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학생 항일 운동: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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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어느 지역에서도 한일간의 감정은 존재했다. 도심의 중심지의 노른자위 땅을 차지하고 정치와 경제적 특혜를 누리며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멸시를 일삼는 식민지의 삶은 고스란히 학생들의 생활 속에도 그대로 나타났다. 넓은 평야가 있는 나주의 경우에도 경제적 부를 독점하는 것은 일본인 대지주들이었고, 그들의 자녀들은 부유를 누리며 광주로 통학하고 있었다. 가난한 조선인 학생들은 차별과 멸시 속에서 항일 의식을 키우며 광주로 통학하고 있었다.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에 도착한 광주발 통학열차에서 내린 일본인 중학생들은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인 [[박기옥이광춘]]·[[암성금자]]·[[이광춘]] 의 댕기머리를 잡아당기며 희롱하였다. 이 광경을 목격한 박기옥의 사촌동생 [[박준채]]는 분노하여 항의했으나 말을 듣지 않자 난투극이 벌어졌다. 이 난투극은 일본인 학생 50명과 한국인 학생 30명이 싸웠는데 한국인 학생 30명이 사기면에서는 더 유리하였다.
 
이를 본 일본 경찰들이 일본인 학생 편을 들고, 광주고보 학생들은 차별에 대해 집단항의하였다. 이에 일본인 기업인들이 [[영국 동인도 회사|동인도회사]]를 모방한 [[식민지]] 수탈기관인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수탈하는 것에 대해 쌓여오던 분노가 겹쳐서 폭발하게 된다. 이를 접한 [[1929년]] [[11월 3일]] [[허정숙]]은 [[광주]]로 내려와 이들 학생들을 면담하고 [[경성부|경성]] 지역의 여학생들 여성 운동가들을 찾아다니며 시위를 할 것을 촉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