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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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세기 ===
이후 12세기 초의 교황들은 새로이 세워진 십자군 국가들을 돕기 위해 동지중해 지역으로 소규모 십자군들을 계속 파병했다. 1320년대의1ㅣ20년대의 주요 사건들로는 [[풀크|풀크 5세 당주 백작]]의 십자군, [[베네치아 십자군]], 독일왕 [[콘라트 3세]]의 십자군, 그리고 [[성전기사단]]의 창설 등이 있다.<ref>{{Harvnb|Lock|2006|pp=144–45}}</ref> 같은 시기, 교황의 적에게 반하는 것을 통해 면벌을 받는 구상이 흥하였고 이는 정치적 목적의 십자군들의 시작으로 이어졌다.<ref>{{Harvnb|Lock|2006|pp=146–47}}</ref> 한편, [[모술]] 총독 [[이마드 앗딘 장기]]가 1128년 알레포를, 1144년 [[에데사 공방전|에데사]]를 함락하면서 위기감을 느낀 서유럽에서는 [[제2차 십자군]]이 소집되었다.<ref>{{Harvnb|Riley-Smith|2005|pp=104–05}}</ref><ref>{{Harvnb|Lock|2006|p=144}}</ref><ref>{{Harvnb|Hindley|2004|pp=71–74}}</ref> 프랑스왕 [[루이 7세]]와 독일왕 콘라트 3세가 각기 프랑스와 독일에서 군대를 이끌고 와서 예루살렘과 다마스쿠스를 향해 진군했지만, 그 동안 이렇다 할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다.<ref>{{Harvnb|Hindley|2004|pp=77–85}}</ref> 제1차 십자군 때 그러했듯 이번에도 십자군들은 애먼 유대인들을 공격하여 [[라인란트]], [[쾰른]], [[마인츠]], [[보름스]], [[슈파이어]] 등지에서 유대인 학살을 일으켰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성지 탈환을 위한 금전을 내놓지 않았다는 핑계를 댔다. [[베르나르 드 클레르보]]는 플랑드르에서 독일까지 여행하며 숱한 폭력을 목격하고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ref>{{Harvnb|Tyerman|2006|pp=281–88}}</ref><ref>{{Harvnb|Hindley|2004|p=77}}</ref>
 
한편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기독교도 제후들이 계속 승세를 점했다. [[포르투갈왕]] [[아폰수 1세]]가 [[리스본 공방전|리스본을]], [[러몸 버렁거 4세 데 바르셀로나 백작]]이 [[토르토사 공방전 (1148년)|토르토사를 함락]]시켰다.<ref>{{Harvnb|Hindley|2004|pp=75–77}}</ref><ref>{{Harvnb| Villegas-Aristizabal |2009|pp=63–129}}</ref> 북유럽에서는 [[색슨인]]들과 [[데인인]]들이 아직 고대신을 믿는 [[슬라브족]] 민족인 [[벤트인]]을 토벌하는 [[벤트 십자군]]에 참여했다.<ref>{{Harvnb|Lock|2006|p=148}}</ref> 다만 이 시기 제2차 십자군 이외의 십자군을 공인하는 교황칙서가 내려진 적은 없다.<ref>{{Harvnb|Lock|2006|p=213}}</ref> 마침내 1162년 벤트인들은 소멸한 민족이 되었다.<ref>{{Harvnb|Lock|2006|pp=55–56}}</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