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경 (고려 무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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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서(浿西, 지금의 [[경기도|경기]] 북부와 [[황해도]] 지방) 출신의 호족이다.<ref name="sugeun">부경역사연구소, 《10세기 인물열전, 쇠유리부터 능창까지 후삼국 22인의 삶》, 푸른역사, 89면</ref> 대광위(大匡尉) [[박지윤 (고려)|박지윤]](朴遲胤)의 아들이자 [[박수문]](朴守紋)의 동생이다.
 
박수경은 [[고려 태조|태조]]의 휘하에서 원윤(元尹)으로 있을 때, 기묘한 계책으로 [[견훤]]의 [[군대]]를 격파하였다. [[925년]]([[고려 태조|태조]] 8) 조물군 전투에서는 박수경이 지휘한 하군만이 승리를 거두어 [[고려 태조|태조]]가 이를 기뻐하며 그를 원보(元甫)로 삼자 박수경은 자신의 형 수문보다 높은 벼슬에 오를 수 없다고 사양하여 [[고려 태조|태조]]가 두 형제를 모두 원보로 삼았다. [[927년]]([[고려 태조|태조]] 10) [[대구]] 공산성 전투에서는 적에게 포위당한 [[고려 태조|태조]]를 구출하였으며 [[936년]]([[고려 태조|태조]] 19) 마군장군으로서 [[후백제]]의 [[신검]]을 선산 일리천에서 토벌하였다.<ref>같은 책, 97면</ref>이러한 공로로 훗날 [[역분전]]을 정할 때 특별히 토지 200결을 하사받고 평산을 식읍으로 받았다. [[고려 정종 (3대)|정종]] 즉위 초에도 내란을 평정할 때 공을 세워 대광(大匡)이 되었다. 박수경의 딸은 [[고려 태조|태조]]에게 시집가 [[몽량원부인]]이 되는 등 공신으로서 많은 영화를 누렸다. 그러나 [[964년]]([[고려 광종|광종]] 1515년) 세 아들 승위(承位)·승경(承景)·승례(承禮)가 참소를 받아 옥에 갇히자 박수경은 근심과 울분으로 세상을 떠났다.<ref>같은 책, 101면</ref>
 
== 가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