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보: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2 개의 출처 구조, 1 개의 링크를 깨진 것으로 표시 #IABot (v2.0beta15)
잔글편집 요약 없음
1번째 줄:
[[파일:정인보_1931.jpg|섬네일|306x306픽셀|1931년 뒷방 서재에서]]
'''정인보'''(鄭寅普, 음력 [[1893년]] [[음력 5월 6일|5월 6일]]/양력 1893년 [[6월 19일]] ~ [[1950년]] [[9월 7일]])는 [[일제일제시대]], 강점기[[대한민국]]의 한학자·역사학자·작가이며,언론인·정치인·작가다.<ref name="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0790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ref> [[대한민국]]의 언론인·정치인·작가이다.
 
[[대한민국]] 정부의 초대 감찰위원장이었으며, [[1950년]] [[한국 전쟁]] 때 납북되었다. 본관은 [[동래 정씨|동래]], 자는 경업(經業), 호는 위당(爲堂), 담원(薝園), 미소산인(薇蘇山人)이다.
 
== 생애 ==
=== 생애나서부터 초기중국 유학까지 ===
호조참판을 지낸 정은조(鄭誾朝)와 달성 서씨(達城 徐氏) 사이에서 외가인 서울 종현에서 출생했다. 11살에 양근으로 낙향하였다. 13세 때 결혼하고 16살 때 진천 향려에서 신혼생활을 했다. 이듬해 귀경하여 단발하고 서강에 가택을 차려 난곡 [[이건방]]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1931년 21살에 중국으로 유학 가 상해에서 동양학을 전공한다. 이 시대에 [[홍명희]], [[문일평]], [[신채호]], [[김규식]], [[박은식]], [[신규식]]과 교유하며 지냈다.<ref>{{서적 인용|제목=백두산 근참기: 한국 걸작 기행문 23선|성=|이름=|날짜=|판=|출판사=조선일보사|쪽=182|장=}}</ref>
[[1893년]] [[서울]] 명동에서 명문가의 외아들로 출생했다. 유명한 학자인 [[이건방]]사사했((사(사사음[[1913년|1]]음 [[상하이|하이]]로 건너가 [[박은식]], [[신규식]] 등과 함께 [[동제사]]를 결성했다.
 
=== 일제시대 후반귀국하여 ===
귀국한 뒤에는 [[연세대학교|연희전문학교]]에서 강의하는 한편 [[동아일보]] 논설위원으로 일하고 저술 활동을 했다. 그는 역사학에 관심을 가졌는데, 조선후기의 실학자, 양명학자, 그 밖의 학파의 저술을 해제(解題)하고 그 학통을 밝혔으며, 또 그 출판에 임해서는 이를 교열하기도 하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심혈을 기울여 정리한 것은 실학자 특히 성호(星湖)와 다산(茶山)의 저술이었다. 그가 역사연구에 몰두하게 되는 것은 1930년대의 일이며, 그 직접적인 동기는 일제 관학자들에 의한 우리 역사의 왜곡이었고, 이를 시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리하여 그의 본격적인 역사연구가 시작되고 그것은 <5천년간 조선의 얼>이란 표제로 동아일보에 연재되기에 이르렀는 데 이것은 후에 <조선사연구>로 간행되었다. 그의 역사학에서 가장 정채를 발하는 부분은 그 정신사적인 역사관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역사연구는 단재사학(丹齋史學)에서 계발되고 그것을 계승하면서 행하여졌으며 그 해박한 한학의 지식과 광범한 사료의 섭렵은 단재사학의 고대사의 전개를 보다 더 완벽하게 체계화했으며 그와 아울러 단재사학의 사론(史論)의 일부를 더 충실한 이론으로 완성시키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민족사학의 역사의식의 특징을 단적으로 표현해 주는 <'>'의 사관(史觀)을 보여 주었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창씨개명]] 등을 강요하는 분위기에 저항하여 산 속에서 은둔 생활을 하였다.
 
=== 광복 직후 ===
은둔생활을 하다가 [[1945년]] [[8월]] 광복 후에 [[국학대학]]의 초대 학장을 지냈다. 광복 초에 정인보는 [[광복절노래]]를 직접 짓기도 하였다.<ref name="네이버">[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21&aid=0000161007 네이버뉴스]</ref> [[1945년]] [[12월 23일]] 오후 2시 [[김구]]가 주관하는 순국선열추념대회에 참여하였다.<ref name=autogenerated1>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13</ref> 순국선열추념대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ref name=autogenerated1/> [[김구]]가 모스크바 3상회담에 반발, 강력한 반탁운동을 추진하자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위원이 되었다.<ref>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55</ref>
 
[[파일:1946.06 3의사 유해봉환식장.jpg|섬네일|right|230px|[[1946년]] [[3월]] 순국3의사 유해봉환일 [[김구]], 계초 [[방응모]] 등과 함께]]
 
[[1946년]] 《[[조선사연구]]》(서울신문사)를 저술했다. [[2월 14일]] [[민주의원]]결성대회가 열렸으나 정인보는 [[여운형]], [[함태영]], [[김창숙]], [[조소앙]] 등과 함께 민주의원 의원직을 거부하였다.<ref>이승만의 정치 이데올로기(서중석, 역사비평사, 2006) 362페이지</ref>
 
[[1946년]] [[6월 15일]] 오후 5시 40분 [[서울역]]에서울역에 마중나가 [[서울역]]에서울역에 도착한 [[윤봉길]](尹奉吉) ‧ [[이봉창]](李奉昌) ‧ [[백정기]](白貞基) 삼의사의 유골을 영접하였다. 이어 태고사(太古寺)에 마련된 빈소에 참석하였다.
 
그는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에 의해 삼고초려로 초대 감찰위원장에 선임되었으나,<ref name="네이버"/> [[이승만]]의 측근이던 [[임영신]]의 독직 사건을 두고 엄한 처벌을 요구했다가 대통령 [[이승만]]과 갈등을 빚고 물러났다.
=== 생애 후반 ===
그는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에 의해 삼고초려로 초대 감찰위원장에 선임되었으나,<ref name="네이버"/> [[이승만]]의 측근이던 [[임영신]]의 독직 사건을 두고 엄한 처벌을 요구했다가 대통령 [[이승만]]과 갈등을 빚고 물러났다.
 
[[1949년]] 민족진영강화추진위원회에 참여하였다.
 
=== 한국전쟁에 휘말리다 ===
1950년 [[한국 전쟁]]이 일어난 그해 [[7월 31일]] [[서울]]에서서울에서 공산군에 의하여 납북된<ref name="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 이후 사망 시기가 알려져 있지 않았다. 한동안 [[신경완]]의 증언에 의하면 북한정권에 의해 '반동'으로 분류되어 국군 북진중 적유령 산맥에서 10월 23일에서 25일 사이 방치되었다가 그 후 병원으로 후송되어 결국 그해 11월 사망한 것으로 서술되어 있으나, 북한에서는 공식 사망일은 [[9월 7일]]로, 북행 직후 [[황해도]]에서 폭격을 받아 죽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납북자들 죽음의 책임을 미국에 돌리기 위함이다.
 
그의 납북과 죽음에는 당시 북한 부수상이었던 [[홍명희|홍명희(洪命熹)]]의홍명희의 차남으로 간첩으로 남파되었던 둘째사위인 홍기무(洪起武)가<ref name="spy1">[http://db.history.go.kr/id/npfp_1949_12_25_v0002_0390 홍기무(洪起武) 등 기소] 자유신문 1949년 12월 25일<br>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49122500329202022&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49-12-25&officeId=00032&pageNo=2&printNo=1035&publishType=00020 괴뢰(傀儡) 앞잡이 홍명희(洪命熹) 아들 등(等) 송청(送廳)] 1949.12.25 경향신문 2면 : 이북 괴뢰집단 부수상 홍명희(洪命熹)의 둘째아들 대의사 홍기무(洪起武)와 번일병(憣一炳)외 3명<br>[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0021600329202016&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0-02-16&officeId=00032&pageNo=2&printNo=1084&publishType=00020 민국(民國)의 기밀(機密)을 노리는 제오열(第五列)에 주의(注意)하자] 1950.02.16 경향신문 2면</ref> 상당히 관련되었다는 것이 넷째 아들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의 증언이다.<ref name="hkm">[http://dongne.donga.com/2010/08/09/d-story-44-%EC%A1%B0%EC%84%A0%EC%9D%98-3%EB%8C%80-%EC%B2%9C%EC%9E%AC%EC%99%80-%EB%8F%99%EC%95%84%EC%9D%BC%EB%B3%B4-%ED%99%8D%EB%AA%85%ED%9D%AC-%ED%8E%B83/ D-story 44 : 조선의 3대 천재와 동아일보-홍명희 편(3)] 2010.08.09 동네(동아미디어그룹 블로그) : 차남 홍기무(洪起武)는 위당 정인보의 사위인데, 간첩으로 남파되었다가 6.25 때 장인 위당을 납북했다.<br>[http://dongne.donga.com/2013/06/19/d-story%E2%85%A1-%EB%82%A9%EB%B6%81%EB%90%9C-%EB%8F%99%EC%95%84%EC%9D%BC%EB%B3%B4-%EC%9D%B8%EC%82%AC%EB%93%A4/ D-storyⅡ 100 : 납북된 동아일보 인사들] 동네(동아미디어그룹 블로그) 6월 - 19 - 2013</ref><ref name="testi">[https://www.youtube.com/watch?v=vWjN2GYw688 4남 정양모(鄭良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의 부친 납북 당시 일에 대한 증언 (동영상)] 6.25전쟁납북진상규명위원회 게시일: 2013. 12. 11.</ref>
 
{{인용문|홍명희는 월북할 때 둘째 아들 홍기무를 데리고 갔는데 그는 위당 정인보(爲堂 鄭寅普) 선생의 둘째 사위였습니다. 다음 위당 선생의 자제분인 정양모(鄭良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의 증언,
35번째 줄:
“아버님과 벽초 선생이 절친해 벽초의 둘째 아들 홍기무와 둘째 누이의 혼사가 이루어졌다. 벽초가 1948년 남북연석회의에 가며 둘째 아들을 데리고 가 돌아오지 않았다. 그 후 둘째 매형(홍기무)이 남파간첩으로 내려왔다 붙잡혔다. 당시 아버님은 감찰위원장이었다. 6·25가 나자 형무소를 탈출, 서울이 점령당하자 큰 차를 타고 우리 집에 왔다. 장인에게 큰 절을 하더니 ‘장인께서도 저와 같이 혁명 사업을 하시지요’라고 했다. 그랬더니 아버지께서 ‘너는 유물론자고 나는 유심론자인데 어떻게 같이 혁명 사업을 하느냐’고 반문했다. 그러자 다시 큰 절을 하더니 ‘장인이 절개를 지키는 건 존경합니다. 그렇지만 우리 인민정부에 협력 안하시면 반동입니다’라고 하고 갔다. 그 며칠 후 보안서원 몇 명이 와서 아버지를 데리고 갔다.”<ref name="hkm"/><ref name="testi"/>}}
 
6.25 당시 사돈 [[홍명희|홍명희(洪命熹)]]는홍명희는 남침 주범 [[김일성]]의 장인이었고,<ref name="hys">[http://www.nl.go.kr/nl/search/bookdetail/online.jsp?contents_id=CNTS-00069088866 홍명희(洪命熹) 맏딸과 김일성(金日成) 재혼(再婚)] 연합신문(聯合新聞) 1950.01.25<br/>
[http://db.history.go.kr/id/npfp_1950_01_25_v0002_0490 김일성(金日成)이 재혼(再婚), 홍명희(洪命熹) 맏딸 영숙(永淑)과] 자유신문 1950년 01월25일 2면 10단<br/>
[http://www.nl.go.kr/nl/search/bookdetail/online.jsp?contents_id=CNTS-00069192278 김일성(金日成) 재혼(再婚)] 한성일보(漢城日報) 1950.01.25<br/>
42번째 줄:
 
== 사후 ==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001년]] [[연세대학교]]는 민족사관 정립과 국학 진흥에 헌신한 선생을 기리기 위해 제2인문관을 위당관(위당 정인보 선생 기념관)으로 지정하였다.
 
[[2008년]] [[8월]] 학술지 ‘한국사 시민강좌’ 하반기호(43호)에서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특집 ‘대한민국을 세운 사람들’을 선발, 건국의 기초를 다진 32명을 선정할 때 교육,학술 부문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ref>[http://www.donga.com/fbin/output?n=200808220076 혼돈의 해방공간서 자유민주주의 초석을 놓다] 동아일보 2008년 8월 22일자</ref>
 
== 가족 관계 ==
* 증조부 : [[정원용|정원용]](鄭元容, 1783~1873)]]
** 조부 : 정기년(鄭基年)
*** 아버지(생부)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0714 정은조(鄭誾朝, 1856∼1926)] - 정인보는 생부 정은조의 슬하 2남 3녀 중 장남.
*** 어머니(생모) : 대구 서씨(大丘 徐氏) 부인<ref>[http://people.aks.ac.kr/front/tabCon/exm/exmView.aks?exmId=EXM_MN_6JOc_1880_014094&curSetPos=1&curSPos=0&category=dirSer&isEQ=true&kristalSearchArea=P 정은조(鄭誾朝) 문과방목 : 고종(高宗) 17년(1880)] {{웨이백|url=http://people.aks.ac.kr/front/tabCon/exm/exmView.aks?exmId=EXM_MN_6JOc_1880_014094&curSetPos=1&curSPos=0&category=dirSer&isEQ=true&kristalSearchArea=P |date=20180320230703 }}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진사(進士) 서상진(徐相眞)<ref>[http://people.aks.ac.kr/front/tabCon/exm/exmView.aks?exmId=EXM_SA_6JOc_1852_032728&category=dirSer&isEQ=true&kristalSearchArea=P 서상진(徐相眞) 사마방목 : 철종(哲宗) 3년(1852)] {{웨이백|url=http://people.aks.ac.kr/front/tabCon/exm/exmView.aks?exmId=EXM_SA_6JOc_1852_032728&category=dirSer&isEQ=true&kristalSearchArea=P |date=20180321063057 }}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한국학중앙연구원</ref>의 딸
*** 양부(본래 백부) : 정묵조 - 정인보 생부 정은조의 친형. 정묵조는 정기년의 장남인데 정묵조 그는 아버지 정기년 선생보다 먼저 별세.
*** 양모(본래 큰어머니) : 창녕 조씨 부인 - 별세
**** 부인 : 성계숙(成癸淑) : 사별
***** 장녀 : [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8KOR_A1913_2_0033196 정정완(鄭貞婉, 1913~2007)]{{깨진 링크|url=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8KOR_A1913_2_0033196 }} : 중요무형문화재 제89호 침선장(針線匠)
**** 부인 : 조경희 (趙慶姬, 1897 ~ 1979.10.13)
***** 차녀 : 정경완(鄭庚婉, 1920~ )<ref>[http://nk.chosun.com/news/articleView.html?idxno=43295 김일성-홍명희家에 얽힌 인연] 조선닷컴 2004.02.10<br />
[http://srchdb1.chosun.com/pdf/i_service/pdf_ReadBody.jsp?Y=2004&M=02&D=11&ID=0402112601 김일성, 벽초 홍명희에 특별예우 / 중책 주고 세간살이 보내줘 며느리, 北 통일신보에 소개 벽초, 本紙에 ‘임꺽정’ 연재] 조선일보 2004.02.11 A26면</ref> : 벽초 [[홍명희]]의 아들 [[홍기무]]와 결혼하여 월북.<ref>북한 부수상을 지낸 [[홍명희]]와 정인보는 사돈간이다.</ref><ref>{{뉴스 인용
|url = http://www.minjog21.com/news/articleView.html?idxno=1140
72번째 줄:
***** 장남 : 정연모(鄭淵謨, 1923~ ) : 교사 역임
***** 차남 : 정상모(鄭尙謨, 1926~ ) : 회사원 역임
***** 삼녀 : [[정양완|정양완]](鄭良婉, 1929~ )]]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 역임<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3062300209109006&editNo=40&printCount=1&publishDate=1993-06-23&officeId=00020&pageNo=9&printNo=22208&publishType=00010 인터뷰 "생전에「보상없는 애국」강조"— 위당(爲堂)의 셋째딸 정문연(精文研) 정량완(鄭良婉) 교수] 1993.06.23 동아일보 9면</ref>
***** 삼남 : 정흥모(鄭興謨, 1931~?) : [[한국 전쟁]]시 제 5사단 일원으로 철원지구에서 전사
***** 사남 : [[정양모_(미술사학자)|정양모]](鄭良謨, 1934~ )]] : 국립중앙박물관장 역임
***** 사녀 : 정평완(鄭平婉, 1935~ ) : 교사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