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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5년]] 국도(國都)를 [[철원군|철원]]으로 옮기고 [[성책]](聖冊)이라 개원(改元)하였다가 [[911년]] 국호를 태봉이라 고치는 한편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라 개원, [[914년]] 다시 [[정개 (태봉)|정개]](政開)라고 고쳤다. [[궁예]]는 [[철원군|철원]]을 중심으로 하여 [[강원도|강원]]·[[경기도|경기]]·[[황해]]의 대부분과 평안·[[충청도|충청]]의 일부를 점령함으로써 [[신라]]나 [[견훤]](甄萱)의 백제보다도 큰 세력을 형성하였다.
 
그리하여 태봉은 계속 [[신라]]의 북쪽을 침범하는 한편 [[고려 태조|왕건]]으로 하여금 수군을 이끌고 서남해 방면으로부터 백제를 침공하게 하여 진도(珍島)·고이도성(皐夷島城)을 격파하고 [[금성 (나주)|금성]](錦城 : [[나주시|나주]])을금성을 점령하였다.([[금성 싸움]]) 이리하여 국토가 넓어짐에 [[궁예]]는 대규모의 궁궐을 건축하고, 오행사상(五行思想)을 믿어 [[신라]]의 금덕(金德)에 이기고자 자기를 수덕(水德)으로 하였으며, 또한 스스로를 미륵보살(彌勒菩薩)이라 칭하며 일상의 기거동작을 불심을 따르고 불교사상을 통하여 국가를 통치하려 하였다.
 
[[궁예]]의 호족 세력 견제와 민중 지향적 정치 방향에 자신들의 입지가 흔들리게 된 측근자들과 호족은 전전긍긍하게 되어 마침내 [[918년]] ([[천수 (고려)|천수]](天授) 원년)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智謙) 등 측근 4인이 의논하여 호족 세력의 대표격인 [[고려 태조|왕건]]을 새 왕으로 추대하고 쿠데타를 일으키자, 그는 [[왕순식|김순식]]이 있는 명주성(강릉)으로 도피하는 도중 [[부양]](斧壤)<ref>현재의 강원도 [[평강군]]</ref>에서 왕건의 추격군을 만나 퇴로가 차단당하고 추격군과 결사항전을 벌였지만 수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패배, 자결하였다. [[삼국사기]]에는 해를 입어 죽었다고 되어 있고 [[고려사]]에서 맞아 죽었다고 되어 왕건의 정통성을 강조하고 있으나, 야사와 전설에는 왕건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자결하였고 백성들도 슬퍼하였다고 전해진다. 육당 최남선은 풍악기유에서 궁예는 지방 [[호족]]들에게 맞서 왕권을 강화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여 쫒겨났다고 언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