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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미리 [[중화인민공화국]] [[마오쩌둥]]과 [[소비에트 연방]] [[이오시프 스탈린]]의 협조와 지지를 얻은 [[김일성]]은<ref>소련의 비밀문서가 공개되어 [[스탈린]]과 [[김일성]]의 긴밀한 협의 아래 전쟁이 일어났음이 확인되었다.</ref>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38도선과4시 38도선과 동해안 연선(沿線) 등 11개소에서 경계를 넘어 [[38선]] 이남으로 진격하였다. [[조선인민군]]의 대공세에 [[유엔]]은 [[미국]]을 주축으로 바로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 제82호]]를 의결하고 이 전쟁에서 한국을 [[원조]]하기로 결정하고 [[파병]]하였다. 그리하여 7월 7일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유엔군이 조직되었다.<ref>{{뉴스 인용|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508190032920200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5-08-19&officeId=00032&pageNo=2&printNo=2977&publishType=00020|제목 = 光復十年의 발자취(19): 六 · 二五事變|날짜 = 1955-08-19|출판사 = 경향신문|인용문 = <!-- 이와 반면에 북한괴뢰는 치밀한 계획하에 남침을 기도하고 드디어 1950년 6월 25일 未明 괴로군을 북위 38도선 및 동해안 沿線 11개소로부터 대거 대한민국에 침공을 개시하였다. ...이어 7월7일 맥아더 원수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國聯연합군이 조직되었고 --> }}</ref> 인민군은 무방비 상태였던 중부지방과 호남지방을 삽시간에 휩쓸었다. 연합군은 낙동강방어선에서 배수진의 결전을 전개하였다.<ref>{{뉴스 인용|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508190032920200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5-08-19&officeId=00032&pageNo=2&printNo=2977&publishType=00020|제목 = 光復十年의 발자취(19): 六 · 二五事變|날짜 = 1955-08-19|출판사 = 경향신문|인용문 = <!-- 한편 대전을 넘어선 괴뢰군은 호남평야를 휩쓸고 서남해안 沿邊으로 침입하는 한편 ... 이리하여 한미연합군은 ... 워-커라인(부산반월형진지)를 구축하고 최후의 결전을 전개하였다.--> }}</ref>
 
연합군은 [[더글러스 맥아더]]의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을 시작으로 대대적인 반격을 개시하여 10월 10일 [[평양직할시|평양]]에 이어 [[압록강]] 부근까지 이르렀으나, 11월 중순 [[중국인민지원군]]이 개입하여 전세가 다시 뒤집히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혜산진]]까지 진격하던 국군은 1월 4일 서울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러나 다시 3월 15일에 탈환하였다. 그 와중에 [[남로당]]의 남한 내부 전복을 위한 활동과 이를 제압하려는 대한민국 정부의 충돌로 [[거창 양민학살 사건]], [[국민 방위군 사건]] 등의 사건이 일어났다. 이후 3년 간 지속된 전투로 수많은 군인 및 민간인이 사상하였고, 대부분의 [[산업 시설]]들이 파괴되는 등 양측 모두가 큰 피해를 입었으며, 이념적인 이유로 민간인들의 학살이 자행되고 지주들의 처벌과 그 보복이 반복되면서 남·북 간의 적대적인 골이 깊어지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1953년 7월 27일 22시에 체결된 [[한국휴전협정]]으로 인하여 설정된 [[한반도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휴전]]하였다. 현재까지 서류상으로 휴전 상태로, 협정 체결 이후에도 남북 간에 크고 작은 군사적 분쟁이 계속하여 발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