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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후 [[백범 김구]]에 의해 피살 위협이 있었지만, 중국 당국에 의해 모면됐다. 1945년 장제스와의 회담에서 김구 주석은 "안중근 자식이 일본에 항복하여 상하이에서 여러 가지 불법행위를 하며 아편을 매매하므로 실로 유감이다. 직접 명령을 내려 안준생을 구금해주기 바란다"라고 말했다. 1945년 11월 귀국길에 김구 주석은 "민족반역자로 변절한 안준생을 체포하여 교수형에 처하라"고 중국 관리에게 말하기도 했다.
 
1950년 귀국한 준생은 피란 도중 부산에서 폐결핵으로 숨졌다. 서울 혜화동 천주교 공원묘지에 안장돼 있다. 부인 정옥녀씨와 1남2녀는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아들 웅호씨는 미국에서 심장병 권위자가 됐다.
 
안중근 의거 100주년(2009년)을 맞아 국내 학계, 언론이 다각도로 재조명했지만 안준생의 친일행적은 다뤄지지 않았다. 다만 ‘연합뉴스’가 ‘안중근 의거 100년 살아남은 자의 슬픔’(2009년 11월 1일자)이라는 제목으로 “안준생의 친일행적은 적어도 학계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국내 어느 연구자도 이런 사실을 지적하지 않는다. 그만큼 안 의사가 갖는 영웅성이 절대적이기 때문일 것”이라고 분석한 바 있다. <ref>{{저널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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