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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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털|기독교}}
 
'''파울로스바울'''({{llang|grc|Παυλος}} (기원후 5<ref>{{웹 인용|url=http://www.pbs.org/empires/peterandpaul/footsteps/footsteps_1_1.html|제목=Peter and Paul.In the Footsteps of Paul.Tarsus.1- PBS|확인날짜=2019-06-14}}</ref> ~ 64 또는 67<ref>Harris, Stephen L. Understanding the Bible. Palo Alto: Mayfield. 1985. ISBN 978-1-55934-655-9
p. 411"</ref>)는, 초기 [[기독교]]의 [[사도]]로, [[신약성경]]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파울로스 서신|바울 서신]]을 저술했다고 전해지는 인물이다. 신약성경 [[사도행전]]의 기술에 따르면 그는 예수를 믿는 자들을 박해하였으나, 이후 개심하여 기독교에 귀의하여, 이후 기독교의 초기 신앙에 영향을 끼쳤다. 유대인 식의 이름은 '샤울'(사울, {{lang|he|שָׁאוּל}})로 불렸다. [[고대 로마]]의 속주였던 소아시아 키리키아 지방(현재의 [[터키]])의 중심 도시 [[타르수스]] 출신이다. [[로마 가톨릭]] 및 [[정교회]]에서는 [[성인]]으로 기리며, 축일은 [[베드로]]와 같은 [[6월 29일]](가톨릭), [[7월 12일]](정교회)이다.
 
== 개요 ==
{{기독교}}
파울로스는바울는 [[초기 기독교]]를 이끈 뛰어난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교의를 전하려는 열정으로 [[아프리카]](북아프리카) 지역을 제외한 [[로마 제국]]의 주요 도시를 돌아다녔다. 무려 20,000km에 이르는 거리를 돌아다닌 그의 선교 여행과, [[신약성서]] 27개의 문서 가운데 13편에 달하는 그의 이름으로 된 서신서들은, 초대 교회사에서 기념비적인 업적이다. 그는 자신이 선교 여행 중에 여러 번 죽을 위기를 맞았다고 말한다. [[유대인]]에게 다섯 번 매를 맞고,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배가 파선했었다.<ref>[[고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 11:23-28</ref> 그렇게 그는 유대교와 구분된 [[기독교]]를 확립했고, 그 교회는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하지만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게 바울은 지성 없이 열정만 있는 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 열정은 [[예수]]가 왜 [[그리스도]]인가를 [[구약성서]]를 근거로 [[변증]]하는 [[지성]]적인 신앙에 뿌리를 두었다.<ref>하느님께서는 언약하신 대로 [[다윗]]의 후손 가운데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구세주]] 예수를 보내주셨습니다. [[사도행전]]. 13:23</ref> 바울로 사상은 기독교의 교리, 역사에 미친 영향이 매우 커서 혹자는 "예수가 없었다면 바울로도 없었겠지만 바울로가 없었다면 기독교도 없었을 것이다" 라고 평하기도 한다.
 
== 이름 ==
파울로스는바울는 그리스에서 사용한 그리스 이름이며, 그의 [[히브리어]] 이름은 ‘샤울({{llang|he|שאול}})’이다. [[재미교포]]들이 [[한국어]] 이름과 [[영어]] 이름을 모두 사용하는 것처럼<ref>예를 들어 [[서재필]]선생은 영어이름이 제이슨, 한국 이름이 재필이었다.</ref> 해외에서 사는 [[유대인]]([[그리스어|그리스말]]로 흩어진을 뜻하는 [[디아스포라]])들도 히브리어 이름과 [[그리스어]] 이름을 모두 사용했기 때문에, 사도 파울로스도바울도 그리스어 이름인 파울로스와바울와 히브리어 이름인 샤울을 모두 사용했다. 따라서 한때 기독교인들이 사울이 바울로 개명했다는 주장은 사도 파울로스바울 시대의 문화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ref name="pts">서적 참조: [[박태식]]. 《타르수스의 바오로》. 바오로딸.</ref>[[사도행전]]에서도 '바울로라고도 불리는 사울'이라고 언급하고 있다.<ref>그러나 바울로라고도 불리는 사울은 성령으로 가득 차서 그 마술사를 쏘아보며 [[사도행전]] 13:9. [[공동번역성서]]</ref>
 
=== 한국어 성서 번역본의 음역 차이 ===
1900년 완역한 [[신약성경]] 전서 음역을 따른 [[개역한글판]]([[대한성서공회]])은 ‘바울’, [[공동번역성서]](대한성서공회)는 ‘바울로’, 천주교 성경([[2005년]],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은 ‘바오로’라고 한다. [[성공회]]는 파울로스를바울를 ‘바우로’라고 음역하는데, 그 실례로 [[1965년]]판 [[성공회 공동기도문]]과 성공회 소성인전에 파울로스를바울를 바우로로 음역하며, 현재도 한국 [[성공회]]는 바우로를 신명(信名) 즉, [[세례]]받은 신자에게 붙이는 이름으로 사용한다. [[기독교]] [[성인 (종교)|성인]]. 축일은 [[베드로]]와 같은 [[6월 29일]]이다. 흔히 [[귀족]]적인 용모에 머리숱이 적고 길고 검은 [[수염]]을 기른 남성으로 묘사하는데 이는 [[1세기]] 이후 등장한 [[성화상|성화]]에서 볼 수 있다.
이와같이 파울로스의바울의 이름은, 현재의 한국 기독교에서 다른 명칭으로 불린다, 이 인물의 이름은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교회]]가 같이 옮긴 [[공동번역성서]]의 '바울로'를 공히 사용하려 했으나 양측의 입장차로 인해 이뤄지지 않았다. [[동방 정교회]]는 [[공동번역성서]]를 따라 '바울로'라고 칭하며, [[개신교]](Protestant Church) 대부분은 [[1900년]] 완역된 [[신약성경]]전서를 따라 '바울'로, [[천주교회]](Roman Catholic Church)에서는 2005년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에서 옮긴 성경에 따라 '바오로'로 칭한다. [[성공회]](聖公會, Episcopal Church, Anglican Church)에서는 [[공동번역성서]]의 번역에 따라 '바울로'라고 하는데, '바울', '바우로'라고 부르기도 한다.
 
== 생애 ==
소아시아 키리키아 지방(길리기아, 현재의 터키)의 중심 도시 타르소스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났다<ref name="act22:3">[[사도행전]] 22:3</ref>. 출생년대는 신약성서학계에서 기원후 5년 즈음으로 추측하고 있으며<ref name="pts" />, 출생 지역과 년대로 미루어 보아 바울은 제국의 시민권이 있었다고 추측하며, 이에 관한 간접적인 기록으로 사도행전 22:25-29에서 바울의 선교 활동 중에 유대민족과의 충돌로 로마군에 체포 되었을 때 자신이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이라고 말한 것을 들고 있다.<ref>그들이 채찍질을 하려고 바울을 눕혔을 때에, 바울은 거기에 서 있는 백부장에게 "로마 시민을 유죄판결도 내리지 않고 매질하는 법이 어디에 있소?" 하고 말하였다. 백부장이 이 말을 듣고, 천부장에게로 가서 "어떻게 하시렵니까? 이 사람은 로마 시민입니다" 하고 알렸다. 그러자 천부장이 바울에게로 와서 "내게 말하시오. 당신이 로마 시민이오?" 하고 물었다. 바울이 그렇다고 대답하니,천부장은 "나는 돈을 많이 들여서 이 시민권을 얻었소" 하고 말하였다. 바울은 "나는 나면서부터입니다" 하고 말하였다.그러자 바울을 신문하려고 하던 사람들이 곧 물러갔다. 천부장도 바울이 로마 시민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그를 결박해 놓은 일로 두려워하였다.(사도행전 22:25-29/표준새번역)</ref> 여하튼 파울로스는바울는 자신의 유대 혈통을 부정한 적이 없으며<ref name="autogenerated1">하기야, 나는 육체에도 신뢰를 둘 만합니다. 다른 어떤 사람이 육체에 신뢰를 둘 만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합니다. 나는 난 지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도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 사람 가운데서도 히브리 사람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파]] 사람이요, 열성으로는 [[교회]]를 박해하였고, [[율법]]의 의로는 흠 잡힐 데가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나에게 이로웠던 것은 무엇이든지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므로, 나는 그 밖의 모든 것은 해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것들을 오물로 여깁니다. 《[[빌립보서]]》3:4-8(표준새번역)</ref>, 게다가 그가 이른바 [[다마스쿠스]]<ref>[[사도행전|사도]] 9:1-19</ref> 에서 회심하기까지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박해에 앞장 섰다는 점으로 미루어 그의 유대인 혈통에 관해 의심의 여지가 없다<ref>[[고린도후서]] 11:22; [[로마서]] 11:1</ref>. 파울로스바울 자신은 자신의 대단한 출신배경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빌립보서]]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가치를 강조하기 위해 자신의 출신배경을 오물에 빗댄다.<ref name="autogenerated1" />
 
=== 학식 ===
파울로스의바울의 서간의 내용을 바탕으로 해석할 때 그는 아마 흠이 없는 교육을 두루 받은 것으로 보이지만, 어디서 그리고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그의 고향이 고대 [[그리스]] 문명의 영향 밑에 있었던 관계로 당시의 일반적인 고전 교육 및 [[유대교]]적 율법 교육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는 존경받는 율법학자 가말리엘에게서 [[토라|율법]] 공부를 받았는데<ref name="act22:3"/>, [[유대]] 전통에 따라 [[구약성서]](율법, 예언서), [[토라|율법]] 해석(미드라시), [[수사학]]을 공부했을 것이다.<ref>{{서적 인용|제목=같은 책|장=타르수스의 바오로|쪽=p.37}}</ref> 이러한 체계적 [[신학]]교육은 사도 바울을 유대 전통인 율법을 비판할만큼 뛰어난 신학자로 자라게 해 주었다. 사도 파울로스가바울가 가말리엘의 제자였다는 사도행전의 설명을 바탕으로 회심하기 전까지 그가 [[바리사이 파]]에 적극 협조하지 않았을까 추측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파울로스의바울의 출생과 유대교의 [[토라|율법]]을 추종하였던 젊은 시절의 활동은 자신의 사목방향이나 신학적인 견해에 맞지 않을 경우 타협하지 않았던 그의 곧은 성품에서 잘 반영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파울로스는바울는 [[고대 그리스]] 문학에도 밝았는데, 사도행전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 시인을 인용하여 아테네 철학자들에게 하느님 말씀을 전하였다.
 
{{인용문|우리는 그분 안에서 숨쉬고 움직이며 살아간다.하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또 여러분의 어떤 시인은 우리도 그의 자녀다. 하고 말하지 않았습니까?|[[사도행전]]|17:28, [[공동번역성서]]<ref>주전 600년경 에피메니데스 시인이 쓴 '크레타'와 아라투스 시인(주전 315-214)의 시를 인용. 《사도행전》2/김회권 지음/복있는 사람P.183</ref><ref>[http://www.holybible.or.kr/B_COGNEW/cgi/biblesrch.php?VR=COGNEW&QR=%BF%A9%B7%AF%BA%D0%C0%C7+%BD%C3%C0%CE&OD=|공동번역성서 사도행전 17:27]</ref>}}
 
사도행전에는 파울로스가바울가 전하는 복음을 듣고 회심한 이들의 이름을 자세히 적었다. [[지식인]]들의 지성에 맞게 전도한 성 파울로스의바울의 전도는 지혜로운 전도였던 것이다.
 
{{인용문|몇몇 사람이 바울로 편이 되어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 중에는 아레오파고 법정의 판사인 디오니시오를 비롯하여 다마리스라는 여자와 그 밖에도 몇 사람이 더 있었다.|[[사도행전]]|17:34, [[공동번역성서]]}}
 
=== 주요 연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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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태식]]의 연대기 구성<ref>[[성공회]] [[사제]] 신약성서학자.</ref> 의 연대기<ref>{{서적 인용|제목=앞의 책|저자=[[박태식]]|쪽=p.3}}</ref> ====
* 기원후 [[5년]]경 출생
* 32-[[33년]]경 [[스테파노]] [[부제 (기독교)|부제]] 순교, 파울로스의바울의 회심
* 33년-[[39년]]경 [[요르단강]] 동부 거주
* [[39년]]경 [[다마스쿠스]] 탈출, [[예루살렘]]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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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마스쿠스에서의 회심 ===
[[파일:Caravaggio-The Conversion on the Way to Damascus.jpg|섬네일|200px|오른쪽|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일어난 회심, 카라바조]]
사도 파울로스는바울는 [[스테파노|스데반]]의 순교 이후 [[기독교]]인들을 본격적으로 박해하기 위해서 대제사장의 권한을 받아 [[다마스쿠스]]에 가던중 [[예수]]의 나타남을 보고 그의 음성을 듣게 되었고, 이후 예수의 제자 아나니아에게 [[세례]]를 받았다. 기독교인이 된후 성 [[바르나바]]의 중재로 [[사도]]들과 교제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이 사건을 개종이라는 단어로 표기하기도 하지만, 성 바울로가 활동하던 시기에는 아직 [[기독교]]는 독립종교가 아닌 [[유대교]]세계안의 이단이었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개종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다.
 
=== 선교활동 ===
파울로스는바울는 [[바르나바]]와 함께 [[안티오키아]]에서 선교 활동을 했는데, 도중에 이들은 결별을 했다. [[복음사가 마르코|마르코]]<ref>전통적으로 교회에서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마르코를 복음사가 마르코로 이해한다고 한다. 《우리가 아는 것들 성경에는 없다.》-완벽한 성인 바울은 없다./오경준 지음/홍성사</ref> 라는 [[헬라]]식 이름을 가진 유대 청년 요한이 도중에 선교 활동을 중단한 적이 있는데, 바나바/바르나바가 자신의 사촌<ref>[[표준새번역]]과 [[공동번역]]에서는 사촌, [[개역개정판]]과 [[개역한글판]]에는 누나나 남편누나의 아들 그러니까 조카를 뜻하는 생질로 번역되어 있다.</ref> 인 마르코<ref>나와 함께 갇혀 있는 아리스다르코가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또 바르나바의 사촌 마르코도 문안합니다. -마르코가 가거든 잘 영접하라는 지시를 여러분이 이미 받았을 줄 압니다.-(골로사이인들에게 보낸 편지 4:10/공동번역성서)</ref> 를 전도여행에 다시 데려가자고 제안했기 때문이다. 고지식한 성격의 파울로스는바울는 이를 거절했고 결국 심한 언쟁(직역하면 엄청난 분노와 성냄)끝에 서로 헤어졌다.
사도행전에서는 이들의 논쟁이 벌어진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인용문|며칠 뒤에 바울로는 [[바르나바]]에게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전한 모든 도시를 두루 찾아다니며 교우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살펴봅시다." 하고 제언하였다. 그때 바르나바는 마르코라는 요한도 같이 데려가자고 하였다. 그러나 바울로는 자기들과 함께 가서 일하지 않고 [[밤필리아]]에서 떨어져 나갔던 사람을 데리고 갈 수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 두 사람은 심한 언쟁 끝에 서로 헤어졌는데 바르나바는 마르코를 데리고 배를 타고 [[키프로스]]로 떠나가 버렸다.|[[사도행전]]|15:36-39, [[공동번역성서]]}}
 
여기서 심한 언쟁으로 번역된 파록쉬스모스({{llang|el|παροξυσμὸς|paroxusmos}})는 엄청난 분노와 성냄을 포함하는 말이다. 파울로스와바울와 바르나바간의 언쟁은 서로에게 엄청난 적대감을 드러내며 벌인 감정다툼이었던 것이다.<ref name="ogj"/> 이들의 분쟁에 대해 [[영국 성공회]](Church of England) [[신학자]]인 [[톰 라이트]] 주교(Bishop Tom Wright)는 [[사도]]들이 '위로의 아들'이라고 불러줄만큼 성격이 유순한 [[바르나바]]와 성격이 불같고 급한 바울이 서로 원만하게 지내기는 힘들었기 때문으로 이해한다.
 
파울로스는바울는 [[아테네]], [[테살로니키]], [[코린토스]], [[에페소스]] 등에서 선교활동을 했으며, 특히 고린토스에서는 브리스킬라와 아퀼라라는 유대인 [[천막]]업자 부부와 같이 일하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다. 나중에는 [[마케도니아 지방]]에서도 선교활동을 할 정도로 활약하지만, [[64년]] [[네로]] 황제의 기독교 박해로 [[순교]]하였다. 탈 율법적인 신학을 가진 그의 선교활동은 나사렛 사람들이라는 이름의 유대교 소종파로 남아 있던 [[기독교]]를 세계인이 받아들일 수 있는 보편종교로 발전시키는 업적을 남겼다. 또한 [[영국 성공회]] 사제로서 [[청교도]]적인 배경을 갖고 있던 [[존 폭스]] 신부의 《순교자》에 따르면, 사도 성 바울로의 선교활동은 [[에페소스]]교회의 [[주교]]인 성 [[디모테오]]에게 계승되었다.
 
=== 다른 사도들과 불편한 관계 ===
[[파일:Greco, El - Sts Peter and Paul.jpg|섬네일|200px|베드로와 파울로스바울-엘 그레코]]
 
==== 사도권 둘러 싼 갈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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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apostle)는 '{{llang|el|απόστολος}}'의 음역이다. 'απο'는 접두어이며, 'στολ'은 '파송하다'는 동사의 어간 'στελ'이 변형된 것이다. 따라서 사도라는 뜻이 [[헬라어]]는 어떤 임무를 이룩하기 위해 누군가를 앞에 보낸다는 의미다. 따라서 '사도'란 [[기독교]]의 가르침을 전파하고 기독교 공동체의 발전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공동체의 지도자 역할을 맡긴 사람을 뜻한다.<ref>{{서적 인용|저자=하워드 클락 키이|제목=앞의 책|쪽=p.349}}</ref>
 
[[사도]] 자격 가운데 하나는 [[역사적 예수]]의 행적을 직접 본 사람이어야 했다. 파울로스는바울는 [[다마스커스]]에서 환상 중에 [[예수]]를 만나 뵈었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주관적 주장이었으므로 다른 사람이 쉽게 믿을 수 없었다. 예수가 사도로 임명해야만 가능했다. 그래서 1세기 교회에서 파울로스가바울가 과연 '사도'인지를 둘러 싼 논쟁이 있었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바르나바의 중재로 그의 진실성이 [[교회]]에서 받아들여진 것으로 나타나 있다.<ref>사도행전 9장 26, 27절</ref>
 
==== 유대 기독교인들과의 신학갈등 ====
 
[[김득중 (1941년)|김득중]]<ref>신약성서학자. 전 [[감리교신학대학교]] 총장</ref> 은 고대교회의 [[기독교인]]들을 [[유대교]]와 [[기독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해석하여 즉, 기독교를 유대교의 한 종파로 이해하여 [[토라|율법]], [[할례]] 등의 유대교 전통을 강조한 유대 기독교인들과 유대교와 기독교 사이 단절을 주장하며, 유대교 전통을 거부한 이방 기독교인으로 구분했는데, 바울로는 이방 기독교의 지도자였다고 주장한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베드로]], [[야고보]]등의 기존 사도들은 [[베드로]]와 바울로가 충돌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유대 기독교 지도자들이었고, 순교자 [[스데파노]](스데반)를 비롯한 일곱 [[부제 (기독교)|부제]](Diakonos)들은 이방 기독교인이었다. 이들은 일치하지 못하고 [[신학]]적인 갈등을 겪었는데, 이방기독교 지도자 파울로스는바울는 유대 기독교인들을 다른 [[복음]]을 전한다느니<ref>[[갈라디아서]] 1:7</ref>, 거짓 형제<ref>갈라디아서 2:4</ref> 라느니 하는 격렬한 말로 비난했고, 유대 기독교 공동체였던 예루살렘 교회 신자들은 파울로스를바울를 [[유대교]] 전통을 파괴하는 인물로 보았다.<ref>사도행전 20:22</ref> [[갈라디아서]]에 따르면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인 야고보와 게파와 요한은 유대교 전통에 대한 해석은 전혀 달랐지만 바울로를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존중하였으며, 모두 [[교회]]는 가난한 사람을 위해 일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공통점이 있었다.
 
{{인용문|그리고 십사 년 뒤에 나는 디도를 데리고 [[바르나바]]와 함께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계시를 받고 올라갔던 것입니다. 거기에서 나는 소위 지도자라는 사람들과 따로 만나 내가 이방인들에게 전하고 있는 복음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나 지금까지 해놓은 일이 허사가 되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나와 동행했던 디도는 그리스 사람이었는데도 그들은 할례를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가짜 신도들이 우리를 노예로 만들려고 몰래 들어와서,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우리가 누리는 자유를 엿보고 있었으므로 실상 디도가 할례를 강요당할 위험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전한 복음의 진리를 보존하려고 우리는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겉모양으로 보지 않으시므로 소위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과거에 어떤 사람들이었든 간에 나에게는 아무 상관도 없지만 그들도 나에게 어떤 새로운 제언을 한 일은 없습니다. 도리어 그들은 마치 베드로가 할례받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임받았듯이 내가 할례받지 않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임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할례받은 사람들을 위한 [[사도]]직을 [[베드로]]에게 주신 것같이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직을 나에게 주셨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기둥과 같은 존재로 여겨지던 [[야고보]]와 [[게파]]와 [[사도 요한|요한]]도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이 은혜를 인정하고, 나와 [[바르나바]]에게 오른손을 내밀어 친교의 악수를 청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방인들에게 전도하고 그들은 할례받은 사람들에게 전도하기로 합의하였습니다.한 가지 그들이 우리에게 요구한 것은 가난한 사람들을 기억해 달라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바로 내가 전부터 열심히 해오던 일이었습니다.|[[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 2:1-10, [[공동번역성서]]}}
 
== 육체노동자 파울로스바울 ==
[[사도행전]]에 의하면 파울로스는바울는 육체[[노동]]을 함으로써 자신의 힘으로 살아간 [[노동자]]였다.
 
{{인용문|그 뒤 바울로는 [[아테네]]를 떠나 고린토로 왔는데 거기에서 그는 본도 출신인 아퀼라라는 유다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아퀼라는 글라우디오 황제가 모든 유다인은 [[로마]]에서 나가라는 칙령을 내렸기 때문에 얼마 전에 자기 아내 브리스킬라를 데리고 [[이탈리아]]를 떠나 온 사람이었다. 바울로가 그들을 찾아 갔는데 마침 직업이 같았기 때문에 그 집에서 함께 살면서 일을 하였다. 천막을 만드는 것이 그들의 직업이었다. |[[사도행전]]| 18:1-3/[[공동번역성서]]}}
 
[[정승우]]에 의하면 한글[[성서]]에서 [[천막]]을 만드는 일로 번역한 [[헬라어]] 스케노포이오스는 [[가죽]]을 가공하는 모든 [[직업]]을 뜻하기도 한다. 즉, 파울로스는바울는 사례비를 받아서 생활하던 대다수의 순회 [[설교]]자들과는 달리, 육체[[노동자]]로 살아냄으로써 자신의 삶의 자리를 [[복음]]전도의 통로가 되게 하였으며, 자신의 [[그리스도]] 신앙과 삶이 일치되게 하였다.<ref>《인류의 영원한 고전 신약성서》-신약성서 최초의 저자, 바울의 생애와 사상/정승우 지음/아이세움 p.91-93</ref> 김회권도 [[에베소]]에서 전도할 때에 [[인간]]을 지배하던 악한 [[귀신]]들을 쫓아낸 파울로스의바울의 능력<ref>하느님께서 바울의 손을 빌어서 비상한 기적들을 행하셨다.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이 몸에 지니고 있는 손수건이나 두르고 있는 앞치마를-[[손수건]]과 앞치마는 파울로스가 [[가죽]]을 가공하는 일을 하면서 사용한 노동도구들 즉, 파울로스의 [[땀]]과 수고가 담긴 정직한 [[노동]]을 뜻한다.-가져다가, 앓는 사람 위에 얹기만 해도 병이 물러가고, 악한 귀신이 쫓겨 나갔다.([[사도행전]] 19장 11절-12절 [[표준새번역]]성서)</ref> 은 [[노동자]]로서의 정직한 삶에서 나왔다고 말하였다.<ref>《하나님나라의 신학에서 읽는 사도행전 2》-에베소 선교:[[그레코 로만]] 문명의 기초를 허무는 [[복음]]/[[김회권]] 지음/복있는 사람 p.212-213</ref>
 
== 파울로스의바울의 사회 문화적 정황 ==
바울 후 기독교 선교활동은 기원후 [[35년]]에서 [[60년]] 사이 정도에 이루어졌다.<ref>{{서적 인용|저자=P. J. 악트마이어, J. B. 그린, M. M. 톰슨|제목=현대적인 방법을 적용한 새로운 신약성서개론|편집자=소기천, 윤철원, 이달 옮김|출판사=대한기독교서회|연도=2004|쪽=p. 351}}</ref> 당시 로마제국은 지중해 전역을 통치하고 있었다. 체계적이고 엄격하게 훈련된 [[레기온]]([[신약성서]]의 [[마르코복음서]]에서는 군대로 번역)의 정복전쟁으로 [[지중해]] 다른 민족들과의 [[헤게모니]] 다툼에서 승리해간 군사적인 힘을 바탕으로 지중해 주변을 장악한 로마제국은 기술 및 정치 조직에서 다른 지중해 주변의 나라들보다 우위에 있었다. 거기에 [[그리스]]([[헬라]])의 [[예술]]적이고 지적인 유산이 합쳐져서, 지중해 세계는 하나의 공통된 도시문명으로 통합되었다.<ref>{{서적 인용|저자=캐롤라인 오시에크|제목=신약의 사회적 상황|편집자=김경진 옮김|출판사=기독교문서선교회|연도=1996|쪽=p. 76}}</ref> 이를 그리스-로마(그레코-로만)문명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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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자랑해서 이로울 것은 없지만 나는 자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나는 주님께서 보여주신 신비로운 영상과 계시에 대하여 말씀 드리겠습니다. 내가 잘 아는 그리스도 교인 하나가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까지 붙들려 올라간 일이 있었습니다. -몸째 올라갔는지 몸을 떠나서 올라갔는지 나는 모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나는 이 사람을 잘 압니다. -몸째 올라갔는지 몸을 떠나서 올라갔는지 나는 알지 못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아십니다.- 그는 낙원으로 붙들려 올라가서 사람의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이상한 말을 들었습니다. 나는 이런 사람을 자랑하려고 하며 나 자신에 관해서는 나의 약점밖에 자랑하지 않겠습니다.|[[고린토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고린도후서]])|12:1-5), [[공동번역성서]].}}
 
== 파울로스의바울의 신학 ==
=== 파울로스의바울의 예수상과 교회 ===
==== 예수상 ====
신약성서학자 [[박태식]]에 따르면, 파울로스는바울는 [[역사적 예수]]를 만난 적은 없으며,[[예수]]에게 [[복음]]을 전달받아서 전한다는 파울로스바울 서신서속의 언급들도<ref>[[갈라디아서]] 1:12, [[고린도전서]] 7:10,9:14,11:25, [[데살로니가전서]] 4:15</ref> 도 문서나 구전으로 전승된 [[그리스도]]의 말씀(예수전승)을 전한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다. [[복음서]]와 마찬가지로 파울로스바울 서신서도 예수 전승을 파울로스가바울가 자신의 [[신학]]으로 해석한 신학문서인 것이다.<ref>박태식, 앞의 책, p.64</ref>
물론 파울로스가바울가 [[고린도전서]] 11:23에서 언급한 [[성만찬]](Holy Communion)설명도 [[교회]]를 통해 전승되던 예수의 [[성만찬]] 제정이야기를 언급한 것이다.<ref>같은 책, p.66</ref>
 
==== 교회관 ====
파울로스는바울는 그리스도를 교회의 기초요 머리로 해석했으며<ref>로마서 12:4-5, 고린도전서 3:11, 고린도전서 12</ref> ,파울로스의바울의 제자들이 선생의 이름을 빌려서 쓴 [[에페소서]]에서는 [[교회]]를 [[그리스도]],[[사도]]들과 [[예언자]]들을 기초로 하며(에페소 2:20), [[민족]]의 구분이 없는 [[보편교회]]<ref>에페소 2:14-16</ref> 로 해석하고 있다.
 
=== 신약성서의 해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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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원론 ===
이방기독교 지도자 파울로스는바울는 [[토라|율법]]이 아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하느님과의 관계가 회복된다는 칭의를 주장했으며, 이러한 구원관은 유대교 전통을 강조한 유대 기독교와 갈등을 겪게 하였다. 그래서 신약성서학자 [[김득중 (1941년)|김득중]]은 마태오 복음서에서 믿음의 실천을 강조하는 이유를 파울로스의바울의 칭의교리가 실천을 소홀히 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으로 추정한다.<ref>{{서적 인용|제목=《[[복음서 신학]]》|저자=김득중 지음|출판사=컨콜디아}}</ref>
 
=== 성례전 해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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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울이 생각하기에 [[성만찬]]은 [[사회통합]]을 위한 성례전이다. 그는 [[고린도]] 교회에서 성만찬때마다 부유층 교인들이 빈곤층 교인들과 밥상을 나누지 않는 모습을 "주님이신 [[예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성 목요일]])에 성만찬을 제정하시어 그분을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부유한 교인들이 가난한 교인들과 성만찬을 나누지 않음은 [[그리스도]]의 몸을 욕되게 하는 것이고, 가난한 교우들을 부끄럽게 하는 것입니다."이라고 비판했다.
 
== 파울로스의바울의 편지 ==
=== 편지의 작성자 문제 ===
신약성서에서 실제 파울로스의바울의 편지가 몇 개인지를 둘러싼 논쟁이 존재한다. 전통적인 교회의 견해에 따르면, 바오로 서간은 14개에 달한다. 그러나 현대 신학자들은 바울로 서신서에서 사용된 언어와 내용을 살펴서 다음과 같이 구분하려 한다.<ref>파울로스의 편지 분류는 [[하워드 클락 키이]]의 것이다.<br />{{서적 인용|저자=하워드 클락 키이|제목=앞의 책|쪽=pp.304-305}}</ref>
# 확실히 파울로스가바울가 작성한 편지: [[로마서]]<ref>파울로스의 신학 사상이 집대성 된 서신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교부 신학자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아우구스티누스]], 종교 개혁의 주역인 [[마르틴 루터]], [[감리교]]의 창시자이자 [[영국 성공회]] [[사제]]인 [[존 웨슬리]] [[사제|신부]] 등 교회사의 쟁쟁한 인물들에게 영향을 준, 파울로스의 대표적인 서신이다.</ref>,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데살로니가전서]], [[빌레몬서]]
# 파울로스가바울가 썼을 가능성이 있으나 증거가 부족한 편지: [[데살로니가후서]]
# 파울로스가바울가 쓰지 않았으나 그의 사상이 담긴 편지: [[골로새서]]<ref name="ReneGenard">성서신학자 [[르네 지라르]]는 [[골로새서]],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를 바울로의 제자들이 [[교회]]의 요청에 따라 쓴 작품으로 보고 있다.<br />{{서적 인용|제목=《성경, 세계최고의 베스트셀러》|저자=르네 지라르|편집자=김주경 옮김|출판사=시공사|쪽=p.104}}</ref>, [[에베소서]]<ref>[[박태식]](요한)신부(신약성서학자이자 [[성공회]] 사제)는 바울로 서신서중에서 [[에베소서]]를 바울로학파의 작품 즉, 바울로의 제자들이 쓴 작품으로 보고 있다.<br />{{서적 인용|제목=앞의 책|저자=박태식|쪽=p.173}}</ref>
# 파울로스의바울의 이름이 나오나, 그와는 다른 시대, 다른 상황에서 기록된 편지: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ref name="ReneGenard"/>, [[디도서]]
# 파울로스의바울의 이름이 나오지 않으며, 그와는 전혀 다른 사상과 문체로 기록된 편지: [[히브리서]]
 
== 각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