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 해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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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1 = [[판옥선]] 13척외 초탐선등 기타병력
|병력2 = 군선 [[세키부네]] 130여 척<ref>'난중일기 정유년 1'의 (명량해전 날) 9월 16일자 일기에는 133척이라 적혀있으나 정확한 기록을 위해 이순신이 다시 쓴 '정유년 2'의 9월 16일자 일기에는 130여 척이라 기록되어 있다.</ref>, 수송선 [[아타케부네]] 200여 척
|사상자1 = 순천감목관 [[김규동]], 우수영노비 계생 [[작전 중 사망|전사]] (전사자 총 2명) <br/>[[박영남]], [[봉학]], [[이극신]] 등 3명 부상,기타 상세 불명<ref>{{서적 인용|저자 =이순신|제목 =난중일기 |연도 = 1597 }}</ref> 정유년 9월 17일 난중일기를 통해
임치 첨사가 탄 배의 격군이 부족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조선수군은 생각보다부족했다 많은하였으므로 피해를조선수군의 받았을피해규모가 가능성이컸을것으로 높다.추정됨
|사상자2 = 전선 100여척이상 완파, 이외 전선 다수 파괴<ref> {{출처|날짜=2015-10-12|나머지 90여 척 모두 다 반파됐다는 일각의 주장이 있으나, 전문가 중 그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난중일기, 조선왕조실록, 장계 등에도 그에 관하여까지 서술하고 있는 역사적 근거는 없다. 예컨대, 이순신의 난중일기 중 정유일기2의 9월 16일자를 보면 마지막 부분에 "적선 서른한 척을 쳐부수자"라고 돼있을뿐, 나머지 전선에 대해서는 정확히 얼마나 많은 수가 완파 혹은 반파됐는지 불분명하다. 그러나 난중일기는 통제사측이 이끄는 공격부대의 전과일뿐 좁은 수로에서의 전투기록이 누락되었으므로 100여척이상이 완파되었을 것으로 예측된다.}}</ref>,<br />[[도도 다카토라]] 부상<br />[[구루시마 미치후사]] 전사 <br />칸 마타시로 마사케가 전사 <br /> 최소 8000여 명 전사 추정<ref> {{출처|날짜=2015-10-12|반파된 일본군 전함 수가 불분명한 것과 마찬가지로, 사극 '불멸의이순신'을 비롯하여 불특정 일각에서 일본군 전사자 수를 18466명이라 하는데, 전문가 중 전사자 수로 18466명을 드는 사람도 없으나 난중잡록을 통해서 수많은 왜선이 화공으로 완파되고 많은 일본군이 물에 빠져죽었다는것을 알 수 있다. 이순신의 난중일기, 임금에게 올린 장계, 조선왕조실록 등 어느 사료 중에서도 일본군 전사자 수를 18466명이라고 기록한 사료는 없지만 난중일기는 통제사가 이끄는 공격부대의 전과이므로 임하도의 좁은 수로를 방어하는 지역에서의 전과는 빠져 있다. 따라서 실제 완파된 왜선수는 100여척에 이를것으로 보인다. 다만 당시 일본군의 참전 군함이었던 세키부네에는 한 척당 80-100명 정도가 탔을 것으로 오늘날 추정되는데, 설령 일본군 함대 130여 척이 다 완파됐다고 하더라도 18466명은 전혀 부합하지 못하는 전사자 수이지만 그 만큼 많은 일본군이 피해를 겪었음은 [[난중잡록]]이 증명해 준다. 그러나 일본군 총 전사자 수는 불명이다.}}</ref>
}}{{전역상자 정유재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