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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타이지는 후금의 식량과 물자의 부족을 타개 하기 위하여 [[조선]] 연해의 가도(樓島)에 근거지를 두고 배후를 위협 하던 [[명나라]] 장수 [[모문룡]]을 친다는 명분을 내세워 조선을 침공하였으니 이것이 [[정묘호란]]이다.<ref>구범진,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민음사</ref> 이때 홍 타이지는 조선과의 관계를 공식화하고 대명전쟁을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한 목적에서 희생(犧牲)과 맹서(盟誓) 그리고 저주(詛呪)라는 형식을 수반하는 맹약을 강요하여 체결하였고, 이 맹약을 통해 후금은 [[병자호란]] 이전까지 조선의 대외관계를 상당히 제한했다.<ref>남호현, 《朝淸關係의 초기 형성단계에서 ‘盟約’의 역할》, 조선시대사학회</ref> 홍 타이지는 정묘호란을 통해 하늘이 우리를 사랑하여 조선을 항복시켰다고 선언했다.<ref>{{서적 인용|저자=[[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만문노당역주회|제목=만문노당역저: 태종|날짜=2017년 9월 30일|쪽=99~103}}</ref>
 
1629년 홍 타이지는 1629년에 문서처리 기구인 비트허이 보오서방(書房, {{llang|mnc|{{ManchuSibeUnicode|lang=mnc|ᠪᡳᡨᡥᡝᡳ<br />ᠪᠣᠣ}}|Bithei Boo}}) 설립했고 이 기구에 많은 [[한족]] 관료를 상당수 기용했다. 1631년에는 전형적인 중국식 정치제도인 닝군 주르간육부(六部, {{llang|mnc|{{ManchuSibeUnicode|lang=mnc|ᠨᡳᠩᡤᡠᠨ<br />ᠵᡠᡵᡤᠠᠨ}}|Ninggun Jurgan}})을 설치함으로써 국가 기구를 완비했다. 홍 타이지에게 직속된 기구인 닝군 주르간은육부는 국가의 대소사를 논의함으로써, 기존의 팔기의 버이러들이 공동으로 수행하던 국가 통치의 영역을 잠식했다.잠식해 닝군나갔다. 주르간의육부의 업무를 총관한 것은 6명의 버이러였지만, 그들 가운데 아바타이(阿巴泰, ({{llang|mnc|{{ManchuSibeUnicode|lang=mnc|ᠠᠪᠠᡨᠠᡳ}}|Abatai}})만이 홍 타이지의 형이고 나머지는 모두 홍 타이지의 아들과 조카였다.<ref name="Lee>{{서적 인용|author=이훈|authorlink=|title=만주족 이야기|series=|publisher=너머북스|isbn=9788994606514|page=167~168}}</ref>
1629년 12월부터 홍 타이지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처음으로 [[명나라]]의 영역을 침략했다. 청군은 [[요서]]를 지나치고 몽골 지역으로 우회하여 홍산구(洪山口)로 진격했다.<ref>{{서적 인용|제목=太宗文皇帝實錄|연도=1655|인용문=○戊寅。上督大軍入邊。攻克洪山口城。駐師城內。擢洪山口人方遇清為備禦。給與敕命。令守洪山口。招集流亡。盡心供職。俟後有功。不次擢用。又有明千總一員。把總一員。遁匿山中。聞城克。率百人擐甲執械來降。上嘉之。擢千總為備禦。把總為千總}}</ref> 3개월 뒤 홍 타이지는 묵던에 있던 아민과 쇼토를 불러 영평(永平)과 천안(遷安) 등의 네 개의 성을 지키도록 하였으나, 명군의 반격에 아민을 비롯한 야전 지휘관들은 거주민들을 관대하게 다루라는 홍 타이지의 명령이 무색하게도, 천안과 영평의 주민들을 살육하고 회군해버렸다. 이 사건은 청의 대민관계에 악영향을 미쳤고, 명 변방의 백성들을 회유하려던 홍 타이지의 노력에 큰 흠집을 냈다. 이에 홍 타이지는 죄를 범한 이들을 공개적인 재판을 통해 처벌했다.<ref name="Rowe">{{서적 인용|저자=William T. Rowe|title=China's Last Empire: The Great Qing|series=History of Imperial China|publisher=An Imprint of Harvard University Press|isbn=978-0674066243}}</ref><ref>{{서적 인용|author=Frederic Wakeman|authorlink=|title=The Great Enterprise|series=|publisher=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isbn=9780520235199|year=1986|page=165}}</ref>
 
1629년그해 12월부터 홍 타이지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처음으로 [[명나라]]의 영역을 침략했다. 청군은 [[요서]]를 지나치고 몽골 지역으로 우회하여 홍산구(洪山口)로 진격했다.<ref>{{서적 인용|제목=太宗文皇帝實錄|연도=1655|인용문=○戊寅。上督大軍入邊。攻克洪山口城。駐師城內。擢洪山口人方遇清為備禦。給與敕命。令守洪山口。招集流亡。盡心供職。俟後有功。不次擢用。又有明千總一員。把總一員。遁匿山中。聞城克。率百人擐甲執械來降。上嘉之。擢千總為備禦。把總為千總}}</ref> 3개월 뒤 홍 타이지는 묵던에 있던 아민과 쇼토를 불러 영평(永平)과 천안(遷安) 등의 네 개의 성을 지키도록 하였으나, 명군의 반격에 아민을 비롯한 야전 지휘관들은 거주민들을 관대하게 다루라는 홍 타이지의 명령이 무색하게도, 천안과 영평의 주민들을 살육하고 회군해버렸다. 이 사건은 청의 대민관계에 악영향을 미쳤고, 명 변방의 백성들을 회유하려던 홍 타이지의 노력에 큰 흠집을 냈다. 이에 홍 타이지는 죄를 범한 이들을 공개적인 재판을 통해 처벌했다.<ref name="Rowe">{{서적 인용|저자=William T. Rowe|title=China's Last Empire: The Great Qing|series=History of Imperial China|publisher=An Imprint of Harvard University Press|isbn=978-0674066243}}</ref><ref>{{서적 인용|author=Frederic Wakeman|authorlink=|title=The Great Enterprise|series=|publisher=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isbn=9780520235199|year=1986|page=165}}</ref>
3년 후인 1631년, 홍 타이지는 현재의 [[요령성]]의 해안을 따라 견고하게 방어된 [[대릉하]]의 명군의 요새와 무역 도시를 포위했다. 홍 타이지는 2만 이상의 병력으로 성을 포위했고, [[포르투칼]]에서 갓 들여온 대포로 성을 공격했다. 몇 주간의 전투, 협상, 그리고 지방 지휘관들의 갑작스런 변절 후에 대릉하성은 후금에 함락됐다. 이것은 점차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 신흥국으로서는 중요한 승리였다.<ref>{{서적 인용|author=Frederic Wakeman|authorlink=|title=The Great Enterprise|series=|publisher=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isbn=9780520235199|year=1986|page=164~224}}</ref>
 
1630년 [[의정왕대신회의]]는 아민이 명령을 거역하고, 단 한 번의 교전도 없이 적과 대치하지 않고, 많은 병력을 잃은 죄를 비롯한 16개 죄목으로 그를 사형시킬 것을 규탄했고, 홍 타이지는 이를 감형하여 그를 유폐시켰다. 이로써 홍 타이지는 양람기를 보유한 아민을 숙청하는데 성공했고,<ref name="Wakeman"/> 이듬해 9월 19일 대릉하성 전투의 선봉에 선 탓에 병력 손실을 본 망월타이가 정람기로의 인원 보충 요구를 거부당하자 홍 차이지에게 칼을 뽑아들자,<ref>{{서적 인용|제목=[[만문로당]]|연도=1778|인용문=han hendume. tuttu oci minde alaha niyalma holtohobi kai. muse mektefi fonjiki. alaha niyalma holtoci. holtoho niyalma be waki. alaha niyalma inu oci. yabuhakū niyalma be waki seme. dere fularafi jili banjime hendufi morilaha. tere gisun de manggūltai beile hendume. han serengge. siden be hendumbi dere. mimbe canggi ainu bakcin arafi gisurembi. han seme eitereme haldabaxame banjici ojorakū oci. mimbe ainci waki sembidere seme hendume. loho be julesi obufi fesin be jafame seferdere de. ini emu eme de banjiha deo degelei taiji. sini arbušara mudan waha kai seme šukilara jakade. eteretele genehe. tede beile jili banjifi.}}</ref> 의정왕대신회의가 소집되었으며 홍 타이지는 망굴타이를 일반 버이러로 강등하고, 정람기의 권력을 삭감하는 조치를 취하였다.<ref>《大淸太宗文皇帝實錄》 卷10, p.8</ref>
같은 해에 홍 타이지는 아민과 망굴타이를 제거하고 다이샨의 전폭적인 지지를 끌어내어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시켰다. 그러나 정치적 라이벌을 제거하는 방식으로는 체계적으로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를 구축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홍 타이지에게 필요한 것은 황제를 중심으로 중앙집권이 이루어지는 중국식 정치 방식이었다.
 
1632년 1월 무렵 홍 타이지는 예부의 참정 이백용(李伯龍)의 건의를 받아들여<ref name="Taizung">{{서적 인용|제목=太宗文皇帝實錄|연도=1655|인용문=○丙申 上以元旦朝賀屆期諭八旗諸貝勒大臣曰禮部參政李伯龍疏奏我國朝賀行禮時不辨官職大小常有隨意排列踰越班次者應請酌定儀制等語此言誠是今元旦朝賀。應令八旗諸貝勒獨列一班行禮。外國來歸蒙古諸貝勒大臣次之八旗文武官員次之。各照旗序行禮至貝勒莽古爾泰因其悖逆。定議治罪革大貝勒稱號。自朕即位以來。國中行禮時曾與朕竝坐。今不與坐。恐他國聞之。不知彼過。反疑前後互異。彼年長於朕。可否仍令竝坐。著巴克什達海庫爾纏覺羅龍什索尼與大貝勒代善及諸貝勒會議具奏尋會議時諸貝勒執不可竝坐者半代善曰上諭誠是彼之過不足介懷即仍令竝坐亦可頃之又曰我等既戴皇上為君又與上竝坐恐滋國人之議謂我等奉上居大位又與上竝列而坐甚非禮也禮本人情人心所安。即天心所佑。各遵禮而行自求多福斯神佑之矣自今以後上南面中坐以昭至尊之體我與莽古爾泰侍坐上側外國蒙古諸貝勒坐於我等之下如此方為允協諸貝勒皆曰善於是以其議奏聞上從之}}</ref> 의정왕대신회의를 소집하고 다이샨과 홍 타이지가 나란히 않는 문제를 논의하도록 했고, 다이샨으로 부터 이 자리에서 자신이 홍 타이지의 신하이며, 망굴타이와 함께 지존인 그를 보좌할 것이라는 발언을 받아냄으로써 자신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끌어냈다.<ref name="Taizung"/>
홍 타이지는 1629년에 문서처리 기구인 비트허이 보오(書房, {{llang|mnc|{{ManchuSibeUnicode|lang=mnc|ᠪᡳᡨᡥᡝᡳ<br />ᠪᠣᠣ}}|Bithei Boo}})를 설립했고 이 기구에 [[한족]] 관료를 상당수 기용했다. 1631년에는 전형적인 중국식 정치제도인 닝군 주르간(六部, {{llang|mnc|{{ManchuSibeUnicode|lang=mnc|ᠨᡳᠩᡤᡠᠨ<br />ᠵᡠᡵᡤᠠᠨ}}|Ninggun Jurgan}})을 설치함으로써 국가 기구를 완비했다. 홍 타이지에게 직속된 기구인 닝군 주르간은 국가의 대소사를 논의함으로써, 기존의 팔기의 버이러들이 공동으로 수행하던 국가 통치의 영역을 잠식했다. 닝군 주르간의 업무를 총관한 것은 6명의 버이러였지만, 그들 가운데 아바타이(阿巴泰, ({{llang|mnc|{{ManchuSibeUnicode|lang=mnc|ᠠᠪᠠᡨᠠᡳ}}|Abatai}})만이 홍 타이지의 형이고 나머지는 모두 홍 타이지의 아들과 조카였다.<ref>{{서적 인용|author=이훈|authorlink=|title=만주족 이야기|series=|publisher=너머북스|isbn=9788994606514|page=167~168}}</ref>
 
홍 타이지는 1631년 9월 초를 전후로, 외번 몽골군과 만주군을 현재의 [[요령성]]의 해안을 따라 견고하게 방어된 [[대릉하]]의 명군의 요새와 무역 도시 인근에 집결시켰다. 대릉하성의 병력이 보병 7천, 마병 7천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홍 타이지는 2만 이상의 병력으로 성을 포위했고,<ref>{{서적 인용|제목=太宗文皇帝實錄|연도=1655|인용문=○是日。於大凌河城南。獲一漢人。訊之。言明修築大凌河城。已經半月。城牆已完。雉堞完其半。有總兵祖大壽及副將八員。參遊約二十員。馬兵七千。步兵七千。夫役商賈。約萬餘人在焉。於是大軍遂以是夜進圍其城}}</ref> [[포르투칼]]에서 갓 들여온 대포로 대릉하성을 공격했고,<ref name="Wakeman"/> 11월 21일 대릉하성은 식량이 고갈되어 많은 아사자를 내고 항복했다.<ref>{{서적 인용|제목=太宗文皇帝實錄|연도=1655|인용문=○戊辰。大凌河城內各官皆與祖大壽同謀歸降。獨副將何可剛不從。大壽執之令二人掖出城外於我諸將前殺之可剛顏色不變不出一言含笑而死城內饑人爭取其肉大壽遂遣副將四員遊擊二員來誓 上與諸貝勒對 天誓曰明總兵官祖大壽、副將劉天祿、張存仁、祖澤潤、祖澤洪祖可法、曹恭誠、韓大勳、孫定遼、裴國珍、陳邦選李雲鄧長春劉毓英竇承武。參將遊擊吳良輔高光輝劉士英盛忠祖澤遠胡弘先祖克勇祖邦武施大勇夏得勝李一忠劉良臣張可範、蕭永祚韓棟段學孔張廉吳奉成方一元塗應乾陳變武方獻可劉武元楊名世等今率大凌河城內官員兵民歸降。凡此歸降將士。如誑誘誅戮。及得其戶口之後。復離析其妻子。分散其財物牲畜。天地降譴奪吾紀算若歸降將士懷欺挾詐。或逃或叛。有異心者。天地亦降之譴。奪其紀算。顯罹國法如遵守此盟 天地垂佑。壽命延長。世澤久遠安享太平大壽等誓曰祖大壽等率眾築城。遇滿洲國兵。圍困三月。軍餉已盡。率眾出降傾心歸汗。毫無猜疑歸順以後官軍人民家口俱獲保全。若大壽等違心背盟天地鑒之。殃及其身。死於刀箭之下。儻汗以計詐害。亦惟汗自知之。誓畢。上遣巴克什庫爾纏覺羅龍什。詣大壽諭曰既經盟誓天地。當用何策以取錦州其急言之。大壽曰我即親至御前。商議此事。庫爾纏、龍什、回奏上復遣諭曰。盟誓雖申。民心未定。今晚且勿來。期以詰朝相見大壽曰。事已定。更何猜疑。我即至御前。議取錦州之策。庫爾纏、龍什、還奏上遂令之來命諸貝勒出迎於一里外。諸貝勒行抱見禮大壽曰。諸貝勒來迎。何以克當。諸貝勒曰。將軍親至。豈有不迎之理。一鼓盡時。方至御營。上出幄。列炬以俟。大壽欲跪見。上止之。行抱見禮。令大壽先入幄。大壽謝不敢。遂竝入。命坐於上左。設饌宴之。以金巵酌酒。親賜大壽。大壽辭。候上先上先讓大貝勒代善飲次上飲。次命大壽飲。大壽曰。我所攜之物。日久已罄。願借汗酒。奉獻御前。於是酌酒跪進。上飲畢。上以御服黑狐帽、貂裘、及金玲瓏鞓帶、緞鞾、雕鞍白馬、賜大壽曰。初來歸我。宜拜天地。以禮相見。因暮夜。不能成禮且在戎行。攜物無多。不能以嘉物相贈也。大壽奏曰蒙上優待若此夫復何言我雖至愚豈木石等耶遂定取錦州之策大壽辭入城上送出俟大壽行方入幄}}</ref> 대릉하성 전투의 경제적 효과가 미미했지만,<ref>{{서적 인용|저자=谷井陽子|제목=八旗制度の研究|출판사=京都大學學術出版會|연도=2015|쪽=223}}</ref> 점차 새롭게 흥기하던 신흥국으로서는 중요한 승리였다.<ref name="Wakeman">{{서적 인용|author=Frederic Wakeman|authorlink=|title=The Great Enterprise|series=|publisher=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isbn=9780520235199|year=1986|page=164~224}}</ref>
 
1635년은 후금의 발전이 또 하나의 분수령을 맞은 해였다. 한해 전에 홍 타이지와 상쟁하던 [[차하르]]의 수장이자 몽골의 카간인 [[링단 칸|릭단 칸]]이 사망한 후, 이 해에 릭덴 카안의 아들 [[에제이]]가 후금에 투항에 온 것이었다. 이로써 후금의 직접 통치하에 들게 된 몽골인의 수가 대폭 증가했고, 후금 통치하에 여진인과 한인 수가 비슷해지자, 삼자가 공존하는 새로운 국가의 모델이 필요하게 되었고 동시에 국가의 핵심 종족인 [[여진족|주션]]({{llang|mnc|{{ManchuSibeUnicode|lang=mnc|ᠵᡠᡧᡝᠨ}}|Jušen}})의 정체성을 고민해야 하는 이중적인 상황이 도래했다.<ref>{{서적 인용|author=이훈|authorlink=|title=만주족 이야기|series=|publisher=너머북스|isbn=9788994606514|page=151~152}}</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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