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대한제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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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선포: 입헌군주제를 거부한 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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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애당초 임금이 된 것은 하늘의 도움을 받은 것이고, 황제의 칭호를 선포한 것은 온 나라 백성들의 마음에 부합한 것이다. 낡은 것을 없애고 새로운 것을 도모하며 교화를 시행하여 풍속을 아름답게 하려고 하니, 세상에 선포하여 모두 듣고 알게 하라.|고종실록 광무 1년(고종 34년) 10월 13일|}}
 
대한제국 선포 이후 미국에서 유학하고 귀국한 서재필(갑신정변을 주도한 일파 중 한명) 등이 [[독립 협회]]를 창단하여 대한 독립의 공고화와 입헌군주제의 수립을 호소했으나,<ref name="교수신문 편집국">{{뉴스 인용 |url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43293|제목=1919년, 3.1운동과 임시정부가 꿈꾼 ‘공화제’는 무엇인가|출판사=교수신문|날짜=2018-11-26}} '고종이 입헌군주제조차 완강히 거부하는 상황' 등에 관한 학술토론.</ref> 조정의 보수 대신들이 지원하는 황국 협회가 새로이 결성되어 양측은 노골적으로 대결하였다. 결국 고종은 두 단체를 군대로 하여금 모두 무력으로 강제 해산시키고 정국은 다시 소강 상태가 되었다. [[1899년]]에는 이미 [[방콕]], [[교토]] 등에 다니고 있던 [[노면전차]]를 도입하였다.
 
이것을 고종이 신문물에 대해 넓은 이해와 포용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ref name="고종시대" /><ref name="명성황후" /> 그러나 [[윤웅렬]], [[유길준]], [[윤치호]] 같은 이들은 대한제국 선포에 회의적이었다. 단순히 “국호만 바꾸고 칭제건원을 한다 하여 조선의 국왕에게 없던 용기가 생겨나거나 국격이 더 높아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