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봉"의 두 판 사이의 차이

14 바이트 제거됨 ,  1년 전
편집 요약 없음
태그: m 모바일 웹
태그: m 모바일 웹
이 무렵 [[고려 태조|왕건]](王建)이 [[궁예]]의 휘하로 들어왔으므로 그에게 [[철원군|철원]]태수(鐵圓太守)의 벼슬을 주고 [[북원]]의 [[양길]]에게 대항하게 하여 그 땅을 빼앗고 [[901년]] 스스로 왕이라 칭하며 국호를 '고려’라 하였다. 당시 [[궁예]]는 [[신라]]에게 망한 [[고구려]]를 대신하여 복수한다고 호언하며 서북지방의 인심을 모으려 하였다. [[904년]]에는 국호를 '[[마진]]'(摩震)이라 하고 연호를 '무태'라 하였으며 [[신라]]의 관제를 참작하여 관제를 정하고 국가의 체제를 갖추었다. 새 국호 '마진'은 마하진단(摩訶震旦)의 약자이며, 마하는 산스크리트어로 '크다'는 뜻이고 진단은 중국을 뜻하는 말이었으나 후에 '동방의 제국'을 뜻하는 말이 되었다. 즉, 마진은 '대동방국'(大東方國)을 뜻하는 국호이다.
 
[[905년]] 국도(國都)를 [[철원군|철원]]으로 옮기고 [[성책]](聖冊)이라 개원(改元)하였다가 [[911년]] 국호를 태봉이라 고치는 한편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라 개원, [[914년]] 다시 [[정개 (태봉)|정개]](政開)라고 고쳤다. [[궁예]]는 [[철원군|철원]]을 중심으로 하여 [[강원도|강원]]·[[경기도|경기]]·[[황해]]의 대부분과 평안·[[충청도|충청]]의 일부를 점령함으로써 [[신라]]나 [[견훤]](甄萱)의 [[후백제]]보다도백제보다도 큰 세력을 형성하였다.
 
그리하여 태봉은 계속 [[신라]]의 북쪽을 침범하는 한편 [[고려 태조|왕건]]으로 하여금 수군을 이끌고 서남해 방면으로부터 [[후백제]]를백제를 침공하게 하여 진도(珍島)·고이도성(皐夷島城)을 격파하고 [[금성 (나주)|금성]](錦城 : [[나주시|나주]])을 점령하였다.([[금성 싸움]]) 이리하여 국토가 넓어짐에 [[궁예]]는 대규모의 궁궐을 건축하고, 오행사상(五行思想)을 믿어 [[신라]]의 금덕(金德)에 이기고자 자기를 수덕(水德)으로 하였으며, 또한 스스로를 미륵보살(彌勒菩薩)이라 칭하며 일상의 기거동작을 불심을 따르고 불교사상을 통하여 국가를 통치하려 하였다.
 
[[궁예]]의 호족 세력 견제와 민중 지향적 정치 방향에 자신들의 입지가 흔들리게 된 측근자들과 호족은 전전긍긍하게 되어 마침내 [[918년]] ([[천수 (고려)|천수]](天授) 원년)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智謙) 등 측근 4인이 의논하여 호족 세력의 대표격인 [[고려 태조|왕건]]을 새 왕으로 추대하고 쿠데타를 일으키자, 그는 [[왕순식|김순식]]이 있는 명주성(강릉)으로 도피하는 도중 [[부양]](斧壤)<ref>현재의 강원도 [[평강군]]</ref>에서 왕건의 추격군을 만나 퇴로가 차단당하고 추격군과 결사항전을 벌였지만 수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패배, 자결하였다. [[삼국사기]]에는 해를 입어 죽었다고 되어 있고 [[고려사]]에서 맞아 죽었다고 되어 왕건의 정통성을 강조하고 있으나, 야사와 전설에는 왕건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자결하였고 백성들도 슬퍼하였다고 전해진다. 육당 최남선은 풍악기유에서 궁예는 지방 [[호족]]들에게 맞서 왕권을 강화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여 쫒겨났다고 언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