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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무원종공신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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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명'''(髙敬命, [[1533년]] [[11월 30일]] ~ [[1592년]] [[7월 10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의병장]]이다. 자는 이순(而順), 호는 제봉(霽峰)·태헌(苔軒)·태사(苔槎), 본관은 [[장흥 고씨|장흥]](長興)이며, 시호는 충렬(忠烈)이다.<ref>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http://people.aks.ac.kr/view.jsp?id=PPL_6JOb_A1533_1_0000386</ref>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좌도 의병대장으로 활약하다 금산 전투에서 순국하였다. 그의 생전에는 [[1591년]](선조 24)[[광국공신|광국]][[원종공신]] 1등에 특별히 책록되었고, 사후에는 의병장으로 활동한 공로로 [[1604년1605년]](선조 3637) [[선무공신|선무]][[원종공신]] 1등에 추서되었다. [[백인걸]]의 문인이다.
 
1552년(명종7) 진사시에 합격하고 1558년 [[과거 제도|식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다. [[1563년]] [[조선 명종|명종]]비 [[인순왕후]]의 친정 외삼촌인 [[이조판서]] [[이량]](李樑)과 그 일파의 전횡을 삼사에서 논할 때 교리(校理)로서 참석하였다가, 논의를 장인 [[김백균]]을 거쳐서 이량에게 알려주었다가 발각되어 [[울산시|울산]][[군수]]로 좌천당하고 곧 파면되었다. 1581년에 기용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1591년 동래부사로 있다가 [[서인]]이 축출될 때 사직하고 낙향했다.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이 터지자 [[담양]]에서 6천여 명의 의병을 모아 왜군과 교전하였다. 전주, 은진을 거쳐 금산에서 왜군과 교전하던 중, 그해 [[7월]] 전주, 흥덕에서 추가로 온 왜군과 상대하다가 말에서 떨어졌고, 뒤쫓아온 왜군의 칼에 맞아 전사하였다. 바로 그의 아들 고인후(高因厚) 역시 남은 의병과 함께 전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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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상 경력 ==
* 광국원종공신 1등관([[1591년]])
* 선무원종공신 1등관([[1605년|1604년]])
 
== 기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