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광복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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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은 [[일본제국|일제]]의 항복이 가까이 다가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자력으로 국토를 수복하기로 하고, [[1945년]] [[8월 11일]] [[이범석 (1900년)|이범석]]을 총지휘관으로 하는 국내정진군(國內挺進軍)을 편성했다. [[8월 16일]] [[미군]] 비행기를 통해 그 선발대가 [[한반도]]로 향했지만 "[[가미카제]] 특공대가 아직 [[연합군]]을 공격하고 있다"는 무전을 받고 회군하였다. 이틀 뒤 [[8월 18일]] 다시 국내 진입을 시도해 [[서울]] [[여의도 비행장]]에 착륙했지만 [[일본군]]의 저항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 뒤 임정은 [[오광선]]을 국내지대장으로 파견해 [[서울]]에 한국광복군 국내지구사령부를, [[대전]]에 한국광복군 경비대 훈련소를 개설했다. 그러나 광복 후 아무런 저항 없이 [[한국]]에 진주하여 통치권을 행사하던 [[미군정]]은 '사설 군사단체 해산령'을 내려 광복군 국내지대를 해체시켰으며, 귀국길이 막혀 버린 [[중국]] 주재 광복군도 [[1946년]] [[5월 16일]] [[중국]] [[국공내전]](國共內戰)의 혼란 속에서<ref name="kh" /> 사실상의 해체를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광복군 대원들은 [[1946년]] [[2월]]부터 6월 사이 [[이범석 (1900년)|이범석]]의 영도 하에 개인자격으로 귀국하였다. 귀국 당시 광복군 대원수는 20만 명으로 홍보되었다.
 
=== 중국에서의 활동 ===
[[1944년]] [[중국 국민당]] 정권은 한국광복군의 통수권을 [[임시정부]] 주석 [[김구]]에게 이양한다. 그러나 장개석의 한국광복군 통수권 환수를 놓고 [[중국 국민당]] 내에서도 반대하는 시각이 나타났다. 그들의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이청천]]과 [[이범석 (1900년)|이범석]] 휘하의 광복군이 저지른 난폭한 행동들은 특히 [[상하이]]에서, 중국인들 뿐만 아니라 중국 거주 조선인들에게도 증오감을 사고 있었다. 광복군은 친일 매국노를 처단하는 데에도 이용되었다.<ref name="fich72"/> 그러나 광복군의 제거 대상은 [[친일파]]나 친일 부역자들에게만 향한 것은 아니었다. '친일 부역자'들 뿐만 아니라 임시정부에 반대하는 정적(政敵)을 처단하는 데도 이용되었다. 그 당시 임시정부는 경제적인 지원을 받고 있던 보수 진영에 완전히 경사되어 있었고, [[공산주의]]와 [[소련]]의 위험에 대해서 소리높여 비난하고 있었다.<ref name="fich72"/>
 
== '해방 후 광복군'과 박정희 비밀공작원설 ==
=== 귀국 ===
해방 직후 북경에는 광복군 출신, 학도병 출신 등 수많은 조선 청년들이 집결하였다. 그 숫자가 대략 400여 명에 달했는데 만주군 대위 출신은 신현준과 중위 출신의 박정희 전 대통령도 있었다. 임시정부는 동북반사처(辦事處) 최용덕 처장을 보내 일제 패망 이후 일본군과 만주군을 탈영한 한국인 병력에게 임시거처를 마련해주었다. 그러고는 이들을 임시로 김학규 광복군 3지대장 휘하로 편입시켰다. 이때 만주국군 대위 신현준과 중위 박정희는 만주군 장교 경력을 인정받아 3지대 1대대 대대장과 2중대장을 각각 맡았다. 이들은 모두 '해방 후 광복군'이다. <ref>{{저널 인용
한국광복군은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 일본군과 만주군을 탈영한 한국인 병력을 모집하였다. [[1945년]] 9월 21일 [[만주국]] 육군 중위로 복무하던 [[박정희]]는 동료들과 함께 베이징 쪽으로 건너가, 장교 경험자를 찾고 있던 한국광복군에 편입되어, 북경의 [[김학규 (1900년)|김학규]]가 지휘하는 한국광복군 제3지대 제1대대 제2중대장에 임명되어 광복군 장교로 활동하였다. 광복군 대원들은 [[1946년]] [[2월]]부터 6월 사이 [[이범석 (1900년)|이범석]]의 영도 하에 개인자격으로 귀국하였다. 박정희는 1946년 5월 8일 미군 수송선을 타고 부산항으로 귀국하였다. 귀국 당시 광복군 대원수는 20만 명으로 홍보되었다.
|url=http://www.ido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579101
|제목=[정정당담]잘못된 독립유공 포상 사례 셋
|출판사 =경남도민일보
|날짜=2018년 10월 22일}}</ref>
 
박정희가 소속된 광복군 부대는 아마도 북평잠편지대일 것으로 보이는데, 일부 증언에는 제3지대 주평진대대(駐平津大隊)라고도 한다. 평진이란 북평과 천진에서 따온 말이다. 이 부대의 대대장은 박정희와 같이 근무한 신현준이었고 신현준은 광복군의 존재를 해방 이전에는 알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이 부대는 실제 광복군 부대라기보다 해방이라는 급격한 상황 변화에 따라 광복군이 세불리기 차원에서 부대 명칭을 부여한 것으로, 사실상 일종의 포로수용부대였다. 이들 부대를 관리한 중국쪽 기관이 부로관리처(俘虜管理處)인 것도 이를 증명한다. <ref>{{저널 인용
== 과장과 비판 ==
|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4&oid=036&aid=0000000256
그러나 실제보다 과장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2005년]] SBS 삼일절 특집 [[뉴스추적]] 취재에 의하면, [[1945년]] 4월에 작성된 [[대한민국임시정부]] 문서에는 광복군의 인원이 339명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로 선정된 광복군은 560명으로 이들 중 해방 후인 8월 19일에 입대한 인물도 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5&oid=055&aid=0000039645 엉터리 광복군 많다] [[SBS 뉴스]] 2005-03-01</ref>
|제목=기회주의 청년 박정희!
|출판사 =한겨레21
|날짜=2002.10.23}}</ref>
 
이게 박정희가 일제 패망 이전에 광복군 비밀요원이었다는 식으로 기술한 소설 <광복군>(저자 박영만)의 근거로 활용됐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증언자는 이용(李龍), 해방 전엔 이집용(李集龍)이었다. 간도특설대에 대해 제대로 증언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박정희·신현준이 광복군 김학규 장군에게서 “적당한 시기에 일본군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고 1945년 7월에 베이징에서 다시 철석부대로 돌아오는 등 비밀광복군이었다는 얘기는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ref>{{저널 인용
광복군 제1지대 대원이었던 독립운동가 [[김득명]]은 “이것도 사실 중국으로부터 물자를 타기 위해 부풀려진 수”라고 말했다. 광복군은 당시 중국의 경제 원조를 받고 있었다. 김씨는 “중국정부로부터 더 많은 보급물품을 타기 위해 가족 등 관련 없는 이들도 숫자에 포함시켰다”고 밝혔다. 김씨의 증언을 차치하고 공식문서에 언급된 3백39명이 모두 ‘진성 광복군’이라 하더라도 3백39명과 5백60명 사이의 공백은 엄청 크다. 일제의 패망이 짙어지면서 해방 직전 혹은 직후 광복군에 편입된 이들이 많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일본군 포로로 중국군 포로수용소에 잡혀있던 한인 출신 포로들이 광복 직후 임시정부에 무더기로 승계되고, 이들이 광복군으로 편입돼 임정과 같이 귀국하면서 인원이 부정확해졌다는 분석이 많다. 가짜 광복군 논란은 이들(토교대)을 비롯, 비호대와 3지대 등에서 주로 불거지고 있다.<ref>[http://www.vop.co.kr/A00000026115.html 가짜 독립운동가 판친다? 광복군 1지대원 김득명씨 “가짜 광복군 많다” 폭로] [[민중의 소리]] 2005-07-04 09</ref>
|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2&aid=0000176551
|제목="조선인부대 말만 믿고 입대…민간인 학살說은 사실무근"
|출판사 =세계일보
|날짜=2006.08.08}}</ref>
 
또 당시 정황을 비교적 잘 아는 김승곤 전 광복회장은 “박영만은 청와대에서 돈을 받을 줄 알고 ‘광복군’을 썼는데, 내용을 훑어본 박 대통령은 ‘내가 어디 광복군이냐. 누가 이 따위 책을 쓰라고 했냐’며 화를 냈고, 결국 박영만은 돈 한푼 못 받고 거창하게 준비한 출판기념회도 치르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ref>{{저널 인용
|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2&aid=0000177118
|제목=만주군 중위 박정희, '비밀광복군' 둔갑
|출판사 =세계일보
|날짜=2006.08.10}}</ref>
 
소설 광복군이 출간될 당시 중앙정보부에 근무한 이종찬 전 국회의원의 증언이다.“이건 내가 실제로 겪은 것으로 1967~68년 중앙정보부에 ‘<광복군>(저자 박영박) 책을 모두 거둬들이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어렵게 책을 수거해 봤더니 ‘박정희가 광복군 활동을 했다’는 내용이었다. 박 대통령이 그것을 읽고 ‘이런 거짓말을 해선 안된다. 해방 후 김학규 광복군 3지대장이 만주에 있던 한국 국적 군인을 모았다. 그때 잠시 구대장으로 사병을 모아 훈련시킨 적이 있다. 이것은 해방 이후로 내가 장준하나 김준엽처럼 일제때 독립군을 했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그래서 책을 거두어들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ref>{{저널 인용
|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32&aid=0002858277
|제목=[원희복의 인물탐구]임정기념관건립위원장 이종찬 “이승만부터 김원봉까지 다 아우르겠다”
|출판사 =경향신문
|날짜=2018.03.18}}</ref>
 
=== 과장과 비판 ==
그러나광복군은 실제보다그 실체보다 숫자에 과장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2005년]] SBS 삼일절 특집 [[뉴스추적]] 취재에 의하면, [[1945년]] 4월에 작성된 [[대한민국임시정부]] 문서에는 광복군의 인원이 339명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로 선정된 광복군은 560명으로 이들 중 해방 후인 8월 19일에 입대한 인물도 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5&oid=055&aid=0000039645 엉터리 광복군 많다] [[SBS 뉴스]] 2005-03-01</ref>
 
광복군 제1지대 대원이었던 독립운동가 [[김득명]]은 “이것도 사실 중국으로부터 물자를 타기 위해 부풀려진 수”라고 말했다. 광복군은 당시 중국의 경제 원조를 받고 있었다. 김씨는 “중국정부로부터 더 많은 보급물품을 타기 위해 가족 등 관련 없는 이들도 숫자에 포함시켰다”고 밝혔다. 김씨의 증언을 차치하고 공식문서에 언급된 3백39명이 모두 ‘진성 광복군’이라 하더라도 3백39명과광복군 독립유공자 5백60명 사이의 공백은차이는 엄청매우 크다. 일제의 패망이 짙어지면서 해방 직전 혹은 직후 광복군에 편입된 이들이 많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일본군 포로로 중국군 포로수용소에 잡혀있던 한인 출신 포로들이 광복 직후 임시정부에 무더기로 승계되고, 이들이 광복군으로 편입돼 임정과 같이 귀국하면서 인원이 부정확해졌다는 분석이 많다. 가짜 광복군 논란은 이들(토교대)을 비롯, 비호대와 3지대 등에서 주로 불거지고 있다.<ref>[http://www.vop.co.kr/A00000026115.html 가짜 독립운동가 판친다? 광복군 1지대원 김득명씨 “가짜 광복군 많다” 폭로] [[민중의 소리]] 2005-07-04 09</ref>
 
== 구성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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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춘생]] (安椿生, 1912년 8월 12일 ~ 2011년 1월 26일) : [[안중근]] 의사의 5촌 조카로서, 한국 광복군 제2지대 제1구대장으로 활동했다. 해방 후 대한민국 육군 중장을 지냈고, 국회의원 및 제1, 2대 [[독립기념관]] 관장을 지냈다.
* [[장준하]] (張俊河, 1918년 8월 27일 ~ 1975년 8월 17일) : 1944년 1월 일본군에 자원 입대하였으나 7월에 탈출한 후 중국군 준위로 활동했다. 이듬 해인 1945년 2월 중국 [[충칭]]에 있는 한국광복군을 찾아가 소위로 복무하였다. 이후 미국 [[CIA]]의 전신인 전략첩보대(OSS)에서 활동하면서 3개월간 국내 진공작전에 가담하여 국내 밀파 특수공작원으로 대기 하던 중 1945년 해방을 맞아 임정 제1진으로 귀국하였다. 이후 [[김구]]의 비서로 일했고, 《[[사상계]]》를 창간하였다. 1975년 [[박정희]] 정권에 대항하는 거사를 준비하던 중 의문사를 당했다.
* [[김준엽]] (金俊燁, 1920년 8월 26일 ~ 2011년 6월 7일) : 일제 강점기에 학도병으로 강제 징집되었으나 탈출하여1942년 한국광복군을2월 찾아가탈출해 중국에서광복군에 광복군으로합류한 활동했다학병탈출 1호였다. 1945년 해방 후 [[고려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1982년 고려대 총장이 되었으나, 시위학생을 제적하라는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에정권의 요구에 맞서다가 1985년 강제로총장직에서 사임을 당했다. 1987년 6.10 민주화 운동 이후 새로 개정된 9차 헌법 전문에 대한민국 정부가 임시정부를 계승하였다는 문장을 삽입하였다삽입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우당 이회영의 손자 이종찬을 통해 '임시정부 법통 게승'을 관철했다.
 
== 계급 체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