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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당 = [[무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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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준생'''(安俊生, [[1907년]] ~ [[1951년]])은 일제 강점기 조선의 사업가이다. [[독립운동가]] [[안중근]]의 둘째 아들이다. 호(號)는 산남(山南). 일제안중근의 아들이지만 일본에 충성한 친일파로 규정된다. 김구는 안준생이 해방이 되면 반드시 죽음으로 응징해야 할 악질 친일파들 중 한명으로 지목했다.
 
== 생애 ==
중국1907년생으로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중국으로 이주해서 상하이에서 성장했다. 상하이 식당에서 바이올린 연주를 하면서 어렵게 생활했다. 마약 장사를 한다는 소문도 있었다.
 
39년에는 상하이에서 성장한잡화상을 준생은운영했다. 1939년 10월 조선총독부의 초청을 받아 1939년 10월 조선을 방문했다. 그는 강압에 의한 것이었지만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사찰인 박문사(지금 서울 신라호텔 근처)을 찾아 이토의 영전에 향을 피우고 “죽은 아버지의 죄를 내가 대신 속죄한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준생은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을 만나 “아버지를 대신해 깊이 사과드린다”고도 말했다. 일본 격분한 백범이 광복 뒤 귀국을 기다리다 “민족반역자로 변절한 안준생을 교수형에 처하라”고 중국 관헌에게 부탁할 정도였다. <ref>{{저널 인용
|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8&aid=0002036555
|제목=안중근 가문 40여명 독립운동, 아들·딸은 ‘친일’
 
1950년 귀국한 준생은 피란 도중 부산에서 폐결핵으로 숨졌다. 부인 정옥녀씨와 1남2녀는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아들 웅호씨는 미국에서 심장병 권위자가 됐다.
 
안중근 의거 100주년(2009년)을 맞아 국내 학계, 언론이 다각도로 재조명했지만 안준생의 친일행적은 다뤄지지 않았다. 다만 ‘연합뉴스’가 ‘안중근 의거 100년 살아남은 자의 슬픔’(2009년 11월 1일자)이라는 제목으로 “안준생의 친일행적은 적어도 학계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국내 어느 연구자도 이런 사실을 지적하지 않는다. 그만큼 안 의사가 갖는 영웅성이 절대적이기 때문일 것”이라고 분석한 바 있다. <ref>{{저널 인용
|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37&aid=0000009758
|제목=[SOCIETY] 안중근은 쏘고, 아들 준생은 사죄하다
|출판사 =시사IN
|날짜=2010.03.31}}</ref>
 
== 가족 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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