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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후인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활동을 시작함에 따라 같은 해 1월 24일 영덕군에 있는 자택에서 전격 체포되어 기소되었다. 그러나 그해 5월 25일 고령임을 이유로 [[보석]]을 신청, 곧 보석으로 석방되었고 반민특위가 강제로 해체되면서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다.
 
문명기는 90세까지 장수했으며 1968년 10월 6일에 사망했다. 묘가 영덕군 강구면에 있는데 1969년 8월 15일에 만들어진 묘비문은 노산 이은상이[[이은상]]이 썼다. 묘비문에는 문명기(본명 문기섭, 창씨명 文明琦一郞)를 '세상에 나서 자기 힘으로 성공하기란 어려운 일이요 또 장수하며 어진 행적을 끼치기는 더 어려운데 그 어려운 일을 능히 행하여 스스로 보람찬 생애를 누린 이'라고 치켜세우면서 '장손 의학박사, 국회의원 태준을 비롯하여 내외손 50여 명이 제제 명사들이라, 이로써 덕을 쌓은 집에는 자손이 복을 받는다는 옛말이 빈말이 아님을 알겠다'라고 썼다. 모비문에는 일제치하 문명기의 친일 행적은행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ref>{{저널 인용
|url=http://www.ido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585703
|제목=[인물추적 이은상] (14) 3·1운동 기념탑과 친일파 문명기의 묘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