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TedBot (토론 | 기여)
잔글 봇: 틀 이름 및 스타일 정리
오타 수정
42번째 줄:
로마는 점차 에트루리아 등 [[이탈리아 반도]]의 다른 나라를 정복하게 되었다.<ref>헤이우드, 1971년. pp.350-358.</ref> 그중 베이 점령은 라티움 밖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는 징표가 되었으며 그 이후 로마는 이탈리아 내에서 팽창을 거듭한다. 이후 삼니움 족의 캄파니아 침입에 개입하여 3차 삼니움 전쟁을 치루었고 여기서 승리한 로마는 중부 이탈리아의 패자가 된다.
 
이탈리아 반도 통일을 앞두고 로마의 지배권에 마지막 도전장을 던진 세력은 그리스 식민시 [[타란토|타렌툼]]이었다. 기원전 281년 타렌툼은 [[에페이로스의 피로스]]를 끌어들여 로마와 싸웠으나 결국 패배했다.<ref>[http://www.livius.org/ps-pz/pyrrhus/pyrrhus02.html 에페이로스의 왕 피로스 (2)] 와 [http://www.livius.org/ps-pz/pyrrhus/pyrrhus03.html 에페이로스의 왕 피로스 (3)] 요나 렌더링(Jona Lendering). Livius.org. 확인일자 2007년 3월 21일.</ref><ref>헤이우드, 1971년. pp.357-358.</ref> 로마는 정복을 통해 전략 요충지에 [[로마의 식민시|로마의 식민지]] 건설하여 이탈리아에 안정적인 지배권을 확립했다.<ref>헤이우드, 1971년. p.351.</ref> 기원전 3세기 후반에 로마는 3차에 걸쳐 [[포에니 전쟁]](BC 264 - BC 146)에서 카르타고와 격돌했다. 1,2차 포에니전쟁에서는 초반에 카르타고가 우세했으나 결국은 로마가 승리하면서 로마는 이 전쟁에서 처음으로 해외 영토인 [[시칠리아]]나 [[에스파냐]] 등지를 정복한다. 후에 3차 포에니전쟁에서는 카르타고가 로마와 맺은 협약을 위반하여 로마의 침공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카르타고]]는 완전히 멸망하여 폐허가 되고 만다. 이로서 로마는 서지중해의 패권을 거머쥐었다.<ref>헤이우드, 1971년. pp.376-393.</ref><ref>[http://www.wsu.edu/~dee/ROME/PUNICWAR.HTM 로마: 포에니 전쟁] 리차드 후커 씀. 워싱턴 주립 대학. 1999년 6월 6일. 확인일자 2007년 3월 22일.</ref> 기원전 2세기에는 [[마케도니아 왕국]]와 [[셀레우코스 왕국]]을 물리치면서 [[지중해]] 세계를 제패했다.<ref name=Bagnall>Bagnall 1990</ref><ref>[http://www.wsu.edu/~dee/ROME/CONQHELL.HTM 로마: 헬레니즘 제국을 정복] 리차드 후커, 워싱턴 주립대학, 기록일자 1999년 6월 6일, 확인일자 2007년 3월 22일.</ref>
 
[[파일:Marius Carthage.jpg|섬네일|upright|로마의 장군이자 정치가였던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로마의 군사 제도에 극적인 개혁을 시행하였다.]]
해외 팽창은 내분을 불렀다. 원로원 의원은 [[로마 속주]]의 부를 통해 부유해졌지만 주로 소농 출신의 병사들은 고향을 오래 떠나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땅을 지키지 못했으며, 임금 노동 대신 외국 [[노예]]에 크게 의존하게 되어 [[라티푼디움|대농장]]이 발달했다.<ref>다이커, 2001년. pp.136-137.</ref><ref>[http://web.ics.purdue.edu/~rauhn/fall_of_republic.htm 로마 공화정의 몰락, 기원전 133-27년]. Purdue University. 확인일자 2007년 3월 24일.</ref> 전리품 수입 덕분에 새로 확보한 속주에서 상업이 발달하였고, 세금 징수 할당 제도로 신흥 상인 계급인 [[기사 (군사)|기사 계급]]은 경제적 이익을 거머쥘 기회를 얻었다.<ref name="Liviuseques">[http://www.livius.org/ei-er/eques/eques.html Eques (기사)] 요나 렌더링(Jona Lendering). Livius.org. 확인일자 2007년 3월 24일.</ref> [[클라우디우스 법]](lex Claudia)으로 원로원 의원의 상업 행위가 금지되면서 이론상 원로원에 진출할 수 있었던 기사 계급은 정치 권력에 심각한 제약을 받게 된다.<ref name=autogenerated2>a</ref><ref>애드킨스, 1998년. p.38.</ref> 원로원은 끊임없이 정쟁을 일삼아 계속 토지 개혁에 발목을 잡았고, 기사 계급에 정치 발언권 확대를 거부했다. 원로원의 정적들끼리 도시 실업자 출신의 폭력조직을 조종하여 완력으로 유권자를 위협했다. 이런 상황은 기원전 2세기 말 평민에게 주로 귀족이 소유한 토지를 재분배하려는 토지 개혁 입법을 시도한 [[그라쿠스 형제]] 시대에 극에 달했다. 두 형제는 살해당했는데, 여기에 원로원은 불만을 품은 평민과 기사 계급을 달래고자 그라쿠스 형제가 추진한 개혁의 일부 입법을 통과시켰다. 또 이탈리아 동맹국에 로마 시민권 확대를 거부하면서 기원전 91~88년에 [[동맹국 전쟁]]이 일어났다.<ref>더랜트, 1944년. pp.120-122.</ref>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으로 병사들이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잃고 점차 사병화(私兵化)되었으며, 유력한 장군이 국가와 원로원을 장악하게 된다.<ref>[http://faculty.vassar.edu/jolott/old_courses/republic1998/marius/effects.htm 토지 요구 거부의 지속적인 효과] {{웨이백|url=http://faculty.vassar.edu/jolott/old_courses/republic1998/marius/effects.htm# |date=20081007060536 }}. 확인일자 2007년 3월 23일.</ref> 이로써 마리우스와 그의 부하 [[술라]]는 내전을 벌였으며, 술라가 기원전 82년 콜리네 문에서 압승을 거두었고, 결국 기원전 81년~79년에 술라가 독재 권력을 휘두르게 되었다.<ref name=Scullard1>스컬라드 1982년, chapters I-IV</ref> 술라는 무너져가던 공화정을 부흥시키려 개혁을 하고 독재관에 취임한 지 2년 만에 자진 퇴임한다. 그러나 술라가 죽으면서 로마는 다시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기원전 1세기 중반에는 [[마리우스]]의 처조카인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술라]]의 부하인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크라수스]] 세 사람이 [[제1차 삼두정치]]를 이루어 공화국을 농단했다. 이후 기원전 53년에 파르티아와 벌인 [[카르하이 전투]]에서 크라수스가 전사하면서 삼두정치는 카이사르와 원로원파로 돌아선 폼페이우스로 나뉘어 전개된다. 기원전 58년부터 7년에 걸쳐 갈리아를 정복한 후에([[갈리아 전쟁]]) 원로원과 대립하던 카이사르는 기원전 49년에 루비콘 강을 건너 폼페이우스가 이끄는 원로원파 군대와 내전을 일으킨다([[카이사르의 내전]]). [[기원전 48년]],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폼페이우스를 상대로 압승을 거두고, [[탑수스 전투]]와 [[문다 전투]]에서 폼페이우스의 잔당을 격파한 카이사르는 결국 내전에서 승리하면서 로마의 종신 독재관이 되어 각종 개혁을 실시하였다.<ref name=Scullard2>스컬라드 1982년, chapters VI-VII</ref> 기원전 44년 카이사르는 독재 의혹을 받다가 공화제 헌정을 복원하려는 정적([[브루투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등)에 암살당한다. 그러나 카이사르의 암살자들은 정권을 잡지 못하였고, 카이사르의 후계자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수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의 [[제2차 삼두정치]]를 이루며 권력을 잡는다.<ref>[http://www.bbc.co.uk/history/historic_figures/caesar_julius.shtml 율리우스 카이사르 (BCE100 - BC44)]. [http://bbc.co.uk]. 확인일자 2007년 3월 21일.</ref><ref>[http://www.roman-emperors.org/auggie.htm 아우구스투스 (BC 31 - CE 14)] 가렛 G. 페이간. De Imperatoribus Romanis. 기록일자 2004년 7월 5일. 확인일자 2007년 3월 21일.</ref> 그러나 이 정치적 동맹은 권력 투쟁으로 기운다. 레피두스는 추방되며,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하며,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격퇴하여 로마의 유일 지배자가 되었다.<ref name=Scullard3>스컬라드 1982년, chapter VIII</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