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체스카 도너: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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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체스카 도너'''({{llang|de|Franziska Donner|프란치스카 도너}}, {{llang|en|Francesca Donner Rhee}}, [[1900년]] [[6월 15일]] ~ [[1992년]] [[3월 19일]])는 [[대한민국의 대통령|대한민국의 제1, 2, 3대 대통령]] [[이승만]]의 두 번째 아내로배우자로, 한번 결혼했으나 이혼했고, [[1931년]] [[빈 회의]]에 참석차 [[오스트리아]]를 방문한 [[이승만]]과 만났다가 그와 재혼하였다.
 
[[1960년]] [[이승만]]의 사임 이후 함께 하와이에 망명하였고, 이승만 사후에는 모국인 [[오스트리아]]에 있다가 [[1970년]] [[대한민국]] 정부의 허가로 귀국하였다. [[오스트리아]] 출신 귀화인으로 [[대한민국]]의 1번째 [[영부인]]이었다대통령 배우자이었다. [[한국어]] 이름은 '''이금순''' 또는 '''이부란'''(李富蘭)이다. 별칭은 호주댁<ref>당시 오스트리아와 오스트레일리아를 착각한 사람들 때문에 이런 별명이 붙었다. 프란체스카 도너는 분명히 [[오스트리아]] 출신이나, [[오스트리아]]와 [[오스트레일리아]]의 국명이 비슷한 관계로 이런 오해가 생겼다.</ref> 이다.
 
== 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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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0월]] [[이승만]]과 함께 귀국하였다. 이후 [[돈암장]]과 [[이화장]]에서 거주하다가 이승만은 [[1948년]] [[5월 30일]]에는 국회의장에, [[8월]]에는 대통령에 선출되었고 프란체스카는 이승만을 따라 [[경무대]]로 이주하여 살았다. [[1948년]] [[1월 12일]] UN한국위원회가 서울에 도착하자 이승만을 따라 회의에 참관하였다.
 
이후 남편 [[이승만]]이 제헌 국회의원과 국회의장에 당선되고, 초대 대통령에 선출되자 영부인대통령 배우자 자격으로 [[이화장]]에서 [[경무대]]에 입주하였다. 그러나 경무대 입주 직후 남편 이승만을 만나는 방문객 문제에 일일이 개입하여 보좌관들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그는 해방 직후 남편 [[이승만]]을 찾아오던 정치인들 중 [[안재홍]]을 무시하고, 냉소적으로 대접했다. 결국 [[안재홍]]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까지는 이승만에게 동참했지만, 등을 돌려 1950년 제2대 총선에는 독자적으로 출마하게 된다. 이승만의 측근 [[윤치영]]의 비서를 지냈던 [[최기일]]에 의하면 프란체스카는 이승만을 찾아온 손님들 중 [[송필만]], [[고희동]]을 무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