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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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전 =
|대통령2=[[지미 카터]]}}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Llang|en|Ruth Bader Ginsburg}}, 결혼 전 조안 루스 베이더; [[1933년]] [[3월 15일]] ~ )는 [[미국 연방 대법원]] 대법관이다.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이 연방 대법관으로 지명하였고, [[미국 상원|상원]]의 인준을 받아 1993년 8월 10일에 취임 선서를 하였다. 그는 [[샌드라 데이 오코너]]에 이은 사상 두번째 여성 연방 대법관이며, 현 연방 대법관인 [[소니아 소토마요르]]와 [[엘레나 케이건]]과 함께 지금까지 임명된 네명의 여성 연방 대법관중 한명이다. [[샌드라 데이 오코너|오코너]] 연방 대법관의 퇴임과 [[소니아 소토마요르|소토마요르]] 연방 대법관 임명사이의 기간동안 그는 유일한 여성 연방 대법관이었다. 이 기간동안 그가 작성한 단호한 소수의견은 법조인들과 대중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미 연방 대법관들 중에서 대체적으로 [[진보주의|진보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긴즈버그는 [[미국 대 버지니아 사건|''미합중국미국 대 버지니아주'',]] ''[[:en:Olmstead_v._L.C.|옴스테드 대 L.C.]], [[:en:Friends_of_the_Earth,_Inc._v._Laidlaw_Environmental_Services,_Inc.|미국 지구의벗미국지구의벗 대 레이드로환경서비스]]''와 같은 유명한 판결문(다수의견)을 작성하였다.
 
긴즈버그는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그의 언니는 그의 영유아시절에 사망했으며, 그의 가장 큰 지지자인 어머니는 그의 고등학교 졸업후 얼마지나지 않아 사망하였다. [[코넬 대학교]] 학사과정을 마치고 결혼과 출산을 하였고 [[하버드 법학대학원]]의 몇 안되는 여학생이 되었다. 편입한 [[컬럼비아 법학대학원]]에서 공동 수석으로 졸업 후 그는 학계에서 일했다. [[럿거스 대학교|럿거스 법학대학원]]과 [[컬럼비아 법학대학원]] 교수로서 재직할동안 그는 학계에서 민사소송을 가르치는 몇 안되는 여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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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즈버그는 연방 대법원이 [[미국 수정 헌법 제14조|수정 헌법 제14조]]의 [[평등보호조항]]의 범위를 여성에까지 확대한 1971년 [[:en:Reed_v._Reed|리드 대 리드]]사건의 상고이유서를 자원하여 작성하였다. 그는 여성 군인이 남편의 주택수당을 신청하는것을 남성 군인이 아내의 남편수당을 신청하는것 보다 어렵게 만든 법령의 위헌성을 주장한 1973년 [[:en:Frontiero_v._Richardson|프론티에로 대 리차드슨]] 사건을 이끌었고 승소하였다. 그는 법령이 여성을 하급자로 취급한다고 주장하였고, 연방 대법원은 8대 1로 그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는 또한 1975년 연방 대법원 [[:en:Weinberger_v._Wiesenfeld|웨인버거 대 위센펠드]] 사건에서 홀어미만 자녀를 돌보는 동안 받는 특별수당을 수령할 수있게한 사회보장제도의 유족급여수령을 거부당한 홀아비를 변호하였고 승소하였다. 그는 여성 생존자에게 주어지는 보호를 똑같이 주지않음으로써 법령이 남성 생존자를 차별한다고 주장했다.
 
긴즈버그는 남자와 여자의 음주연령을 다르게한 오클라호마 법령에 이의를 제기한 1976년 [[:en:Craig_v._Boren|크레그 대 보른]]사건에 [[법정조언자]] 소견서를 작성하고 변호인편의 구두 변론을 하였다. 사상 처음으로 연밥 대법원은 심도있는 [[사법심사|위험심사기준]]격인 [[:en:Intermediate_scrutiny|중간심사기준(intermediate scrutiny)]]를 성차별적 법에 적용하였다. 변호인으로서 맡은 마지막 연방 대법원 사건인 1979년 [[:en:Duren_v._Missouri|듀렌 대 미주리주]] 에서 그는 배심원의 의무수행는 시민의 중요한 정부활동이기때문에 여성에게만 선택적이선 안되며, 여성에만여성에게만 [[배심제|배심원단]] 수행을 강제하지 않은 미주리주의 법의 타당성에 이의를 제기하였다. 그의 구두 변론 후미에 당시 대법관인 [[윌리엄 렌퀴스트]]가 "그러면, [[수전 B. 앤서니]]를 새 지폐에 새기는 걸로 만족하지 않을것이냐?"라고 질문하였는데, 그는 "1원으로도 합의하지 않을것이다"라고 답하는것을 고려하였으나 질문에 답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법학자들과 관련업계는 긴즈버그의 업적들이 헌법의 평등보호조항의 여성에 대한 상당한 법적증진에 기여를 했다고 평가한다. 그의 승소들은 입법부가 법이 성별에 따라 다르게 취급하는것을 어렵게 하였다. 그는 1980년 연방 사법부에 입문하기 전까지 미국시민자유연맹의 여성권익프로젝트에서 계속 일하였다. [[타임 100]]인에 선정된 그의 소개글에서동료 연방대법관이였던 [[앤터닌 스캘리아]]는 "그는 여성권익을 대변하는 선구적이며 매우 성공한 변호인이며, 여성권익증진의 [[서굿 마셜]](인종차별에 힘쓴 전 대법관)이다"라고 변호사로서의 그의 능력을 칭찬했다. 그의 하버드 법학대학원시절 교수이자 학과장이며 전 법무차관인 [[:en:Erwin_Griswold|얼윈 그리스윌드]]가 1985년 연설에서 그를 처음으로 서굿 마셜에 비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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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차별 ====
긴즈버그는 [[미국 버지니아 종합군사학원|버지니아 종합군사학교(VMI)]]가 남학생만 모집하는 것은 [[미국 수정 헌법 제14조|수정 헌법 제14조]]의 평등조항을 위반하는 정책이라고 판단한 1996년 [[미국 대 버지니아 사건|미합중국미국 대 버지니아주]] 사건의 판결문을 작성하였다. 군에 특화된 명문공립학교로서, 버지니아 종합군사학교는 여학생을 모집하지 않았었다. 그에게는, 버지니아 종합군사학교와 같은 공적 주체(state actor)가 성별을 이용해서 여성이 이 학교와 이 학원의 독특한 교육방법을 누릴 기회를 막을수 없었다. 그는 정부가 성별에 근거한 분류를 할시에는 "매우 설득력있는 정당성(exceedingly persuasive justification)"을 증명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긴즈버그는 [[1964년 민권법|민권법]] 제7장이 명시한 성별로 인한 임금차별을 주장하며 원고 릴리 레드베터씨가 그의 고용주를 소송한 2007년 [[:en:Ledbetter_v._Goodyear_Tire_&_Rubber_Co.|레드베터 대 굿이어]] 사건의 소수의견을 작성하였다. 5대 4로 다수(연방 대법원)는 여성이 그의 남성동료보다 임금을 적게 받는 것을 후에 알았다 하더라도 매 급여 주기마다 각각의 [[시효]]가 발생한다고 해석하였다. 그는 여성은 자신들의 임금이 적다는 것을 자주 모르며, 따라서 매 급여주기마다 여성이 행동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불공평하다고 지적하면서 이 결과를 부조리하다고 봤다. 그는 또한 남성주류인 업계의 여성들이 임금차별 금액이 커질때까지 기다리면서 작은 급여차이로 소송하는 것을 꺼려할수 있는 것에도 주목하였다. 소수의견에서 그는 의회가 민권법 제7장을 수정하여 이 사건의 판결문(다수의견)을 무효화하기를 촉구하였다. [[버락 오바마]]가 2008년 대통령 당선후 처음으로 서명하는 법안으로써 [[:en:Lilly_Ledbetter_Fair_Pay_Act_of_2009|릴리 레드베터 임금평등법]]는 노동자가 임금차별소송에 승소하기 쉽도록 하였다. 긴즈버그는 이 법의 도움을 준 공로를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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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en:Safford_Unified_School_District_v._Redding|사포드 통합 교육구 대 레딩]]사건의 판결문을 작성하지는 않았지만, 동료 연방 대법관들에게 영향을 준 공로를 인정받았다. 연방 대법원은 학교가 여자교직원들이 마약을 찾을 수 있도록 13살인 여학생에게 속옷을 벗도록 한 것은 도를 넘어선 것이라고 판결하였다. 이 판결전에 출판된 인터뷰에서 긴즈버그는 "그들은 13살 소녀가 되본 적이 없다"면서, 몇몇 동료 연방 대밥관들은 13살 소녀을 알몸수색하는것의 파장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였다고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8대 1로 연방 대법원은 학교의 수색이 도를 넘어섰으며 [[미국 수정 헌법 제4조|수정 헌법 제4조]]를 위반했다고 판결하였고, 학생이 학교를 소송할수 있도록 허가 하였다. 긴즈버그와 [[존 폴 스티븐스|스티븐스]] 연방 대법관만 학교 교직원 개인들한테도 소송을 제기할수 있다고 견해를 밝혔다.
 
경찰관이 컴퓨터 시스템을 업데이트하지 않아 발생한 증거를 배재하지 않도록 판결한 2009년 [[:en:Herring_v._United_States|헤링 대 미합중국미국]]사건에서 긴즈버그는 소수의견을 작성하였다. 증거 배재가 경찰의 위법행위를 막는 방법임을 강조한 다수의견의 로버츠 연방 대법원장의 의견과는 정반대로, 그는 증거 배재가 피고인의 [[미국 수정 헌법 제4조|수정 헌법 제4조]] 침해의 구제방안으로서 이에 대해 더 강경한 견해를 취했다. 그는 정부가 실수로서 이익을 취하지 못하게 하는 방법과, 따라서 사법의 투명성(judicial integrity)와 민권(civil rights) 존중을 지키기위한 구제방안으로서 증거 배재를 간주하였다. 그는 또한 실수에 대해 값비싼 대가를 치르는 것이 경찰이 더 많은 신경을 쓰게 장려할 것이라 주장하며, 로버츠 연방 대법원장의 증거배재가 실수를 막지 못할것이라는 주장을 거부하였다.
 
==== 국제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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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한 유명한 연방 대법원 사건의 판결문과 소수의견 ===
 
* 1996년 [[미국 대 버지니아 사건|''미합중국미국 대 버지니아주'']]의 판결문
* 1997년 ''[[:en:United_States_v._O'Hagan|미합중국미국 대 오헤이건]]''의 판결문
* 1999년 ''[[:en:Olmstead_v._L.C.|옴스테드 대 L.C.]]''의 판결문
* 2000년 ''[[:en:Friends_of_the_Earth,_Inc._v._Laidlaw_Environmental_Services,_Inc.|미국 지구의벗미국지구의벗 대 레이드로환경서비스]]''의 판결문
* 2000년 ''[[:en:Bush_v._Gore|부시 대 고어]]''의 소수의견
*2003년 ''[[엘드리드 대 애시크로프트 사건|엘드레드 대 애시크로프트]]''의 판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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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적 차이에 불구하고 긴즈버그는 연방 대법관들사이에서 [[앤터닌 스캘리아]] 전 연방 대법관을 가장 친한 동료로 여겼다. 이 둘은 자주 밥을 같이 먹었으며, 오페라도 같이 관람하였다. 그는 몇 오페라에 참여하였는데, 2003년 [[박쥐 (오페레타)|박쥐,]] 1994년에는 스캘리아와 함께 그리고 2009년에는 단독으로 [[낙소스의 아리아드네]]의 대사없는 단역으로 참여하였고 2016년 [[연대의 딸]]에서는 단역으로서 그가 작성한 대사를 읊었다.
 
2012년 1월에 4일동안 [[이집트]]에서 판사, 법학대학원 교직원과 학생, 법조인들을 만났다. [[:en:Al_Hayat_TV|알 하야트 티비]]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새 (이집트) 헌법의 첫번째 조건은 "[[미국 수정 헌법 제1조|미국의 수정 헌법 제1조]]와 같이 기본적인 인권을 보장"해야만 한다고 말하였다. 다른 나라의 헌법에서 본따 이집트 새 헌법을 만들어야되는 질문에 그는 "세계 2차대전 이후 작성된 모든 헌법들"의 도움을 받아야될것이라고 답하였다. 자신이 이집트 새 헌법을 작성한다면, [[미국의 헌법]]과 [[남아프리카 공화국|남아공]]의 헌법을 참조할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1780년대 미국은 "매우 현명한" 남자들에 의해 헌법이 작성되어 운이 좋았으나, 1780년대에는당시에는 [[미국의 여성 참정권|여자는여성은 이러한 과정에 직접 참여할 수없었으며]] [[노예제#미국|노예제도]]가 남아있었다고 말했다.
 
2016년 7월 세번의 각각 다른 인터뷰에서 긴즈버그는 당시 공화당 대통령후보로 사실살 확정된 [[도널드 트럼프]]를 비판하였는데, 뉴욕타임즈와 [[AP (통신사)|AP]]와의 인터뷰에서는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였다. 그는 [[뉴질랜드]]로 이사갈수있다고 농담까지 하였다. 그는 후에 자신의 발언이 "경솔"했다며 공화당 후보에대해 코멘트를 남긴것을 사과하였다.
 
그의 첫 저서인 ''[[:en:My_Own_Words|My Own Words]]''는 2016년 10월 4일 [[사이먼 & 슈스터]]사를 통해 출판되었다.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목록|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논픽션 하드커버 부분 12위로 데뷔하였다. 2016년 10월 [[케이티 커릭]]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책을 홍보하던중 미식 축구선수 [[콜린 캐퍼닉]]이 경기전 [[미국의 국가|국가]]제창때 기립하지않은 것에 대한 질문에 [[:en:U.S._national_anthem_protests_(2016–present)|그런 시위]]는 "멍청한(ill advised)"짓이라고 답하였다. 그는 자신의 비판이 "부적절하게 무시하고 가혹(inappropriately dismissive and harsh)"했다며 이에 대해 사과하였으며 이 사건에 대해 자신이 잘 알고있지 않았고 그 질문 답변을 거부했었어야 했다고 언급하였다.
 
2018년에 그는 여성이 자신의 성희롱 경험 공유하는데에 용기를 주는 [[미투 운동]]에 지지를 표명하였다. 그는 [[선댄스 영화제]] 청중들에게 "때가 되었다. 너무 오랫동안 여성은 자신이 아무것도 할수있는게 없다고 생각하면서 침묵해왔으나, 지금은 법이 성희롱을 겪은 여성과 남성의 편이며, 이것은 좋은것이다." 라고 말하였다. 그는 또한 코넬대학교 재학시절 화학과 교수의 시험점수가 시험정답을 성관계와 교환하자고 했던 시절을 포함한 자신의 성차별과 성희롱에 대해도 얘기하였다.
 
== 개인생활 ==
코넬대학교 졸업후 몇일 지나지않아 긴즈버그는 마틴 긴즈버그와 결혼하였다. 그의 배우자는 후에 국제정으로 저명한 세제 전문 변호사가 되었다. 연방 컬럼비아 항소구 항소법원 판사로 임명된후, 둘은 뉴욕에서 워싱턴 D.C.로 이사하였고. 배우자는 이곳의 [[조지타운 대학교 법학센터|조지타운 법학대학원]]의 법학교수로 재직하였다. 딸 [[w:Jane C. Ginsburg|제인 긴즈버그]]는 현재 컬럼비아 법학대학원 교수로 재직중이다. 아들 [[w:James Steven Ginsburg|제임스 긴즈버그]]는 시카고를 기반으로둔 클래식음악 음반회사인 [[w:Cedille Records|세딜 레코드]]의 창립자이자 회장이다. 긴즈버그는 4명의 손주의 할머니이다.
 
== 어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