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여빈: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29번째 줄:
주변에서 농담 삼아 "그대와 같은 고을 사람으로 출세하여 요직에 있는 사람들도 많은데 그대는 왜 침체한가", "그 사람들 하는 데로 따르면 될 일이지 왜 주변 타령인가" 라고 하면 그는 대답을 않고 양심장을 펼쳐 보였다 한다. 그는 [[인수정]]에서 시문과 문인들 양성 외에 [[봉화군]] 도촌리 사제(沙堤)의 명정암(冥酊巖)을 산책하곤 했다. [[1623년]](광해군 15) [[3월]] [[인조반정]] 후 집권한 서인 정귄에서 불렀으나 거절하고 나가지 않았다. 그는 처음에는 감곡을 아호로 했다가 뒤에 모래로 불을 땐다, 늦은 나이에 고생스럽게 일을 해도 얻는 것이 없다는 뜻의 취사라는 호를 지어 아호로 삼았다.
 
고향의 향토사 정리에 뜻을 두어 여러 분야에 걸쳐 사료를 모으고 다듬어 편찬 준비를 해두었으며 [[1625년]](인조3) [[이산서원]]에서 향내 관계 인사의 모임을 주관하여 그 심의를 하고 서문까지 지었으나 간행을 못 보았다. [[1627년]] [[1월]] [[정묘호란]]이 발생하고 [[영천]]에서 의병이 창의하자 이여빈은 아들 성화(成樺),성간(成榦),성재(成材) 등을 창의소로 보내 의병에 가담하게 하였다. [[1631년]](인조 9년) [[9월 28일]]에 질병으로 [[인수정]] 정침에서 사망하였다. 사망 당시 나이는 향년 76세였다.
 
=== 사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