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트 슈바이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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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년 시절 ===
==== 귄스바흐 ====
계몽사 어린이 그림위인전기 《슈바이처》(김풍연 지음, 김동명 그림, 계몽사)에 따르면, 슈바이처는 [[1875년]] [[알자스]]의 [[케제르베르|카이제르스베르]]에서 [[루터교]] 목사인 루이 슈바이처 목사의 큰아들로 태어났으며, [[몸]]이 약한 [[아들]]의 [[건강]]을 걱정한 [[부모]]의 뜻에 따라 공기가 맑은 [[농촌]] 귄스바흐에서 자랐다. 형제로는 누나 루이제, 여동생 2명, 남동생 1명이 있었다. 그가 태어난 [[알자스]]는 [[독일]]과 [[프랑스]]의 영토 다툼이 심하던 곳으로 그가 태어날 당시에는 독일 영토였으나, [[제1차 세계 대전]] 후 [[프랑스]]로 넘어가 현재에 이른다. 슈바이처도 [[알자스]]의 [[국적]]이 바뀌면서 [[1919년]] [[독일]]에서 [[프랑스]]로 [[국적]]을 바꾸었다.
===== 고등학교 =====
자서전 '나의 생애와 사상'에 따르면, 슈바이처는 [[1884년]]까지
===== 작은 할아버지댁에서 학교를 다니다 =====
여러 위인전들은 게오르크라는 또래친구가 "너처럼 고기수프을 먹고 자랐으면 씨름에서 이겼을 거야."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를 쓰고 있다.<ref>[[계몽사]] 그림위인전기《슈바이처》등</ref> 그런데 이는 과장되었거나 잘못된 정보로, 슈바이처 집안은 빠듯한 살림살이였다. [[자서전]] 나의 생애와
</ref> 댁에서 공부했다. 부친이 개신교 교회에서 목회하여 받는 박봉으로 [[대가족]]을 돌보아야 하는 빠듯한 살림살이 때문에, 작은할아버지 댁에서 [[학교]]를 다님으로써
====== 베만 선생님 ======
뮐루즈고등학교 때에 성적이 나빴는데 [[한국]]의 [[한문]]이라 할 수 있는 [[라틴어]]가 부족해서였다. 나의 생애와 사상에 따르면, 4급반 때에 베만 선생님이
====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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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악 ====
[[음악]]을 좋아한 슈바이처는
=== 신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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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회 ===
[[1899년]] [[스트라스부르]]의 [[목사]]가 되었으며, [[1902년]] 모교의 신학부 강사가 되었다. [[성 니콜라우스|성 니콜라이]] 루터교회의 부목사로 목회할 당시 슈바이처 목사는 [[견신례]]를 준비하는 청년들과 자유롭게 [[토론]]을 했는데, 이는 그가 사목하던 [[교회]]에서 놀라운 일로 받아들여졌다.
[[파일:Albert Schweitzer, Etching by Arthur William Heintzelman.jpg|200px|오른쪽|섬네일|알베르트 슈바이처, 아서 윌리엄 하인젤만의 에칭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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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료봉사자가 되기 위한 준비 ====
슈바이처의 자서전 나의 생애와 사상에 따르면, 그는 21세 때 '30세까지는 학문과 예술 속에서 살고, 그 후부터는 인류에의 직접 봉사 활동으로 들어가자'는 결심을 실현하기 위하여
==== 아프리카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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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프리카로 돌아가다 ====
그 후 [[독일]]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하자 슈바이처의 고향은 [[프랑스]] 영토가 되었고, 이에 따라 그는 프랑스 국적을 선택할 수 있었다. 슈바이처는 [[프랑스]] [[식민지]]였던 [[가봉]]에서 활동하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국적을 [[독일]]에서 [[프랑스]]로 바꿨다. 그 후 6년간 유럽 각지로 돌아다니며 강연과 [[파이프 오르간|파이프오르간]] 연주로써 모금을 한 다음 다시 [[1924년]] [[아프리카]]로 돌아갔으나, [[병원]]은 부서져 뼈대만 남아 있었다. 다행히 여러 곳에서 후원금이 들어와 병원은 곧 다시 세울 수 있었다. 당시 유럽은 제1차세계대전이 끝나고 전후복구를 하던 때였기 때문에, 후원자들의 처지는 어려웠다. 그럼에도 병으로 고통받는 아프리카 [[민중]]들을 위해 기꺼이 후원한 것이었다.(의료선교 이야기인 물과 원시림 사이에서 참조) 그를 돕기 위하여 [[의사]]와 [[간호]]사들이 그곳으로 자원하러 왔다. 그는 [[한센병]] 환자 거주지도 추가로 세우는 등 활발한 활동을 했으며, [[정신장애]]인들을 위한 의료시설도 만들었다. 그의 이러한 활발한 활동은 36명의 백인 의사, [[간호사]] 그리고 다수의 [[원주민]] 직원들의 봉사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병원운영에 필요한 돈은 3년에 한 번 꼴로 [[유럽]]으로 돌아와 연주회를 열어 번 돈과 저서의 인세, 강연으로 받은 돈과 기부금으로 충당되었다. [[1957년]] [[라디오]] 강연과 [[신문]] 기고를 통해 [[핵무기]]에 반대하는 [[반핵]]운동을 하였으며, [[1965년]] 랑바레네에서 90세 생신잔치를 마지막으로, 그가 사랑하는 [[바흐]]의 음악을 들으면서 90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 사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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