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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타이지는 1631년 9월 초를 전후로, 외번 몽골군과 만주군을 현재의 [[요령성]]의 해안을 따라 견고하게 방어된 [[대릉하]]의 명군의 요새와 무역 도시 인근에 집결시켰다. 대릉하성의 병력이 보병 7천, 마병 7천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홍 타이지는 2만 이상의 병력으로 성을 포위했고,<ref>{{서적 인용|제목=太宗文皇帝實錄|연도=1655|인용문=○是日。於大凌河城南。獲一漢人。訊之。言明修築大凌河城。已經半月。城牆已完。雉堞完其半。有總兵祖大壽及副將八員。參遊約二十員。馬兵七千。步兵七千。夫役商賈。約萬餘人在焉。於是大軍遂以是夜進圍其城}}</ref> [[포르투칼]]에서 갓 들여온 대포로 대릉하성을 공격했고,<ref name="Wakeman"/> 11월 21일 대릉하성은 식량이 고갈되어 많은 아사자를 내고 항복했다.<ref>{{서적 인용|제목=太宗文皇帝實錄|연도=1655|인용문=○戊辰。大凌河城內各官皆與祖大壽同謀歸降。獨副將何可剛不從。大壽執之令二人掖出城外於我諸將前殺之可剛顏色不變不出一言含笑而死城內饑人爭取其肉大壽遂遣副將四員遊擊二員來誓 上與諸貝勒對 天誓曰明總兵官祖大壽、副將劉天祿、張存仁、祖澤潤、祖澤洪祖可法、曹恭誠、韓大勳、孫定遼、裴國珍、陳邦選李雲鄧長春劉毓英竇承武。參將遊擊吳良輔高光輝劉士英盛忠祖澤遠胡弘先祖克勇祖邦武施大勇夏得勝李一忠劉良臣張可範、蕭永祚韓棟段學孔張廉吳奉成方一元塗應乾陳變武方獻可劉武元楊名世等今率大凌河城內官員兵民歸降。凡此歸降將士。如誑誘誅戮。及得其戶口之後。復離析其妻子。分散其財物牲畜。天地降譴奪吾紀算若歸降將士懷欺挾詐。或逃或叛。有異心者。天地亦降之譴。奪其紀算。顯罹國法如遵守此盟 天地垂佑。壽命延長。世澤久遠安享太平大壽等誓曰祖大壽等率眾築城。遇滿洲國兵。圍困三月。軍餉已盡。率眾出降傾心歸汗。毫無猜疑歸順以後官軍人民家口俱獲保全。若大壽等違心背盟天地鑒之。殃及其身。死於刀箭之下。儻汗以計詐害。亦惟汗自知之。誓畢。上遣巴克什庫爾纏覺羅龍什。詣大壽諭曰既經盟誓天地。當用何策以取錦州其急言之。大壽曰我即親至御前。商議此事。庫爾纏、龍什、回奏上復遣諭曰。盟誓雖申。民心未定。今晚且勿來。期以詰朝相見大壽曰。事已定。更何猜疑。我即至御前。議取錦州之策。庫爾纏、龍什、還奏上遂令之來命諸貝勒出迎於一里外。諸貝勒行抱見禮大壽曰。諸貝勒來迎。何以克當。諸貝勒曰。將軍親至。豈有不迎之理。一鼓盡時。方至御營。上出幄。列炬以俟。大壽欲跪見。上止之。行抱見禮。令大壽先入幄。大壽謝不敢。遂竝入。命坐於上左。設饌宴之。以金巵酌酒。親賜大壽。大壽辭。候上先上先讓大貝勒代善飲次上飲。次命大壽飲。大壽曰。我所攜之物。日久已罄。願借汗酒。奉獻御前。於是酌酒跪進。上飲畢。上以御服黑狐帽、貂裘、及金玲瓏鞓帶、緞鞾、雕鞍白馬、賜大壽曰。初來歸我。宜拜天地。以禮相見。因暮夜。不能成禮且在戎行。攜物無多。不能以嘉物相贈也。大壽奏曰蒙上優待若此夫復何言我雖至愚豈木石等耶遂定取錦州之策大壽辭入城上送出俟大壽行方入幄}}</ref> 대릉하성 전투의 경제적 효과가 미미했지만,<ref>{{서적 인용|저자=谷井陽子|제목=八旗制度の研究|출판사=京都大學學術出版會|연도=2015|쪽=223}}</ref> 점차 새롭게 흥기하던 신흥국으로서는 중요한 승리였다.<ref name="Wakeman">{{서적 인용|author=Frederic Wakeman|authorlink=|title=The Great Enterprise|series=|publisher=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isbn=9780520235199|year=1986|page=164~224}}</ref>
 
만주, 내칼카, 코르친 연합군이 릭단을 목표로 한 원정에 나섰다는 소식이 접하고<ref>Atwood, Christopher P. (2004). “Ligdan Khan”. 《Encyclopedia of Mongolia and the Mongol empire》 (Facts On File): 334-335.</ref> [[칭하이|후후노르]] 지역으로 서천하여 종교적 권위를 이용하여 통합체제를 유지하려 한 [[릭단 칸]]은 1634년 [[간쑤 성|감숙 지역]]에서 [[천연두]]로 사망했다.<ref>{{저널 인용|제목=만주의 몽골 차하르부 병합과 그 의미|저널=중국학논총|성=노기식|이름=|url=|날짜=2001|권=14|출판사=|쪽=65~68}}</ref> 이에 홍 타이지는 1635년 9월 13일 [[도르곤]], 요토, 사하랸, [[아이신기오로 호오거|호오거]] 등으로 하여금 [[차하르]]를 정벌하여 릭단 칸의 아들 [[에제이 칸|어르커 어저이 콩고르]]와 수타이 태후의 항복을 받아내고, 수타이 태후의 처소에 있던<ref name="Taizung2"/> [[쿠빌라이 카안]] 이래 [[몽골 제국]] [[카안]]의 권위를 상징하는 '제고지보(制誥之寶)'라는 한자가 새겨져 있는 '대원전국(大元傳國)이라는 이름의 금으로 만든 도장<ref>구범진,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민음사</ref>을 획득했다.<ref name="Taizung2">{{서적 인용|제목=太宗文皇帝實錄|연도=1655|인용문=○庚辰。出師和碩墨爾根戴青貝勒多爾袞、貝勒岳託、薩哈廉、豪格等征察哈爾國。獲歷代傳國玉璽。先是相傳茲璽。藏於元朝大內。至順帝為明洪武帝所敗。遂棄都城。攜璽逃至沙漠。後崩於應昌府。璽遂遺失越二百餘年。有牧羊於山岡下者。見一山羊。三日不嚙草。但以蹄跑地。牧者發之。此璽乃見。既而歸於元後裔博碩克圖汗。後博碩克圖為察哈爾林丹汗所侵。國破。璽復歸於林丹汗。林丹汗、亦元裔也。貝勒多爾袞等。聞璽在蘇泰太后福金所。索之。既得。視其文。乃漢篆制誥之寶四字璠璵為質。交龍為紐。光氣煥爛。洵至寶也。多爾袞等喜甚曰皇上洪福非常。天錫至寶。此一統萬年之瑞也。遂收其璽。攜降民渡黃河。至歸化城。時貝勒岳託有疾分兵一千駐營歸化城。防守察哈爾降民。三貝勒率眾兵。竝察哈爾汗子額爾克孔果爾額哲。及其大臣往略明山西一帶。}}</ref>
1635년은 후금의 발전이 또 하나의 분수령을 맞은 해였다. 한해 전에 홍 타이지와 상쟁하던 [[차하르]]의 수장이자 몽골의 카간인 [[링단 칸|릭단 칸]]이 사망한 후, 이 해에 릭덴 카안의 아들 [[에제이]]가 후금에 투항에 온 것이었다. 이로써 후금의 직접 통치하에 들게 된 몽골인의 수가 대폭 증가했고, 후금 통치하에 여진인과 한인 수가 비슷해지자, 삼자가 공존하는 새로운 국가의 모델이 필요하게 되었고 동시에 국가의 핵심 종족인 [[여진족|주션]]({{llang|mnc|{{ManchuSibeUnicode|lang=mnc|ᠵᡠᡧᡝᠨ}}|Jušen}})의 정체성을 고민해야 하는 이중적인 상황이 도래했다.<ref>{{서적 인용|author=이훈|authorlink=|title=만주족 이야기|series=|publisher=너머북스|isbn=9788994606514|page=151~152}}</ref>
 
1635년 11월12월 22일30일, 홍 타이지는 '주션'이라는 족명을이름을 폐기하고 '만주'를 여진 종족들의 공식적이고 유일한 족명으로이름으로 선포했다.
또한 [[쿠빌라이 카안]] 이래 [[몽골 제국]] [[카안]]의 권위를 상징하는 '제고지보(制誥之寶)'라는 한자가 새겨져 있는 '대원전국(大元傳國)이라는 이름의 금으로 만든 도장을 손에 넣은 천총한은 이제 몽골 제국의 정통을 계승한 군주를 자처할 수 있었다.<ref>구범진,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민음사</ref>
 
1635년 11월 22일, 홍 타이지는 '주션'이라는 족명을 폐기하고 '만주'를 공식적이고 유일한 족명으로 선포했다.
 
;원문
{{인용문|이 날에 한이 말하길, "우리의 나라의 이름은 본래 만주, 하다, [[우라]], [[예허]], 호이파이니라. 그것에 무지한 사람들이 주션이라 한다. 주션이라는 것은 [[시버족|시버]]의 초오 머르건의 후예이니라. 그들이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이로부터 앞으로 모든 이들은 우리 나라의 본래 이름인 만주라고 부르라. 주션이라고 부르면 죄이다."}}
 
이는타이지는타이지가 주션이라는 족명을 폐기함으로써 그 이름에 묻어 있는 과거의 상쟁의 기억, 특히 [[건주여진]]과 [[해서여진]] 상쟁의 기억을 일소하고, '만주'만을 사용함으로써 여진족을여진 종족들을 새로운 명칭 아래 하나로 통합하고자 했다한 것이었다.<ref>{{서적 인용|author=이훈|authorlink=|title=만주족 이야기|series=|publisher=너머북스|isbn=9788994606514|page=152}}</ref>
 
==== 청 제국의 군주 ====
[[파일:Hong Taiji.jpg|섬네일|250px|평복차림의 [[숭덕제]]]]
 
1636년 홍 타이지는 팔기는각각 물론이부 내몽골장관 왕공도르곤, 코르친 한족투시예투 무장들의지농 추대를바다리, 받는 형식으로 즉위식을 올리고도원수 [[칭기스 칸공유덕]]으로부터으로 이어져대표되는 만주인, 몽골몽골인, 제국의한인으로 전통을이루어진 완전히버이러와 복원·계승하였음을대신, 보이는문무 것으로,명관들로 아시아부터 국가들의조선을 시각으로,정복하고 몽골을 [[몽골하나로 제국]]의합쳤으며 동쪽 절반을옥새를 청이얻은 지배하는것은 것을천명이라는 합법화하기명분으로 위해추대를 받는 형식으로 스스로 세 언어로 된 칭호인 '''매우어질고 관대하고 조화로우며온화하고 신성한성스러운 군주'''(弘德彰武皇帝, {{llang|mnc|{{MongolUnicode|ᡤᠣᠰᡳᠨ<br />ᠣᠨ᠋ᠴᠣ<br />ᡥᡡᠸᠠᠯᡳᠶᠠᠰᡠᠨ<br />ᡝᠨᡩᡠᡵᡳᠩᡤᡝ<br />ᡥᠠᠨ}}|Gosin Onco Hūwaliyasun Enduringge Han}}, {{llang|mn|{{MongolUnicode|ᠠᠭᠤᠳ‍ᠠ<br />ᠥᠷᠦᠰᠢᠶᠡᠩᠴ‍ᠢ<br />ᠨ‍ᠠᠶ᠋‍ᠢᠷ‍ᠠᠮᠳ‍ᠠᠭᠤ<br />ᠪᠣᠭᠳᠠ<br />ᠬᠠᠭᠠᠨ}}|Aγuda Örüsiyegči Nayiramdaγu Boγda Qaγan}})를 칭하였으며,<ref>Reuven Amitai-Preiss, David O. Morgan, 《The Mongol Empire & its Legacy》, BRILL, 1999, pp. 260 - 73</ref><ref>구범진,{{서적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민음사인용|제목=太宗文皇帝實錄|연도=1655|인용문=表曰。諸貝勒大臣文武各官及外藩諸貝勒上言。恭惟我皇上承天眷佑。應運而興。輯寧諸國。愛育群黎當天下昏亂之時體天心。行天討。逆者以兵威之。順者以德撫之。寬溫之譽。施及萬方。征服朝鮮。混一蒙古更獲玉璽受命之符昭然可見。上合天意。下恊輿情。臣等遇景運之丕隆。信大統之攸屬敬上尊號。一切儀物。俱已完備伏願俯賜俞允。勿虛眾望。讀畢。上諭曰。數年來。爾諸貝勒大臣。勸朕受尊號。已經屢奏。但朕若受尊號。恐上不協天心下未孚民志。故未允從。今內外諸貝勒大臣。復以勸進尊號。再三固請。朕重違爾等之意。弗獲堅辭。勉從眾議。朕思既受尊號。豈不倍加乾惕。憂國勤政。唯恐有志未逮。容有錯誤。唯天佑啟之。爾諸貝勒大臣。既固請朕受尊號。若不各恪共乃職贊襄國政。於爾心安乎於是令儒臣遍諭諸貝勒大臣畢。眾皆踴躍歡欣。行三跪九叩頭禮而出}}</ref> 국호를 기존의 아이신 구룬({{llang|mnc|{{ManchuSibeUnicode|lang=mnc|ᠠᡳᠰᡳᠨ<br />ᡤᡠᡵᡠᠨ}}|Aisin Gurun}})에서 다이칭 구룬({{llang|mnc|{{MongolUnicode|ᡩᠠᡳᠴᡳᠩ<br />ᡤᡠᡵᡠᠨ}}|Daicing Gurun}})으로 개칭하고, [[만주인]]의 [[한]]이자 [[요동]] 한인의 [[황제]]이자 몽골인의 [[카안]]이 됐다. 이는 곧 만주족이 한인, 몽골인과 공존하겠다는 의지를 선포한 것이었고 다종족국가의 표방을 의미했다.<ref>{{서적 인용|author=이훈|authorlink=|title=만주족 이야기|series=|publisher=너머북스|isbn=9788994606514|page=168~169}}</ref> 사강사간 세첸의 《[[몽고원류|몽골원류]]》는 누르가치를 [[칭기스 칸]]의 정치적 계승자로 인정하고 숭덕제가 정권({{llang|mn|{{만몽 유니코드|ᠲᠥᠷᠥ}}|Törö}})을 장악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 몽골인들도 그러한 주장을 수용했음을 보여준다.<ref>{{서적 인용|author1=김호동|authorlink=|title=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series=아틀라스 역사 시리즈|publisher=사계절|isbn=9788958289326|page=195}}</ref>
 
같은 해, 홍 타이지는 [[명나라]]의 제도를 모방하여 감찰 기관인 도찰원(都察院, {{llang|mnc|{{ManchuSibeUnicode|lang=mnc|ᡠᡥᡝᡵᡳ<br>ᠪᡝ<br />ᠪᠠᡳᠴᠠᡵᠠ<br />ᠶᠠᠮᡠᠨ}}|Uheri-be Baicara Yamun}})을 설립했다. 도찰원의 임무는 황제에게 간언하고, 버이러와 대신들의 불법을 규찰하며, 닝군 주르간을육부를 감찰하고, 논의와 상주에 참여하며, 사건을 심리하는 것이었다. 도찰원도 버이러들의 권력을 잠식했다.<ref>{{서적 인용|author=이훈|authorlink=|title=만주족 이야기|series=|publisher=너머북스|isbn=9788994606514|page=168}}</ref> 홍 타이지는 더 이상 여러 친왕(親王, {{llang|mnc|{{MongolUnicode|ᠴᡳᠨ<br />ᠸᠠᠩ}}|Cin Wang}})과 동등한 자리에 있지 않았다. 그는 이제 유일한 황제([[천자]])였고, 기의팔기의 수장들은소유자들은 관료의 일부분이었다. 이 움직임은 적어도 두 가지 이유에서 중요했다.중요했는데, 하나는첫째는, 남쪽의 광활한광대한 땅을 정복하는 데에 적합한 최상의 정치 조직 형태를 제공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둘째는황제에게황제에 도전할대한 도전의 있게기회를 만들었다는제공했다는 것이다.<ref>{{서적 인용|authorname=William T. "Rowe|authorlink=|title=하버드 중국사 청 중국 최후의 제국|series=21세기 하버드 중국사 시리즈|publisher=너머북스|isbn=978-89-9460627-9|page=40}}<"/ref>
 
1636년 당시 홍 타이지가 제위에 올랐다고 선포하면서 들이민 근거 중 하나는 10년 전 [[정묘호란]]으로 조선을 정복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행사에 참석한 조선 사신들은 홍 타이지에게 세 번 무릎 꿇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린다는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의 예를 거부했다. 홍 타이지는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없었고,<ref>[https://www.hankyung.com/life/article/2019022142831#Redyho 병자호란 미스터리…전쟁을 끝낸 건 천연두였다?]</ref> [[인조]] 또한 이 사건을 계기로 화의가 단절되었다는 것을 자각했다.<ref>《[[인조실록]]》 33권, [[숭정]] 9년 7월 28일 경오 1번째 기사, 上答曰: "頃者本國差人, 適値伊賊僭號之日, 以死自守, 不參於僞賀之班, 伊賊怒逐差人。 自此和事已絶, 偵探誠未易也。 然若不以時月爲期, 則當徐爲之周旋矣。"</ref> 홍 타이지는 조선을 침략하여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홍 타이지는 조선의 사신들의 소동으로 인해 인해 '미완'에 그쳤던 자신의 '황제 즉위식'을 정축년 정월 30일 [[삼전도]]에서 '완성'하고자 하였다. 그는 조선의 사신이 아니라 국왕인 [[인조]]를 출성시켜 의례의 현장에서 자신과 직접 대면하게 함으로써, 묵던의 '황제 즉위식'보다 더 완성도가 높은 의례를 구현하고자 했다.<ref>{{서적 인용|author=구범진|authorlink=|title=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series=|year=2019|publisher=까치글방|page=300~301|isbn=9788972916826}}</ref>
 
홍 타이지는 총 다섯 차례에 걸친 중원 침공 중에 북경성을 포위하기도 하고 북경 인근 지역과 산서·산동의 여러 주현을 약탈하며 많은 전리품을 획득하였지만, 결국에는 하나의 성도 거점으로 유지하지 못했다. 산해관을 확보하지 못하는 이상 정복 전쟁으로 발전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홍 타이지는 먼저 산해관 외곽의 4개의 성, 즉 금주, 송산, 행산, 탑산을 공략하여 산해관에 접근하고자 하였다.<ref>{{서적 인용|저자=魏源|저자링크=|제목=聖武記|권=1|연도=1984|출판사=中華書局|쪽=29}}</ref><ref>{{저널 인용|저자=박민수|날짜=2018년 6월|제목=홍타이지 시기(1627-1643) 만주의 對 중국 전략|url=http://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07485629&language=ko_KR|저널=군사|출판사=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권=|호=107|doi=|확인날짜=2019년 6월 6일|쪽=222~223}}{{깨진 링크|url=http://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07485629&language=ko_KR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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