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와 천황"의 두 판 사이의 차이

12 바이트 추가됨 ,  7개월 전
잔글
잔글
태그: 2017 원본 편집
{{인용문2|나는 옥좌에서 오랫동안 일하면서 여러 가지 경험을 했습니다. 가장 인상에 남은 일은 천황비와 같이 유럽 여행을 갔을 때입니다. 또 미국 여행을 갈 예정입니다. 1964년 도쿄 올림픽과 오사카 박람회도 인상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가장 후회스러웠던 일은 두말할 것 없이 제2차 세계 대전이었지요.|1975년, “제일 기억에 남는 일과 제일 후회스러운 일”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답하며<ref>베르, 512쪽.</ref>}}
 
1975년 10월, 쇼와 천황 내외는 미국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공식 방문했다. 미국 방문을 앞두고 쇼와 천황은 [[뉴스위크]]의 기자 버나드 크리셔와 단독 회견을 연 자리에서 “일본이 개전을 결단한 정책 결정 과정에도 폐하가 가담하셨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해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전쟁을 끝낼 때 나는 스스로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전쟁 개시 때에는 내각의 결정이 있었고, 나는 헌법에 따라 내각의 결정을 뒤집을 수 없었다”고 변명했다.<ref name="빅스_728"/> 쇼와 천황이 이와 같은 말을 하던 1975년에는 쇼와 천황이 적극적으로 침략 정책에 관여했음을 폭로한 [[기도 고이치의고이치]]의 일기와, [[스기야마 하지메의하지메]]의 《스기야마 메모》가 간행된 지 10년 가까이 지난 시점이었다.<ref name="빅스_728"/> 9월 22일에 열린 기자회견에서도 쇼와 천황은 “일본인들의 가치관은 변하지 않았다”면서 “일본의 군부 지도자들이 일본을 잘못된 길로 이끌었던 적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한다면 아직도 살아있는 그들을 욕하는 셈이 된다. 나는 그러고 싶지 않다”고 일축했다.<ref name="빅스_728"/> 기자회견 후 몇 주일 뒤, 쇼와 내외는 국빈 자격으로 워싱턴을 방문하여 [[제럴드 포드]] 대통령에게 “제2차 세계 대전에 대한 깊은 슬픔”을 전했으며, 미국 관광길에 올라 [[캘리포니아주]] [[애너하임]]의 [[디즈니랜드]] 등을 찾았다.<ref name="빅스_728"/> 앞선 1971년 영국 [[런던]], [[프랑스]] [[파리 (프랑스)|파리]], [[벨기에]] [[브뤼셀]]에 이어 [[서독]] [[본 (독일)|본]]을 찾았을 때 아시아계 대학생들이 쇼와 천황을 규탄하는 집회를 열었던 것과는 달리 쇼와 천황의 미국 방문은 성공리에 마칠 수 있었다.<ref>베르, 20쪽.</ref>
 
귀국 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자 폭탄 투하|원자 폭탄 투하]]에 대해 쇼와 천황은 “원자 폭탄 투하는 (히로시마 시민들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전쟁 중에 일어난 것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ref>《[[타임 (잡지)|타임]]》지, 1975년 10월 20일자, 14쪽 ~ 15쪽. (빅스, 904쪽에서.)</ref><ref>《뉴스위크》, 1975년 10월 20일자, 25쪽. (빅스, 904쪽에서.)</ref> 쇼와 천황의 “어쩔 수 없다”는 발언은 곧 역사학자들의 분노를 사, [[이노우에 기요시]]는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 각 단계에 쇼와 천황이 관여한 바를 처음으로 자세히 다룬 실증 연구서를 썼고, [[네즈 마사시]]의 첫 비판적 전기가 그 뒤를 이었다.<ref name="빅스_728"/> 쇼와 천황의 미국 방문과 히로시마 관련 발언이 있은 후 1976년 1월에 [[교도 통신사가통신사]]가 “천황에게 전쟁 책임이 있는가”를 두고 시행한 설문 조사에서, 응답자 중 57%가 “천황에게는 전쟁 책임이 있다”나,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다”고 응답했다.<ref>요시다 히로시, 163쪽.</ref>
 
쇼와 천황의 미국 방문보다 앞선 1975년 2월, [[분게이슌주]]에 낸 전쟁 회고담에서 다카마쓰노미야가 쇼와 천황의 전쟁 관여에 대해 폭로하는 글을 쓴 것에 자극을 받은 쇼와 천황은 1976년 2월부터 시종장 [[이리에 스케마사]]와 함께 자서전 《배청록》을 마저 쓰기 시작했다.<ref name="빅스_746">빅스, 746쪽 ~ 756쪽.</ref><ref group="주해">앞서 쇼와 천황은 이나다 슈이치, 기노시타 미치오와 함께 《배청록》을 작성했지만, 한동안 쉬고 있었다. (빅스, 747쪽에서.)</ref> 1976년 11월 10일, 75세의 쇼와 천황은 회고록 쓰기를 재위 50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맞았는데 이 때 일본공산당과 일본사회당, 그리고 몇몇 현지사들이 “전쟁 이전의 잘못된 20년을 함께 기리는 것은 옳지 않다”며 참여를 거부해 주목을 받았다.<ref name="빅스_746"/> 행사 후, 쇼와 천황은 이리에의 도움으로 1977년부터 1979년까지 쇼와 자신의 치세에 대한 수정 회고 작업을 이어갔다. 이리에는 1985년 자신이 죽을 때까지 마지막 2년 동안 쓴 일기에서 쇼와 천황은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와 [[나카소네 내각]]의 외교적 정책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밝혔다.<ref name="빅스_7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