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일 (1538년):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TedBot (토론 | 기여)
잔글 봇: 틀 이름 및 스타일 정리
출생지 등 바로잡음
1번째 줄:
'''김성일''' (金誠一, [[1538년]]~[[1593년]] [[경상북도]] [[안동시|안동]] 출생)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외교관, 학자이다. 본관은 [[의성 김씨|의성]], 호는 학봉(鶴峰), 자는 사순(士純)이다. 퇴계 [[이황]]의 제자. 시호는 문충공 서애 [[류성룡]]과 함께 [[퇴계]]의 주리론 학문을 이어받은 수제자로 영남학파의 중추 구실을 했다. [[1590년]] 일본에 통신사 부사로 갔다와서 일본이 침략을 하지않을 것이라는 잘못된 판단을 하여 보고함으로써 임진왜란 발발 이후 큰 비판을 받았다. [[임진왜란]] 때 초유사로에 임명되어 경상우도관찰사 겸 순찰사를 역임하다 [[1593년]] 진주성에서 병사하였다.
 
안동에 자리한 학봉종택은 안동의 대표적인 양반가옥의 전형으로 유명하다. 특히 학봉 문중에서는 학봉이 남긴 "3년동안 금부도사가 찾아오지 않으면 선비 집안이 아니다."라는 말을 가훈으로 여겨 왕에게 직언을 하는 문중으로 영남 유림의 중심 문중이 되었다.
21번째 줄:
1590년 일본에 갔던 통신사 일행이 이듬해 돌아와 한 보고는 서로 상반된 것이었다.<ref name="deok112">이덕일,《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석필, 1997) 112페이지</ref> 각처에서 활약하던 일본의 무사들을 정리하고 중앙집권화를 이루었다는 소식이 들리자 선조가 일본의 정세를 파악하고 정탐을 위해 사람을 보냈는데, 조선에서 정탐꾼이 파견된다는 보고를 듣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경계와 검문을 강화하자 선조는 공식적인 사절단을 파견한 것이었다.
 
이때 통신사 중 정사는 [[서인]]인 황윤길이었고 부사는 [[동인 (붕당)|동인]]인 김성일이었다.<ref name="deok112"/> [[1591년]] [[음력 2월]] [[부산]]으로 돌아와귀국하여 각기 조정에 상소를 올릴 때, 황윤길은 반드시 왜군의 침입이 있을 것이라고 보고하였고, 김성일은 다음과 같이 발언하였다.
 
:"그러한 정상은 발견하지 못하였는데 황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인심이 동요되게 하니 사의에 매우 어긋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