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전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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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Corpse of Ngô Đình Diệm in the 1963 coup.jpg|섬네일|쿠데타 뒤 총격을 받아 사망한 [[응오딘지엠]] ]]
1963년 1월 2일 [[압박 전투]]에서 350 명 규모의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게릴라 부대가 1,500 명 이상의 남베트남군을 상대하여 승리하였다.<ref>Neil Sheehan (1989) ''A Bright Shining Lie: John Paul Vann and America in Vietnam''. New York, Vintage: 201–66.</ref> 남베트남군을 지원하던 미군은 8대의 APC 장갑차와 15대의 헬기(10대는 치누크 헬기였고, 나머지 5대는 UH-1 헬기였다.)를 지원해줬다. 이 전투에서 지엠의 총애를 받던 후인반까오(Huỳnh Văn Cao) 장군이 지휘하는 베트남 4군은 크게 패하였다. 압박 전투 당시 남베트남군 측에서는 83명 이상이 전사하고, 미군 헬기 5대가 파괴됐던 데에 비해, 베트콩측의 전사자는 18명이었다. 까오는 능력보다는 가톨릭 신자라는 종교적 배경때문에 발탁된 인물로, 주된 업무는 쿠데타를 방지하는 것이었다. 까오는 게릴라의 공격을 받자 도망가기 바빴다. 워싱턴의 정책결정자들은 지엠 정권이 쿠데타를 억누르는 데 온 힘을 쏟느라 호찌민을 상대하여 공산주의를 막는데는 역부족이라는 생각을 갖기 시작하였다. 1960년부터 1962년동안 지엠은 쿠데타가 발생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로버트 F. 케네디]]는 “지엠은 조그만한 양보도 할 줄 몰랐다. 그는 이성을 잃은 듯 하였다.”고 기록하였다.<ref>Live interview by John Bartlow Martin. ''Was Kennedy Planning to Pull out of Vietnam?'' New York, New York. John F. Kennedy Library, 1964, Tape V, Reel 1.</ref>
 
1963년 5월 8일, [[석가탄신일]]을 맞아 [[후에]]에서 [[불교]] 신자들이 [[국제불교기]]를 들고 지엠정권의 불교 탄압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남베트남군이 군중들을 향해 총을 쏘았고, 9명이 사망하였다. [[후에 펏단 총격 사건]]으로 지엠 정권에 대한 불교계의 분노가 폭발하였다. 지엠 정권은 애초부터 가톨릭에 우호적인 종교정책을 펼치고 있었고, 특히 지엠의 형 [[피에르 마르탱 응오딘툭]](Pierre Martin Ngô Đình Thục)은 후에의 가톨릭 대주교였기 때문에, 후에에서는 종교와 국가가 분리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지엠 정권 기간 동안 후에에서는 가톨릭에 의해 사찰과 석탑이 파괴되는 일이 빈번하였고 석가탄신일을 기념하는 행사 역시 억압받았다. 총격 사건이 일어난 후 불교 지도자들은 책임자의 처벌을 요구하였지만 지엠은 이를 거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