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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은 무상(無上,물긷는 군사)김돌손(金乭孫)을 시켜 즉시 마다시(馬多時)를 끌어올릴 것을 명했다. 갈고랑쇠에 낚여 배 위로 끌려 올라온 적장 마다시(칸 마타시로 마사케가)는 곧바로 촌참(寸斬)하자 조선 수군의 사기는 급격히 올라갔다. 반면에, 전투 중에 지휘관이 적군에 의해 참수되고 토막난 것을 본 일본 수군의 사기는 떨어졌다. (내도수(來島守)인 구루시마 미치후사는 부상으로 사망했다. 그리고 난중잡록에는 효수되었다고 기록되었다.)
또한 좁은 목(項)을 통과하려던 일본 수군은 수로를 틀어막고 있던 조선 수군에 의해 막히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형국이었다. 통제사 이순신은 이점을 노린 것이 분명했다. 일본 수군에게 또 하나의 악재로, 정오 즈음이 되자 점차 [[조류]]및 바람의 방향이 바뀌기 시작하였다. 이번에는 조류의 방향이 조선 수군에는 순조(順潮)가 되고 일본 수군에 역조(逆潮)가 되어, 포구에 갇힌 일본 수군에게 대단히 불리한 상황이 되었다. 썰물이 시작되었기에 첨저선이었던 일본 수군은
포구안으로
<b>"육박하여 난전이 되었을 때 홀연히 장수 배에서 주라를 번갈아 불어대고, 지휘기가 일제히 흔들리고 도고(鼗鼓) 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불이 적의 배에서 일어나 여러 배가 연소되니, 불길은 하늘을 뒤덮었고, 화살을 쏘아대고 돌을 던지고 창검이 어울려서 찌르니, 죽는 자는 삼대가 쓰러지듯 하였고, 불에 타 죽고 빠져 죽는 자가 그 수효를 알 수 없었다.<난중잡론>"</b>
난중일기에는 "화전(火戰)”이라는 문구가 없고 “화살을 비오듯 쏘아대니”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난중잡록에서는 화전(火戰)임을 알게 해준다. 난중일기에는 화전(火戰)에 관한 기록이 빠져있다. 이러한
=== 승리의 요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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