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카엘 세르베투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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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천문학, 신학, 약학 등에도 관심이 있었으며, 약학과 신학의 역사에서 잘 알려져 있다. 종교개혁 시대에 [[삼위일체]] 교리를 반대한 이유로 [[천주교|로마교회]]와 [[개신교|개신교회]]로부터 정죄 받고 [[제네바]] 시의회로부터 화형당하였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기록된 세르베투스==
 
비정통신앙을 가르쳐 프로테스탄트와 로마 가톨릭 교회에게 이단으로 단죄당하고 제네바에서 칼뱅주의자들에게 처형당했다. 프랑스 툴루즈에서 법학을 공부했고, 삼위일체 문제를 깊이 탐구했다. 1530년 2월 후원자였던 프란체스코 수도회 수사 후안 데 킨타나를 따라 볼로냐에서 거행된 황제 샤를 5세의 대관식에 참석했다. 교황의 허세와 이 세속적인 교황에게 맹종하는 황제에 대해 실망한 그는 후원자를 떠나 리옹·제네바·바젤로 갔고 바젤과 스트라스부르에서 종교개혁 지도자인 요한네스 오이콜람파디우스, 마르틴 부처, 카스파르 슈벤크펠트를 만났다. 삼위일체에 대한 자신의 새로운 견해를 담은 〈삼위일체론의 오류에 대하여, 제7권 De Trinitatis erroribus libri vii〉(1531)을 출판하여 '말씀'은 영원한 하느님의 자기표현 방식인 반면, 성령은 사람들 마음속에서 활동하는 하느님의 활동 또는 능력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정통교리를 비판하고 독자적인 관점을 세우려 했다. 그는 성자는 인간 예수와 영원한 '말씀'의 결합이라고 말했다. 가톨릭교도들과 프로테스탄트교도들은 그의 복잡한 사색 내용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던 듯하며 그의 주장은 분명히 그들에게 혐오스러운 것이었다. 이러한 반응에 대해서 그는 개정판 〈삼위일체에 관한 대화, 제2권 Dialogorum de Trinitate libri ii〉(1532)을 펴냈다.
 
이름을 빌라노바누스로 바꾸어 리옹으로 이주한 뒤 과학 저서들을 편집하고,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리학 Geographia〉을 번역·출판했다. 1534년경 파리에서 장 칼뱅과 만나 신학 문제들을 토론할 기회가 주어졌으나 그곳에 가지 못했다. 4년 뒤 천문학에 대한 책 1권을 출판하여 별들이 사람의 건강에 영향을 끼친다고 주장했다. 1538년 의학부교수들의 비난을 무릅쓰고 파리대학교 의학과에 입학했으며, 그뒤 프랑스 비엔 대주교의 주치의가 되었다. 겉으로는 계속 충실한 가톨릭교도로 지냈지만 개인적으로 신학연구를 계속하여 곧 리옹에서 대표작 '성 파그누스 역 성서'(Biblia sacra ex Santis Pagnini tra[ns]latione:1542)를 출판했는데, 이 책은 예언에 대한 이론으로 유명하다.
 
1546년 자신의 사상을 보충하여 개정한 〈그리스도교 회복 Christianismi Restitutio〉 원고를 칼뱅에게 우편으로 보내면서 만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두 사람 사이에 편지가 몇 번 오간 뒤, 칼뱅은 그와 절연하고 그가 보낸 원고를 보관했다. 또한 칼뱅은 웅변에 뛰어난 프랑스의 동료 설교가 기욤 파렐에게 만일 세르베투스가 제네바에 나타나기만 하면 살려두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1553년 세르베투스는 자신의 원고를 개정하여 빈에서 비밀리에 1,000부를 인쇄했다. 이 책에서 성령과 거듭남의 관계를 논하는 도중 우연히 폐(肺)의 혈액 순환에 대한 자신의 발견을 소개하게 되었다. 그는 이 책에서 성부와 그의 아들 그리스도 모두 콘스탄티누스가 공포한 니케아 신조 때문에 모욕을 당했으며, 이 신조 때문에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의 역할이 모호해지고 교회가 타락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교회를 국가로부터 분리하고 성서와 콘스탄티노플 이전 교부들의 저서에 비추어 입증 가능한 신학 진술만 사용함으로써 교회를 원상태로 회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전에 리옹의 시민이었던 기욤 드 트리는 세르베투스가 칼뱅에게 보낸 편지들 가운데 일부를 입수하여 그를 리옹의 종교재판관에게 고발함으로써 그와 그의 원고를 펴낸 인쇄업자들이 구속되었다. 그러나 재판을 받는 동안 세르베투스는 도망갔고, 가톨릭 당국자들은 그의 초상을 불태우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돈 키호테처럼 그는 제네바에 나타났고, 당국자들의 눈에 띄어 체포된 뒤 1553년 8월 14일부터 10월 25일까지 이단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이 재판은 칼뱅이 주도했고, 사형에 처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세르베투스는 진지한 성서주의와 전적으로 그리스도 중심적인 세계관을 펼쳤으나, 주로 삼위일체와 세례에 대한 견해에서 이단 혐의를 받아 10월 27일 샴펠에서 화형을 당했다.
 
그를 처형한 사건은 프로테스탄트교도들 사이에 이단자에게 사형을 부과하는 문제에 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장 칼뱅에게 신랄한 비판이 쏟아졌으며, 근대 유니테리언주의의 창시자 라일리우스 소키누스에게 영향을 끼쳤다.
 
글 원문: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기록된 세르베투스[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12s1202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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