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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판 삭제 신청|~ 2018년 9월 9일 (일) 02:05 판|윌리엄 T. 로(2014), "하버드 중국사 청", 구범진(2012),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이훈(2018), "만주족 이야기",윤영인; 이용규; 김선민; 토마스 알슨; 미할 비란; 테무르; 파멜라 카일 크로슬리; 이시바시 다카오, "외국학계의 정복왕조 연구 시각과 최근동향" 등의 인용이 주종 관계가 견지되지 못하여 저작권 침해에 해당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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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나라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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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사}}
'''대청국'''(大淸國, {{llang|mnc|{{MongolUnicode|ᡩᠠᡳᠴᡳᠩ<br />ᡤᡠᡵᡠᠨ}}|Daicing Gurun}}, [[1616년]] [[2월 17일]] 또는 [[1618년]] 또는 [[1636년]] [[6월 5일]] ~ [[1912년]] [[2월 12일]] 또는 [[1924년]] [[1월 5일]])은 '''대청국'''(大淸國, {{llang|mnc|{{MongolUnicode|ᠠᠮᠪᠠ<br>ᠠᠴᡳᠩ<br />ᡤᡠᡵᡠᠨ}}|Amba Cing Gurun}})<ref>《taidzu dergi hvwangdi i ben gi bithe》dergi debtelin, ''amba cing gurun i ben gi bithe. taizdu abkai hese be alifi. forgon be mukdembuhe.</ref>,ᡩᠠᡳ'''대청제국(大淸帝國)'''<ref>, 《[[고종실록]]》 39권, 광무 3년 9월 11일 양력 4번째기사, ''光緖二十五年八月初七日。 大淸帝國欽差議約全權大臣二品銜太僕寺卿徐壽朋。''</ref> '''청조(淸朝)'''<ref>《[[효종실록]]》 8권, 순치 9년 3월 30일 신축 2번째기사, ''遽遭李子成之亂, 且綠淸朝侵伐南京, 弘光天子被害, 天下洶擾, 小商等不敢回歸, 轉投交趾, 行商爲業, 今至七年。 竊聞, 淸朝, 愛民如子, 故將還本土, 正月二十二日自日本發船, 二月初九日到貴國地方, 遇風船敗, 同伴二百十三人皆溺死, 存者僅二十八人。 懇祈老爺, 大發慈悲, 直送小商等于日本, 則庶可得生也。 若送北京, 道路逾遠, 二三年當到本土, 而其全生得達, 不可必也。 自此距日本, 纔數日程, 自日本距南京, 亦數月程, 父母、妻子重得相逢, 恩莫大焉。 伏乞稟于國王殿下, 施行云云。" 卓男悉記所見, 且將供辭, 報于濟州牧使李元鎭, 元鎭馳狀以聞。 ''</ref>이라고도 한다.

[[1618년]]에, 여진여진의 ({{llang|mnc|{{만몽 유니코드|ᠵᡠᡧᡝᠨ<br />ᡤᡠᡵᡠᠨ}}|Jušen Gurun}})의 영명한(英明汗, {{llang|mnc|{{만몽 유니코드|ᡤᡝᠩᡤᡳᠶᡝᠨ<br />ᡥᠠᠨ}}|Genggiyen Han}})이었던 [[누르가치]]가 건국한 '''대금'''({{llang|mnc|{{만몽 유니코드|ᠠᠮᠪᠠ<br>ᠠᡳ᠌ᠰᡳᠨ}}|Amba Aisin}})을 근간으로, 아들 태종 [[숭덕제]]는 대금에서 '''대청'''({{llang|mnc|{{만몽 유니코드|ᡩᠠᡳᠴᡳᠩ}}|Daicing}})으로 국호를 바꾼 뒤, [[중국 대륙]]을 대표적으로 지배하는 육상 제국이 됐다.

[[만주족]]이 통치한 제국이자, [[중국사중국 역사]]에거 근대식 공화정 수립 이전 마지막 전제군주정이다전제군주정으로 본다.
 
1635년 10월 13일, 탄생한 [[만주족]]의 청 제국은 광대하였으며 융성했었다 또 인구도 증가하였다. 청 초기에는 훌륭한 황제들([[강희제]], [[옹정제]])이 통치했다. [[한족]]의 중국 [[명나라]]뿐 아니라 주변의 [[몽골]], [[위구르족|위구르]], [[티베트]]를 모두 정복하여, 유라시아 육상 제국을 이룩하였다. 중에서, 심지어 [[원나라]]보다 큰 영토를 이루게 되며, 1689년에는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루스 차르국의 침입을 저지하였다. 1683년부터 1830년까지는 그야말로 청 제국의 평화시대(팍스 시니카)였다.<ref>{{서적 인용 |제목= 지도로 보는 세계사 | 저자= 조르주 뒤비 |기타 = 채인택 옮김 |연도=2006 |출판사=생각의 나무 |쪽=228 |id={{ISBN|89-8498-618-6}}}}</ref> 이민족으로서는 가장 오랫동안 중국을 지배하였다. 제8대 [[도광제]]부터 말대 [[푸이|선통제]] 대에서 서구[[열강]] 세력 등의 영향으로 국력이 약해져 [[1912년]]에 선통제가 퇴위하였고, [[1924년에]], 공식적으로 황실이 해체되어 육상 제국의 종말과 동시에 중국 역사에서 2천여 년 넘게 이어졌던 봉건 왕조가 끝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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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쇠퇴와 멸망 ===
[[파일:Empire of the Great Qing (orthographic projection).svg|thumb|200px|left|[[1896년]], 청 제국 강역도. 홍콩과 외만주연해주, 지역아무르 이북지역, 중앙아시아의 이리지역, 카슈가르를 상실한 이후의 지도이다.]]
강희제 이후 [[옹정제]]·[[건륭제]]까지 3대에 걸쳐 주변 각국을 침공·정복하여 직접 지배하고 조공국(朝貢國)으로 삼아 일대 전성기를 이루었다. 삼대에 이은 청의 전성기를 [[강건성세]](康乾盛世)라고 한다. 그러나 건륭 말기부터 [[백련의 난|백련]], [[천리의 난|천리]]의 난을 계기로 청 제국은 점차 쇠퇴하였다. 한편, 건륭제 즉위 시기에 [[그레이트브리튼 연합 왕국]]은 [[1792년]] [[매카트니]] 사절단을 시작으로 이후 몇 차례에 걸쳐 중국에 사절단을 보내 문호 개방을 권유하였으나, 오직 [[광저우]]만 개항되었을 뿐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청 초중기에는 공행무역만이 실시되었다.
 
19세기 무렵에 이러한 편무역으로 인해 중국으로의 은 유출 정도가 심각하다고 판단한 영국계 [[영국 동인도 회사|동인도 회사]]가 삼각 무역을 실시했으나, 피해를 입은 청 제국에서 엄금론을 펼치며 [[임칙서]]를 무역항에 파견하고 아편을 소각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그러자 영국은 [[제1차 아편 전쟁|아편 전쟁]]을 일으켜 승리했다. [[1842년]] [[난징 조약]]으로 [[홍콩]]은 99년간 영국에 할양되었고 [[상하이]] 등 5개 [[항구]]가 강제 개항되었다. 이후 청에서의 이권 확보를 위해 서구 열강들이 쇄도해오면서 청 제국은 역사상 유례없는 난국을 맞는다.
 
[[1851년]] [[홍수전]]이 기독교 성격의 사회운동인 [[태평천국 운동]]을 일으켰다. 태평천국은 외형상 홍수전이 [[야훼]]의 자식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아우라 자칭하면서 [[기독교]]를 표방했으나, 사실상 [[만주족]] 지배로부터의 한족의 독립, 토지의 균등한 분배, 만민 평등을 주장한 사회혁명이었다. 또한 당시 청 제국은 영국·프랑스와의 [[제2차 아편 전쟁]]을 겪고 있었다. 이후, 청 제국은 휴전 중재역할을 맡은 [[러시아 제국]]에 [[1860년]] [[베이징 조약]]을 통해 [[외만주연해주]]를 모모두 할양하고 베이징에 외국 공사관의 주재를 허용하였다. 서구열강세력들의 이권 침탈이 심화되었다. 태평천국 운동의 위세는 그러나 흥수전에 대한 우상화를 경계한 서구 열강과 [[이홍장]] 등의 같은 한족계 신사층을 파견한 청나라 조정의 협공으로 태평천국은 [[1864년]] 수도 [[천경]]이 함락되고 홍수전도 자살함으로써 그 막을 내렸다.
 
[[1860년대]] 이후에 전개된 [[양무운동]]은 [[증국번]]·[[이홍장]] 등 기술적 개혁의 필요성을 깨달은 한인 신사층의 주도로 시작되었으며, 군함과 서양식 대포 등 신식 무기를 제조하고 관련 공업을 진흥시킴으로써 중국 산업화의 기원이 되었다. 이홍장은 영국을 방문하여 [[빅토리아 훈장]]도 받았다. 사실 양무 운동은 관독상판제와 표면적인 개혁이라는 점 등 뚜렷한 한계 요인을 안고 있었다. 그 와중의 [[청일전쟁]]이 청 제국의 패배로 끝나자 [[양무 운동]]이운동이 실패했음이 드러났고, 청의 반복된 패전으로 인해 청 제국을 둘러싼 열강의 각축은 더욱 치열한 양상을 띠었다.
 
[[1898년]] [[캉유웨이]]·[[량치차오]] 등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모델로 한 [[변법자강 운동]]을 통해 입헌군주제를 확립하고자 했으나 [[서태후]]·[[위안스카이]]·이홍장 등 보수세력의 반격(무술정변)으로 수포로 돌아갔다. 이후 1899년에[[1899년]]에 대규모로 일어난 [[의화단 운동]]으로 일본 등 열강 8국의 연합군이 [[1900년]] 베이징에서 격돌한 [[북청사변]]을 겪고 [[베이징 의정서]]를 체결하며 청 제국은 위기에 내몰렸다. 한편 일본이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고 남만주에 대한 지배권을 획득하여 위협요소가 되었다. 한편 러일전쟁에서 러시아의 패배로 사건의 심각성을 자각한 보수파와 서태후조차 외국으로 유학생을 파견하여 선진국의 헌법과 의회 제도 등을 시찰하였으며, 국내적으로 [[과거 제도]]를 폐지하고 각지에 대학을 세워 신학문의 연구 기반을 조성하는 한편 신식 군대도 신설했다. 그러나 이미 각지에서 만주족을 비난하고 한족의 공화국을 지향하는 혁명세력이 움트고 있었다. 이들 모두는 일본의 일부 지식인이 주장한 중일 연대론(中日聯帶論)과도 상호연계되기도 했다.
 
결국 청 제국은 [[1911년]] [[10월 10일에10일]]에 발발한 [[신해혁명]]으로 인해 [[1911년]] 와해되고, 혁명의 중심인물 쑨원은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인 [[중화민국]]을 수립하였다. 청 황실은 [[자금성]] 내에서 [[청나라 소조정]]을 이루어 사실상 고립된 상태로 사직을 이어가고 있었으나 1924년[[1924]]년, [[펑위샹]]의 정변으로 인해 완전히 멸망하게 되었다.
 
== 외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