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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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Portrait of the Kangxi Emperor in Informal Dress Holding a Brush.jpg|서예를 연습하는 소년 헌엽|섬네일|오른쪽|200px]]
'''강희제'''(康熙帝, 순치(順治) 11년 [[음력 3월 18일]] ([[1654년]] [[5월 4일]]) ~ 강희(康熙) 61년 [[음력 11월 13일]] ([[1722년]] [[12월 20일]]))는 [[청 제국]]의 제4대 황제(재위 1661년 ~ 1722년)이자, [[1644년]] [[명나라]]가 멸망한 직후 [[청 제국]]이 [[산해관]]을 넘은 뒤 [[자금성]]에서 [[청 제국]]의 군주가 천명을 상실한 [[명나라]]의 주씨를 대신하여 중국의 새로운 수명천자(受命天子)가 되었음을 선언한 이래
1661년(순치 18년) 부친인 [[순치제]]가 천연두로 붕어하자, 여덟 살의 어린 나이에 황제로 즉위하여 1722년(강희 61년)까지 61년간 재위함으로써 [[중국]] 역사상 가장 긴 재위기간을 가진 황제이다.<ref>중국사학회(2005), 중국역사박물관 10, 34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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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은 그 해 [[2월 7일]]에 순치제의 붕어를 공식 발표하였고, 국상을 준비하였다. [[2월 17일]]에 효장태후는 순치제에게 세조(世祖)라는 묘호와 장황제(章皇帝)의 시호를 올리고 순치제의 시신을 [[:zh:清孝陵|효릉]](孝陵)에 안장하였다. 뒤이어 순치제의 유조를 낭독하니 현엽을 황태자로 책봉하라 쓰여있었다. 유조의 내용은 이러하였다.
{{인용문2|짐의 아들인 강비 동가씨 소생의 제3황자 현엽은 연치가 겨우 8살이나 그 용모가 단정하고 영민하니 이 나라 종묘사직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고로 현엽을 황태자에 책봉하여 다음 황제에 올리도록 하라. 27일 동안 상복을 입다가 그 뒤 옷을 대례복으로 갈아입고 즉위식을 치르도록 하라. 특히, 영시위내대신 색니, 소극살합, 알필륭, 오배는 조정의 원훈이자 개국공신으로 짐이 언제나 신뢰하던 대신들이니 충성을 다하여 신제를 보좌하고 정무를 처리하라.<ref>[http://zh.wikisource.org/wiki/%E6%B8%85%E5%8F%B2%E7%A8%BF/%E5%8D%B76 청사고 본기 권6 聖祖本紀一 ]: 朕子玄燁,佟氏妃所生也,年八歲,岐嶷穎慧,克承宗祧,茲立爲皇太子,即遵典制,持服二十七日,釋服,即皇帝位。特命內大臣索尼、蘇克薩哈、遏必隆、鰲拜爲輔臣,伊等皆勛舊重臣,朕以腹心寄託,其勉天忠盡,保翊沖主,佐理政務。</ref>}}
이에 따라 8살의 황태자 현엽을 청나라의 새 황제로 추대하니 이가 청나라의 제4대 황제인 성조 강희인황제(聖祖
만약 효장태후가 빨리 영시위내대신을 부르지 않고 수수방관하였다면, 황궁에 보위를 놓고 쟁탈전이 일어났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효장태후는 이를 신속히 대처하고 황태자 현엽을 제위에 올려 화를 막을 수 있었다. 황위에 오를 당시 정치적으로 매우 급변적이던 상황과 8살이라는 정치를 하기에는 너무나도 어린 나이가 악재로 작용하여 제왕학 수업도 제대로 받지 않은 채 즉위하였으나 자신이 평생 황제로 살아야 할 그 운명을 받아들이고 틈틈이 제왕학 수업을 지속하면서 일찍 정치를 깨닫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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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제는 오배를 견제하기 위해 또 다른 보정대신인 색니의 손녀를 [[황후]]로 맞아들이기도 하였다. 그녀가 바로 강희제의 정궁황후이며 첫 번째 황후인 [[효성인황후]](孝誠仁皇后) 혁사리씨다.<ref>장유유, 허유영 역, 황제 배후의 여인, 에버리치홀딩스, 2007년, {{ISBN|89-958251-9-7}}, 348쪽</ref> [[1667년]](강희 6년) 7월 14살이 된 강희제는 조상의 예법에 따라 친정을 시작하였고 성인 의례와 함께 정식 즉위식을 치렀으나, 그 해에 자신을 보호해준 색니가 소극살합에게 강희제를 돌봐 달라는 말을 남기고 죽는다. 소극살합이 권력을 잡으려 하였으나 이에 위기감을 느낀 오배는 소극살합에게 날조된 역모죄를 뒤집어씌워 [[교수형|교수]]시키고 자신이 조정의 전권을 장악하였다.<ref name="바이하이진">바이하이진, 김문주 역, 《여왕의 시대:역사를 움직인 12명의 여왕》,미래의 창, 2008년, {{ISBN|89-5989-090-1}}, 288쪽</ref> 오배는 소극살합을 죽이는 과정에서 이에 반대하는 강희제를 강압하여 결국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강희제는 아직 오배의 세력에 대응할 수 없어 굴복하고 말았다. 오배의 이러한 행동은 분명 군주 기만죄(기군죄)였으나 아직 힘이 약한 강희제는 그를 그냥 내버려 두었다. 다른 보정대신인 알필륭은 오배의 편에 붙었으나 오배의 전횡을 부추기지도 그렇다고 비난하지도 않았다.<ref>둥예쥔, 허유영 역, 강희원전-수신제가, 시아출판사, 2004년, {{ISBN|89-8144-146-4}}, 22쪽</ref>
선황 순치제의 유조를 받은 고명대신 중 한 명인 소극살합을 죽이고도 계속 더 많은 횡포를 일삼는 오배를 보고 강희제는 군사를 이끌고 선수를 치려 했다. 그러나 조모인 효장태황태후가 이를 말리고 사태를 지켜보라 일렀다.<ref name="바이하이진"/><ref>장유유, 허유영 역, 황제 배후의 여인, 에버리치홀딩스, 2007년, {{ISBN|89-958251-9-7}}, 장유유, 허유영 역, 황제 배후의 여인, 에버리치홀딩스, 2007년, {{ISBN|89-958251-9-7}}, 350쪽</ref> 하루는 소극살합을 죽인 오배가 병을 핑계로 두문불출하는데 강희제가 문병을 갔다. 오배는 강희제에게 위문을 받은 뒤 다시 자리에 누우려 할 때, 그의 품 속에서 단도가 발견되었다. 강희제는 만주족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단도를 찬 것은 조상들로부터 내려온 전통이라며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었으나, 분명 오배가 선수를 틈타 자신을 죽이려 한 것을 안 강희제는 치밀하게 오배를 제거하기 위한 작전을 본격적으로 세웠다.<ref name="리정">리정, 이은희 역, 제왕과 재상, 미래의 창, 2006년, {{ISBN|89-5989-049-9}}, 225-227쪽</ref>
강희제는 색니의 아들
=== 삼번의 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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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초원은 [[홍타이지]] 이후 청나라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나, 조공을 올리고 자치권을 인정받았다. 이미 [[1675년]](강희 14년) [[차하르]] 부족이 당시 삼번의 난으로 청나라에 생긴 혼란을 틈타 중원으로 쳐들어왔다. 이에 노한 강희제는 몽골을 [[내몽골]]과 [[외몽골]]로 나누어서 부족 간의 규합을 막으려 하였다.<ref>웨난, 심규호/유소영 역, 《열하의 피서산장 1》, 일빛, 2005년, {{ISBN|89-5645-079-X}}, 27-28쪽</ref>
몽골이 청나라에 복속된 지 수십 년이 지나고, 몽골의 여러 부족 중 일부는 절대 복종하고 일부는 표면적으로나마 청나라에 충성을 바쳤다. 그러나 그중 몽골의 한 부족인 [[오이라트]] 부족에 뿌리를 둔 [[초로스]] 칸가 출신의 [[중가르 칸국|중가르]] 부족의 칸인 [[가르단]]이 세력을 모아 몽골과 티베트를 통일하여 [[라마교|라마]] 제국을 건설할 포부를 품고 청나라에 대항할 조짐을 보였다. 이미 가르단은 [[1677년]](강희 16년) 오이라트 부족을 통합하고 [[1682년]](강희 21년)에는 [[타림 분지]]까지 점령하였다. 그런 다음 이들은 동[[투르키스탄]]을 점령하였고 이제 청나라가 다스리는 [[중원]]을 노렸다.<ref>김후,
[[파일:40 years old Kangxi.jpg|섬네일|
또한 [[1688년]](강희 27년), 준가르는 몽골 초원의 다른 부족인 [[할하]] 부족의 땅을 점령하고 거의 모든 부족민을 죽였다. 살아남은 할하족은 [[고비 사막]]을 넘어 강희제에게 군사적 원조를 요청하였다. 준가르의 군사들이 청나라의 영토를 침략하자, [[1690년]](강희 29년) 7월 강희제는 자신의 이복형이자 순치제의 차남 유친왕 복전(裕親王 福全)과 이복동생이며 순치제의 5남 공친왕 상녕(恭親王 常寧) 등을 대동하고 친히 팔기군을 이끌고 몽골로 원정길에 올랐다.<ref>중국사학회(2005), 중국역사박물관 10, 32쪽</ref> 이것은 명나라의 [[영락제]] 이후 황제가 최초로 친히 고비 사막을 넘어 몽골 원정을 감행한 원정이며 중국 역사상 황제가 군사를 이끌고 나간 마지막 친정이었다. 이 원정에서 강희제는 할하족의 공식적인 합병 서약과 충성 서약을 받았다. 강희제는 몽골의 복속에 매우 만족하여 "옛날의 진은 돌과 흙으로 만리장성을 쌓았지만 짐은 객이객에게 은혜를 배풀어 그보다 더 견고한 성을 쌓았다"고 말했다.<ref>둥예쥔, 허유영 역, 강희원전-수신제가, 시아출판사, 2004년, {{ISBN|89-8144-146-4}}, 221-222쪽</ref>
뒤이어 청군은 준가르군과 [[내몽골]]에서 맞붙었으나 전염병과 계속되는 패배로 사령관이었던 이복 형제들에게 책임을 묻고 군사를 물려 북경으로 환도하였다. 강희제 자신도 전염병에 걸려서 한동안 고생하였다. 그러나 [[1696년]](강희 35년)에 강희제는 8만의 팔기군 군사를 이끌고 몽골로 진입, 차오모도 전투에서 준가르군과 싸워 대승하였다. 패한 가르단은 이듬해인 [[1697년]](강희 36년)에 [[알타이 산맥]] 기슭에서 음독자살하였다.<ref name="중국사학회33">중국사학회(2005), 중국역사박물관 10, 33쪽</ref><ref>둥예쥔, 허유영 역, 강희원전-수신제가, 시아출판사, 2004년, {{ISBN|89-8144-146-4}}, 223쪽</ref>
강희제 치세 후기인 [[1712년]](강희 51년), 강희제는 준가르 부족을 견제하기 위해
준가르군은 여전히 그 세력이 막강하였으나 [[1720년]](강희 59년)에 강희제가 보낸 팔기군의 대대적인 원정에 준가르군은 결국 패퇴하였고 티베트에 원정 온 체왕 아랍단은 몽골로 돌아가 은둔하였다. 그 이듬해인 [[1721년]](강희 60년)에 청군은 [[켈장 갸초]]를 모시고 와서 제7대 달라이 라마로 만들고 티베트를 청나라의 영토에 정식 편입시켜 티베트는 안정되었다.<ref>웨난, 심규호/유소영 역, 《열하의 피서산장 1》, 일빛, 2005년, {{ISBN|89-5645-079-X}}, 156쪽</ref> 하지만, 준가르 세력은 청군의 티베트 원정 이후 결정타를 맞았으나 완전히 멸하지는 않았다. 강희제의 손자인 건륭제 때에야 [[
=== 팔기군 개편과 군사 정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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