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광복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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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광복군'''(韓國 光復軍)은 [[1940년]] [[9월 17일]] [[중화민국]] [[충칭시|충칭]]에서 조직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정규 국군이다. [[1939년]] [[1월]] 창립된 [[한국독립당]] 당군(黨軍)과 기타 독립군 및, [[지청천]], [[이범석 (1900년)|이범석]] 등이 이끌고 온 만주 독립군과 연합하여 [[1940년]] [[9월 17일]] 성립전례식을 갖고 결성되었다. 1942년 [[김원봉]]의 [[조선의용대]]를 흡수하여 규모가 확대, 개편되었다. 광복군을 실질적으로 통솔하였던 사람은 [[지청천]]과 그의 참모장인 [[이범석 (1900년)|이범석]]이었다.<ref name="fich72">리처드 로빈슨, 미국의 배반:미군정과 남조선 (정미옥 역, 과학과 사상, 1988) 72페이지</ref> 광복군은 [[1944년]]까지 [[중국 국민당]] 정부의 [[중화민국]] [[국민혁명군]]의 통제를 받다가 [[1944년]] [[8월]]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 통수권을 인수하였다. 이후 미국 CIA의 전신인 OSS와 함께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하다가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였다. 3일 후인 8월 18일 이범석이 미군 비행기를 타고 김포공항에 도착했으나 일본 군대의 제지를 받고 중국 상하이로 되돌아갔다. 해방 후 일본군 및 만주군 탈영자들을 받아들여 광복군 인원 규모가 더 확대되었으며, 1946년 귀국했다.
 
== 창설 과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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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준비 작업 ===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의 2차 국공합작이 이뤄졌고, 일본제국에 맞서 싸우기 위해 장제스는 임정이 무력수단을 갖추는데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여기에는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 공원 의거로 조선인들에 대한 우호적인 분위기가 조성된 데다, 장제스와 김구 개인이 돈독한 관계도 한몫했다.
한국광복군은 [[1939년]] [[1월 8일]] 창립된 임시정부의 여당 한국독립당 당군(黨軍)을 모태로 하였다. 이후 기타 독립군 및, [[지청천]], [[이범석 (1900년)|이범석]] 등이 이끌고 온 만주 독립군과 연합하여 [[1940년]] 9월 성립전례식을 준비, 계획하였다.
 
[[1936년]]에 [[장제스]]의 제안으로 임시정부는 중국에 있는 전 조선인 무장세력을 규합하여 광복군 조직을 추진하고 있었다.<ref name="fich72"/> 광복군은 [[1939년]] [[1월 8일]] 창립된 임시정부의 여당 한국독립당 당군(黨軍)을 모태로 하였다. 이후 기타 독립군 및 [[지청천]], [[이범석 (1900년)|이범석]] 등이 이끌고 온 만주 독립군과 연합하여 [[1940년]] 9월 성립전례식을 준비, 계획하였다.
 
[[1940년]] 5월 임시정부 측은 중국 [[국민정부]] 장제스 총통에게 한국광복군의 활동을 승인해줄 것을 교섭하였고, 중국 국민당군의 지휘 하에 둔다는 조건으로 광복군 창립을 승인받았다. 광복군의 지휘권은 중국의 [[중국 국민당|국민당]] 정부가 통제하고 있었으나 [[1944년]] [[8월]] 임시정부로 통수권이 넘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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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립전례식과 창군 ===
 
1940년 9월 15일 임시정부 주석 겸 한국광복군창설위원회 위원장 김구 명의로 「한국광복군선언문」을 발표했다. “광복군은 중화민국 국민과 합작하여 두 나라의 독립을 회복하고자 공동의 적인 일본제국주의자들을 타도하기 위하여 연합군의 일원으로 항전을 계속한다”는 내용의 「한국광복군선언문」을 발표했다. 한국광복군 창설위원회 위원장은 김구였다내용이다. 이어서 9월 17일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 전례식을 거행하고 광복군을 창설했다. [[충칭 대한민국 임시 정부 청사]]에서 임정 요인들과 현지 한국 거류민 및 [[중화민국]] 국방성에서 파견한 군관들이 임석한 가운데 행사가 거행됐다.
 
[[파일:광복군 성립식.JPG|섬네일|300px|오른쪽|[[광복군]] 성립 전례식에서의 [[김구]](통수권자)와 [[지청천]](총사령관)]]
[[파일:KLA Soldier.JPG|섬네일|300px|해방 후 어느 광복군(1946년)]]
 
[[독립기념관]] 광복군 어록비에 김구 명의의 〈한국광복군 선언문〉이 [[독립기념관]] 광복군 어록비에 새겨져 있다. <ref>독립기념관 시어록비 - [http://www.independence.or.kr/KO/Inspect/tombstone/22.htm 광복군]</ref>.
 
{{인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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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군 당시 광복군의 규모는 정확하지 않으나 약 30여 명 정도로 알려져 있다. [[1942년]] [[1월]] [[충칭]] 주재 [[미국]]대사관의 보고서는 충칭의 한국 거류민은 200명을 넘지 못한다고 적고 있다.<ref>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76쪽</ref><ref>United States Depatment of State,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42, Vol 1(Washington, D.C:U.S. Government Printing Office, 1942) p 858</ref><ref name="kh">[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9161806425&code=100100 어제의 오늘: 중국 충칭에서 광복군 창건] 경향신문</ref> 그러나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정]]에서는 5백여 명 이상의 대원으로 시작했다 하며 그 위용을 과시하였다.
 
광복군은 [[중화민국]]의 지원 하에 활동해야 하는 한계를 가지고 출발했다. 중화민국 정부는 광복군을 인정하는 대신 [[1941년]] [[11월]] 광복군은 중화민국 정부 측으로부터 한국광복군 행동준승이라는 9개 조항으로 된 조건을 하달받았다전달받았다. 준승에 따르면 한국광복군은 [[중화민국]] [[중앙군]] [[참모총장]]의 명령과 통제를 받아야만 움직일 수 있도록 명시되어 있었다.<ref name="pp81">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81페이지</ref><ref>이현희, 《대한민국임시정부사》(일조각, 1982) 343~345페이지</ref> [[이현희]]는 이 준승은 한국광복군은 명실상부한 한국의 독립군이 아니라 중국의 일개 보조, 고용군이 된다는 굴욕적인 군사협정이었으며, 임시정부 자체도 그 지위가 의심스러워지기까지 하는의심스러워지는 등의 미묘한 국면을 제공하였다고 평가하였다.<ref name="pp81"/><ref>이현희, 《대한민국임시정부사》(일조각, 1982) 344페이지</ref>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화민국]] 측의 이 준승 명령에 분개하여 임시정부를 [[미국]] [[워싱턴 D.C.]]로 옮길 것을 계획하고,<ref name="pp81"/> [[이승만]]과 연락을 취하기도 하였다.<ref>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82페이지</ref> 그러나 중국 정부가 [[김구]]를 설득하면서 임정 천도안은 무산되었다.<ref>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75~76페이지</ref>
 
한국광복군 준승은 [[1944년]] [[8월]]에 폐기되었고, 이때 광복군의 통수권은 임시정부로 이양되었다.<ref name="pp81"/> 그러나 광복군의 훈련과 유지는 국민당 정부로부터 재정적인 지원을 받아 이루어지고 있었고, 그 계획과 목표 설정까지도 [[장개석]]의 통제 아래 있었다.<ref name="fich72"/> 1944년 중국 국민당 정권은 한국광복군의 통수권을 임시정부 주석 김구에게 이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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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장과 활동 ==
 
한국광복군은 먼저 각지에 흩어져 활동하던 한인 항일 군사조직을 흡수하여 통합하는 데에 진력하였다. [[1941년]] [[1월]] [[무정부주의]] 계열의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편입되었으며, [[1942년]] [[7월]]에는 [[김원봉]]이 이끌던 [[조선의용대]]의 일부를 흡수하였다. 이로써 광복군은 [[지청천]] 총사령과 [[김원봉]] 부사령 밑에 3개 지대와 제3전구공작대, 제9전구공작대, 토교대를 두게 되었으며, 중국 각지에 징모 분처를 설치하고 한국청년훈련반과 한국광복군훈련반이라는 임시훈련소를 운영했다. 기관지 '광복'을 펴내기도 했다.<ref name="kh" /> 이후 [[조선의용대]]의 편입을 놓고 논란이 발생하였다. 그러나 오랫동안 [[김구]]와 대립하고 있던 [[김원봉]]이 [[김구]]의 지도성을 인정한다는 조건으로 군무장관에 임명되었다.<ref name="fich72"/> [[김원봉]]의 군무부장 겸 제1지대장의 임명에도 임정 편입을 탐탁치탐탁지 않게 생각한 [[조선의용대]]원들은 대원들은 화북의 [[김두봉]], [[무정]]에 의해 운영되던 [[조선독립동맹]]으로 넘어간다.
 
[[파일:Kwangbeokkun 194002.jpg|섬네일|400px|왼쪽|맨 앞줄 좌로부터 ([[박찬익 (1884년)|박찬익]], [[조완구]], [[김구]], [[이시영 (1868년)|이시영]], [[차이석]]<br>두 번째 줄 맨 왼쪽 [[성주식]], [[김문호]], [[신정숙]], [[김붕준]]<br>맨 뒷줄 왼쪽부터 [[조성환]], [[조소앙]], [[이청천|지청천]], [[이범석 (1900년)|이범석]], 이름 미상]]
 
임정은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1941년]] [[12월 10일]] [[일본제국|일제]]와 [[나치 독일|독일]]에 [[선전포고]](이 선전 포고는 일본 측에 전혀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국제법의 효력은 없었다)를 하였다. 광복군은 [[1943년]] 영국군에 파견되어 [[버마 전역]]에 투입되었으며, 그 뒤 임정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장 [[이승만]]을 통해 [[미국 국무부]]에서 파견한 도노번 장군에게 [[전략사무국|OSS]] 특별훈련을 받기도 하였다.
 
=== 국내 정진작전과 국군 자격 귀국의 좌절 ===
[[파일:Kimgu&Donobun 01.jpg|섬네일|300픽셀|오른쪽|[[1945년]] [[8월]] [[미국]] 육군 소장 도노반과 면담한 [[김구]] 주석]]
 
=== 국내정진작전과 국군자격 귀국의 좌절 ===
[[파일:Kimgu&Donobun 01.jpg|섬네일|300픽셀|오른쪽|[[1945년]] [[8월]] [[미국]] 육군 소장 도노반과 면담한 [[김구]] 주석]]
1945년 4월 당시 임시정부 의정원의 문서에 따르면 한국광복군의 총 병력 수는 339명이었다.<ref>[http://www.cbs.co.kr/nocut/Show.asp?IDX=344379 해방후 입대해도 광복군?…건국훈장까지 받아] 노컷뉴스</ref> [[4월]]에는 [[광복군]]의 OSS 훈련을 승인하였고, [[미국 육군|미국군]] 중국전구 사령관 [[앨버트 코디 웨더마이어|웨더마이어]] 중장을 방문하였다.
 
[[김구]]는 독자적으로라도 한국광복군의 [[한반도]] 진주를 추진하고자 하였으나추진하였으나, 중국 내에서 활동하는 군사집단에 대한 관할, 감독, 지도권은 [[중화민국]] 정부에 있다는 [[중국 국민당|국민당]] 정권의 경고로 실패하고 만다. 대신 [[김구]]는 [[미국]]에 체류중이던체류 중이던 [[이승만]]에게 수시로 연락하여 광복군과 [[미국]] 육군, 공군과의 OSS 합동훈련 계획 진행 상황을 수시로 독촉하였다.
 
임정은 [[일본제국|일제]]의 항복이 가까이 다가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자력으로 국토를 수복하기로 하고, [[1945년]] [[8월 11일]] [[이범석 (1900년)|이범석]]을 총지휘관으로 하는 국내정진군(國內挺進軍)을 편성했다. [[8월 16일]] [[미군]] 비행기를 통해 그 선발대가 [[한반도]]로 향했지만 "[[가미카제]] 특공대가 아직 [[연합군]]을 공격하고 있다"는 무전을 받고 회군하였다. 이틀 뒤 [[8월 18일]] 다시 국내 진입을 시도해 [[서울]] [[여의도 비행장]]에 착륙했지만 [[일본군]]의 저항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 뒤 임정은 [[오광선]]을 국내지대장으로 파견해 [[서울]]에 한국광복군 국내지구사령부를, [[대전]]에 한국광복군 경비대 훈련소를 개설했다. 그러나 광복일제 패망 아무런 저항 없이 [[한국]]에 진주하여 통치권을 행사하던 [[미군정]]은 '사설 군사단체 해산령'을 내려 광복군 국내지대를 해체시켰으며,해체시켰다. 귀국길이 막혀 버린 [[중국]] 주재 광복군도 [[1946년]] [[5월 16일]] [[중국]] [[국공내전]](國共內戰)의 혼란 속에서<ref name="kh" /> 사실상의 해체를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광복군 대원들은 [[1946년]] [[2월]]부터 6월 사이 [[이범석 (1900년)|이범석]]의 영도지도 하에 개인자격으로 귀국하였다. 귀국 당시 광복군 대원수는 20만 명으로 홍보되었다.
 
=== 통수권 이양받은 광복군 ===
[[1944년]] [[중국 국민당]] 정권은 한국광복군의 통수권을 [[임시정부]] 주석 [[김구]]에게 이양한다. 그러나 장개석의 한국광복군 통수권 환수를 놓고 [[중국 국민당]] 내에서도 반대하는 시각이 나타났다. 그들의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이청천]]과 [[이범석 (1900년)|이범석]] 휘하의 광복군이 저지른 난폭한 행동들은 특히 [[상하이]]에서, 중국인들 뿐만 아니라 중국 거주 조선인들에게도 증오감을 사고 있었다. 광복군은 친일 매국노를 처단하는 데에도 이용되었다앞장섰다.<ref name="fich72"/> 그러나 광복군의 제거 대상은 [[친일파]]나 친일 부역자들에게만 향한 것은 아니었다. '친일 부역자'들 뿐만 아니라 임시정부에 반대하는 정적(政敵)을 처단하는 데도 이용되었다. 그 당시 임시정부는 경제적인 지원을 받고 있던 보수 진영에 완전히 경사되어 있었고, [[공산주의]]와 [[소련]]의 위험에 대해서 소리높여소리 높여 비난하고 있었다.<ref name="fich72"/>
 
=== '해방 후 광복군'과 박정희 비밀공작원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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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18년 10월 22일}}</ref>
 
박정희가 소속된 광복군 부대는 아마도 북평잠편지대일 것으로 보이는데, 일부 증언에는 제3지대 주평진대대(駐平津大隊)라고도 한다. 평진이란 북평과 천진에서 따온 말이다. 이 부대의 대대장은 박정희와 같이 근무한 신현준이었고 신현준은 광복군의 존재를 해방 이전에는 알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이 부대는 실제 광복군 부대라기보다 해방이라는 급격한 상황 변화에 따라 광복군이 세불리기 차원에서 부대 명칭을 부여한 것으로, 사실상 일종의 포로수용부대였다. 이들 부대를 관리한 중국쪽 기관이 부로관리처(俘虜管理處)인 것도 이를 증명한다. <ref>{{저널 인용
|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4&oid=036&aid=0000000256
|제목=기회주의 청년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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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02.10.23}}</ref>
 
이게 박정희가 일제 패망 이전에 광복군 비밀요원이었다는 식으로 기술한 소설 <광복군>(저자 박영만)의 근거로 활용됐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증언자는 이용(李龍), 해방 전엔 이집용(李集龍)이었다. 간도특설대에 대해 제대로 증언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박정희·신현준이 광복군 김학규 장군에게서 “적당한 시기에 일본군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고 1945년 7월에 베이징에서 다시 철석부대로 돌아오는 등 비밀광복군이었다는 얘기는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간도특설대에 대해 제대로 증언한 유일한 증언자 이용(李龍)의 증언이다. 그의 이름은 해방 전엔 이집용(李集龍)이었다. <ref>{{저널 인용
|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2&aid=0000176551
|제목="조선인부대 말만 믿고 입대…민간인 학살說은 사실무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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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06.08.10}}</ref>
 
소설 광복군이 출간될 당시 중앙정보부에 근무한 이종찬 전 국회의원의 증언이다.“이건 내가 실제로 겪은 것으로 1967~68년 중앙정보부에 ‘<광복군>(저자 박영박박영만) 책을 모두 거둬들이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어렵게 책을 수거해 봤더니 ‘박정희가 광복군 활동을 했다’는 내용이었다. 박 대통령이 그것을 읽고 ‘이런 거짓말을 해선 안된다. 해방 후 김학규 광복군 3지대장이 만주에 있던 한국 국적 군인을 모았다. 그때 잠시 구대장으로 사병을 모아 훈련시킨 적이 있다. 이것은 해방 이후로 내가 장준하나 김준엽처럼 일제때 독립군을 했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그래서 책을 거두어들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ref>{{저널 인용
|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32&aid=0002858277
|제목=[원희복의 인물탐구]임정기념관건립위원장 이종찬 “이승만부터 김원봉까지 다 아우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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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장과 비판 ===
광복군은 그 실체보다 숫자에 과장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 이유는 기존의 광복군에 '해방 후 광복군'이 대거 포함됐기 때문이다. [[2005년]] SBS 삼일절 특집 [[뉴스추적]] 취재에 의하면, [[1945년]] 4월에 작성된 [[대한민국임시정부]] 문서에는 광복군의 인원이 339명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로 선정된 광복군은 560명으로 이들 중 해방 후인 8월 19일에 입대한 인물도 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5&oid=055&aid=0000039645 엉터리 광복군 많다] [[SBS 뉴스]] 2005-03-01</ref>
 
광복군 제1지대 대원이었던 독립운동가 [[김득명]]은 “이것도 사실 중국으로부터 물자를 타기 위해 부풀려진 수”라고 말했다. 광복군은 당시 중국의 경제 원조를 받고 있었다. 김씨는 “중국정부로부터 더 많은 보급물품을 타기 위해 가족 등 관련 없는 이들도 숫자에 포함시켰다”고 밝혔다. 김씨의 증언을 차치하고 공식문서에 언급된 3백39명이339명이 모두 ‘진성 광복군’이라 하더라도 광복군 독립유공자 5백60명 사이의560명과는 차이는 매우 크다많다. 일제의 패망이 짙어지면서 해방 직전 혹은일제가 직후패망하면서 광복군에 편입된 이들이 많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일본군 포로로 중국군 포로수용소에 잡혀있던 한인 출신 포로들이 광복 직후 임시정부에 무더기로 승계되고, 이들이 광복군으로 편입돼 임정과 같이 귀국하면서 인원이 부정확해졌다는 분석이 많다. 가짜 광복군 논란은 이들(토교대)을 비롯, 비호대와 3지대 등에서 주로 불거지고 있다.<ref>[http://www.vop.co.kr/A00000026115.html 가짜 독립운동가 판친다? 광복군 1지대원 김득명씨 “가짜 광복군 많다” 폭로] [[민중의 소리]] 2005-07-04 09</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