프란시스코 회의]]에서 전후에 발효한 [[유엔 헌장]]이 도출되었다.<ref>[https://web.archive.org/web/20051023164441/http://www.state.gov/r/pa/ho/pubs/fs/55407.htm The United States and the Founding of the United Nations, August 1941–October 1945], October 2005, U.S. Dept. of State, Bureau of Public Affairs, Office of the Historian.</ref> [[맨해튼 계획|처음으로 핵무기를 개발]]한 미국은 그 해 8월에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자 폭탄 투하|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무기를 처음으로 사용했다. 1945년 9월 2일 [[일본의 항복|일본이 항복]]하면서 전쟁이 끝났다.<ref>Pacific War Research Society (2006). ''Japan's Longest Day''.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ISBN|4-7700-2887-3}}.</ref>
 
=== 냉전, 저항 정치, 사회 변혁 ===
{{참고|미국의 식민지 목록}}
{{참조|냉전|베트남 전쟁}}
[[파일:The United Nations Secretariat Building.jpg|섬네일|[[뉴욕]]의 [[미드타운 맨해튼]]에 위치한 [[유엔 본부]]]]
[[파일:Martin Luther King - March on Washington.jpg|섬네일|왼쪽|위오른쪽|1963년 "[[I Have a Dream|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고 연설하고 있는 [[마틴 루터 킹 2세]].]]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냉전]]기에 미국과 소련은 각자 [[북대서양 조약기구]]와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통하여 유럽의 군사 현안을 주도하며 패권을 놓고 경쟁했다. 미국은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법치주의]]를 발전시켰으며, 소련은 [[전체주의]]와 [[공산주의]] & [[사회주의]] &관치경제를 이끌어갔다. 양자는 [[대리전]]을 통하여 전쟁을 벌이고 여러 독재 정권을 지원했다. 1950~53년의 [[한국 전쟁]]에서 미군은 [[중화인민공화국|중국 공산군]]과 싸웠다. [[하원 반미 활동 위원회]](HUAC)에서는 좌익 단체의 국가 전복 혐의를 캐내는 조사 활동을 벌였으며, [[조지프 매카시|매카시]] 상원 의원은 반공 정서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참조|NASA|존 F. 케네디|인권 운동|블랙 파워|마틴 루서 킹 주니어}}
1961년 소련이 [[보스토크 1호|최초의 유인 우주선]]을 쏘아올리면서,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미국이 최초로 "[[아폴로 계획|달에 사람을 보내겠다]]"는 계획을 내세워 1969년에 기어이 실현했다. 또 케네디는 쿠바에서 소련군과 [[쿠바 미사일 위기|핵 위기]]에 직면하기도 하였다. 그런 가운데 미국 경제는 계속 발전했다.
[[마틴 루서 킹 2세]]의 [[비폭력]] 저항주의와 [[맬컴 엑스]]와 [[스토클리 카마이클]]이 주도한 과격주의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흑인 인권운동을 전개했다. 1963년에 [[존 F. 케네디 암살 사건|케네디가 암살]]당한 뒤, [[린든 B. 존슨]] 대통령이 [[1964년 민권법]], [[1965년 투표권법]]을 통과시켜 흑인의 민권이 성장했다. 하지만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여러 인권운동 지도자들이 암살 당하는 등, 사회가 혼란스러웠다. 후임 대통령인 [[리처드 닉슨]]은 동남 아시아로 대리전을 확대했다가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했다. 그런 가운데 [[반문화 운동]]이 [[반전 운동]]과 [[흑인 민족주의]], [[성 혁명]]의 영향을 받아 널리 성장했다. 1960년대는 각종 암살사건, [[흑인 민족주의]], 여성해방운동, [[히피]] 문화, [[동성애]]문화가 등장한 변혁과 격동의 시기였다.
 
[[워터게이트 사건]]의 불명예로 1974년에 닉슨은 [[탄핵]]되는 것을 피하고자 최초의 사임 대통령이 되었으며 [[제럴드 포드]]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하였다. 1970년대 말 [[지미 카터]] 행정부 시대에는 [[스태그플레이션]]과 [[주 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이란 인질 사건]]이 중요한 사건이었다. 1980년에 [[로널드 레이건]]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미국 정치가 우익화되고 대중들도 1960년대의 히피문화에서 보수주의로 변화하였다. 레이건 2기 정부 때는 [[이란-콘트라 사건]]이 일어나고, 소련과 괄목할만한 관계 증진을 이루기도 하였다. 이후 소련이 붕괴하면서 냉전이 종식되었다.
 
=== 오늘날 ===
{{참조|9·11 테러|이라크 전쟁}}
[[파일:World-Trade-Center 9-11.jpg|섬네일|오른쪽|2001년 9월 11일 아침에 일어난 세계 무역 센터 테러.]]
 
[[조지 H. W. 부시]] 대통령 시기에 미국은 유엔을 주도하여, [[걸프 전쟁]]의 승인을 받아냈다. [[빌 클린턴]] 대통령 시대에 현대 미국 역사상 최장 기간의 경제 성장(1991년 3월 ~ 2001년 3월)이 이루어졌으나, [[닷컴 거품]] 현상이 생겼다.<ref>Bill Voyce, [http://iwin.iwd.state.ia.us/iowa/ArticleReader?itemid=00003700&print=1 Why the Expansion of the 1990s Lasted So Long, Iowa Workforce Information Network, 2006-08-21.] {{웨이백|url=http://iwin.iwd.state.ia.us/iowa/ArticleReader?itemid=00003700&print=1 |date=20061006020321 }}</ref> 르윈스키 스캔들로 인해 1998년에 [[빌 클린턴 탄핵|빌 클린턴이 탄핵]]받았으나, 끝내 임기를 지켰다. [[2000년 미국 대통령 선거|2000년 대선]]에서 [[조지 H. W. 부시]]의 아들 [[조지 W. 부시]]가 연방대법원의 결정에 따라 근소한 표차로 당선되었다.
 
2001년 9월 11일, [[알 카이다]] 테러범들이 뉴욕 시의 [[세계 무역 센터]]와 미국 국방부 [[펜타곤]]에 [[9·11 테러|테러 공격]]을 감행하여, 3천 여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부시 행정부는 이에 대응하여 "대테러 전쟁"을 개시했다. 2001년 말, 미군은 [[아프가니스탄 전쟁 (2001년-현재)|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여 [[탈레반]] 정권과 알 카에다 훈련소를 제거했고 2002년, [[이라크]]에 정권 교체 압박을 가했다.<ref>[http://www.usatoday.com/news/world/2003-02-14-eu-survey.htm Many Europeans Oppose War in Iraq], USA Today, 2003-02-14. <br />[http://www.cer.org.uk/pdf/back_brief_springford_dec03.pdf 'Old’ and ‘New’ Europeans United: Public Attitudes Towards the Iraq War and US Foreign Policy] {{웨이백|url=http://www.cer.org.uk/pdf/back_brief_springford_dec03.pdf |date=20040328182510 }}, John Springford, Centre for European Reform, December 2003.</ref> 부시는 2003년에 이라크를 선제 공격했으며, 과거 미국의 동맹자였던 독재자 [[사담 후세인]]을 제거했다.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발생하여 멕시코 만 연안 지대 상당 지역을 심각하게 파괴했으며, 대도시 [[뉴올리언스]]를 황폐화했다. 2008년 11월 4일, 세계적인 경제 침체 속에서 [[버락 오바마]]가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경기 침체는 계속되었으나, 대공황 수준은 아니었고, 2011년 이후 우려와 기대 속 회복 단계에 있다. 2017년에는 [[도널드 존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 지리, 기후, 자연 환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