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의 역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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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역사}}
이 문서는 [[구석기 시대]]부터 현재까지 이어온 '''[[베트남]]의 역사'''에 대해 서술한다. [[베트남의 선사시대]]에는 [[동남아시아]]의 여러 석기문화가 영향을 주고 받았다. 오늘날 [[이리안자야]]지역에서 출토되는 석기 유물과 동일한 양식의 유물들이 베트남에서도 발견된다.<ref name="양승윤">양승윤 외, 《인도네시아 사회와 문화》,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1997년, {{ISBN|8974641232}}, 27-28쪽</ref>
 
베트남의 건국설화에 보면 중국 신농씨의 후손인 바다 신의 아들 락롱꿘(Lạc Long Quân, 雒龍君 용(龍)의 우두머리)과 산신의 딸인 어우꺼가 결혼을 해서 어우꺼는 100개의 알을 낳았고, 그 알에서 태어난 100명의 자식 가운데 50명은 아버지를 따라 바다로, 50명은 어머니를 따라 산으로 갔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많은 베트남 부족들의 선조가 태어났는데, 이 중 어머니를 따라간 큰 아들이 나라를 세우고 베트남의 역사가 시작되는데, 이것은 이후 베트남의 모계사회적 특성이 강한 것을 설명해 준다고 한다. 또 우리의 고조선과 비슷한 시기에 첫 국가가 건국되고, 기원전 11년에는 한나라에게 복속되었다. 938년에 독립을 이루지만 1406년에 다시 명나라에 복속되었다가 1428년, 레 러이와 응웬 짜이가 다시 명나라를 몰아내고 레 왕조를 세운 후, 베트남 왕조 중 가장 오랫동안 집권하면서 정부 체제를 개혁하고, 유교를 정비하는 등 베트남만의 전통 문화를 만들어 내고, 남부까지 영토를 확장하면서 베트남의 황금기를 열었다.
 
[[기원전 2919년]] 베트남 최초의 국가인 [[홍방 왕조]]가 세워졌으며 [[기원전 257년]] [[툭판 왕조]]로의 교체가 일어났으나, 이어 중국 세력이 밀려 들어와 [[기원전 111년]]에는 [[한나라]]에게 복속되었다. 이로부터 10세기까지 간헐적인 독립 운동을 제외하고는 중국 세력의 통치가 지속되었다.<ref>[http://cms.pufs.ac.kr/vietnam/html/02/sub01_03.aspx 베트남의 역사] {{웨이백|url=http://cms.pufs.ac.kr/vietnam/html/02/sub01_03.aspx# |date=20160305032049 }}, 부산외국어대학교</ref>
 
[[938년]] [[박당 전투 (938년)|박당 전투]]에서 [[응오 왕조]]의 시조인 [[오권|응오꾸옌]]({{vie|v=Ngô Quyền|hn=吳權}})이 [[오대 십국 시대|오대 십국]]의 하나인 [[남한 (십국)|남한]]과 싸워 이겨 독립한 이후<ref>{{웹 인용|url=http://www.informatik.uni-leipzig.de/~duc/sach/dvsktt/dvsktt05.html |제목=Kỷ Thuộc Tùy Đường|언어=vi}}</ref> , 베트남 왕조의 통치가 이어져 15세기의 [[레 왕조]]에서 그 절정에 달한다. [[1802년]], [[프랑스]]의 세력에 힘입어 [[응우옌 왕조]]가 건국되었으나 이내 프랑스의 식민정책에 의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일부가 되었다.
 
프랑스는 [[제2차 세계 대전]] 때까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한 국가로 베트남을 식민지로서 통치하였다. 그러나 프랑스는 종전 후에 다시 군대를 파견하였고 이는 [[호찌민]]이 지도하는 민족 세력인 [[비엣민]]과 남북으로 대립하게 된다. 베트남은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으로 분단되었고 [[1964년]]부터 [[1975년]]까지 베트남은 [[미국]]과 [[베트남 전쟁]]을 치려야만 했다. 이후 [[마오쩌둥주의]] 노선을 표방하는 [[캄보디아]]의 [[크메르 루즈]]와 전쟁을 치렀고 [[중화인민공화국]]과도 국경분쟁으로 [[중국-베트남 전쟁]]을 치렀다. 1980년대 이후 [[도이 머이]] 정책으로 서방 세계에 문호를 개방하였다.
 
== 신화 선사 시대 ==
베트남에는 [[구석기 시대]]이래 [[인류]]가 살아왔으며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인도네시아 제도]]에 이르는 지역에 산재하고 있는 석기 문화 유적이 많이 발굴되고 있다.<ref name="양승윤" /> 베트남의 건국신화인 락롱꿘, 어우꺼 신화는 약 4,000년 전 락롱꾸언({{vie|v=Lạc Long Quân|hn=貉龍君|ex=용(龍)의 우두머리}})과 어우꺼({{llang|vi|Âu Cơ}})가 결혼하여 많은 베트남 부족들의 선조가 태어났다고 말하고 있다.<ref name="배양수">배양수, [http://vietnamkorea.org/bbs/data/file/menu8/614b38f3_hoanghae.pdf 문학작품을 통해 본 베트남]{{깨진 링크|url=http://vietnamkorea.org/bbs/data/file/menu8/614b38f3_hoanghae.pdf }}, 《황해문화 2002년 가을호》 (통권36호)</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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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의 고고학적 발견에 따르면, [[호모 에렉투스]]인 [[랑선 인]]이 북부 베트남 지역에서 발견되어 약 50만년 전인 [[구석기 시대]]부터 인류가 거주하여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ref>{{웹 인용 |url=http://www.uiowa.edu/~bioanth/PNAS%20Giganto-Vietnam.pdf |제목=Dated co-occurrence of Homo erectus and Gigantopithecus from Tham Khuyen Cave, Vietnam |확인날짜=2010년 4월 17일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80731123959/http://www.uiowa.edu/~bioanth/PNAS%20Giganto-Vietnam.pdf |보존날짜=2008년 7월 31일 |깨진링크=예 }}</ref> [[호모 사피엔스]]의 화석으로는 대략 25만년에서 14만년 전에 살았던 사람의 치아 화석이 탐엄(Tham Om)에서 발견되었고, 항훔에서는 약 14만년 전에서 8만년 전 사이의 치아 화석이 발견되었다.<ref>Kha and Bao, 1967; Kha, 1975; Kha, 1976; Long et al., 1977; Cuong, 1985; Ciochon and Olsen, 1986; & Olsen and Ciochon, 1990</ref>
 
기원전 28,000년부터 기원전 8,000년 사이 북부 베트남에는 [[선비 문화]]({{llang|vi|Văn hóa Sơn Vi}}, 文化山韦)로 불리는 [[중석기 시대]]에서 [[신석기 시대]]에 걸쳐 이루어진 문화가 존재했고<ref>Archaeology and culture in Southeast Asia: unraveling the Nusantao Page 25 Wilhelm G. Solheim, David Bulbeck, Ambika Flavel - 2006 We know from some later Hoabinhian sites, which developed out of the Son Vi Culture, that coastal adaptation was one of the ecological niches occupied by the Hoabinhian people.</ref>, 이 외에도 기원전 3210,000년부터 기원전 2000년 사이에 오늘날 [[호아빈 성]] 유역에 있었던 [[호아빈 문화]]({{llang|vi|Văn hóa Hòa Bình}}, 文化和平)<ref>Kipfer, Barbara Ann (2000). "Hoabinhian". Encyclopedic Dictionary of Archaeology. Springer. p. 238. {{ISBN|0-306-46158-7}}. Retrieved 2008-05-26.</ref> 와 [[랑선 성]]의 [[박선 문화]]({{llang|vi|Văn hóa Bắc Sơn}}, 文化北山)<ref>Rasmi Shoocongdej Forager mobility organization in seasonal tropical environments: 1996 "According to Ha Van Tan (1976, 1988, n.d.), the last stage of the "Hoabinhian" is the Bac Son culture, which is followed by the Da But culture. In general, the Bac Son is characterized by pebble tools, edge-ground axes and earthenware pottery."</ref> 가 있다.
 
== 청동기 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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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트남의 독립과 분단 ==
[[파일:HD-SN-99-02042.JPEG|섬네일|250px|프랑스군과 간첩 혐의자(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중일전쟁]](1937년~1945년)이 격화되면서, [[일본 육군]]은 베트남으로부터 [[중국 국민당|국민당]] 정부로의 물자수송로를 차단하기 위하여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북부에 진주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한편, [[제2차 세계 대전]]의 유럽 전선에서는 1940년에 [[프랑스]]가 [[독일]]에게 무릎을 꿇었고, [[나치 독일]] 점령하의 프랑스, [[비시 정권]]이 임명한 장 드꾸(Jean Decoux) 장군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정부는 나치 독일의 동맹국인 일본과 협력하여 일본군의 베트남 주둔을 허용하는 조약에 서명하여 <ref name="론리"/>{{Rp|19}} 1940년에 일본군은 베트남 북부에 진출하고, 1941년에는 베트남 남부에도 진주하였다. 일본으로서는 버어마, 말레이 반도, 인도에 있던 [[영국령 인도차이나]]에 대한 군사 행동을 위하여 베트남의 천연 자원이 꼭 필요하였다. 이러한 이 지역의 전략적 입지와 천연 자원을 이용하고자 했던 일본은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 프랑스 정부에게 일상적인 국정 운영을 맡겼다. 일본 점령에 항거하는 활동을 펼친 유일한 단체는 [[베트남 독립동맹(회)]]([[비엣민 또는 베트민, 월맹(越盟)]])이었다. 1941년에 [[비엣민]]이 호찌민의 지도 아래 통합되었다. 호찌민은 프랑스와 일본의 지배로부터 독립을 추구하였다.
 
일본군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정부와 공존은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5년 3월까지만 지속되었다. [[비엣민]]의 공격이 계속되고 드쿠 정부가 일본에 맞설 계획을 세우던 1945년 3월, 프랑스의 비시 정권이 몰락하자, 일본은 프랑스와의 공동통치 체제를 전복시키기 위해 반프랑스 쿠데타를 일으켜 프랑스의 군대 및 관리 모두를 감금했던 것이다. 즉, 일본군이 [[명호작전]]을 실행하여 프랑스군을 제압하여 프랑스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한 것이다. 일본은 [[대동아공영권]]의 기치를 내세우고, 아예 드쿠 정부로부터 베트남을 독립시켜 자신의 꼭두각시 정부로 만들려고 했고, [[바오다이]] 황제는 프랑스와 적대하는 일본군에 협력했다. 이에 따라 1945년 3월 일본의 지원을 받는 일본의 영향력하에 있고 명목상에 불과한 꼭두각시 정부인 [[베트남 제국]]이 수립되고, [[바오다이]]가 황제의 자리에 앉았다. 당시의 일본 군인 중에는 일본에 망명 중인 기외후(畿外侯)를 베트남 제국 황제를 세우려고 했지만, 남방군(南方軍)이나 제38군은 베트남의 새로운 정권에게 불간섭의 방침으로 군정의 실시나, 친일 정권 건설을 배제하는 걸로 결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바오다이는 독립한 베트남의 최초의 원수의 지위를 손에 넣게 된 것이었다. 그는 안남과 통킹을 프랑스 보호구역으로 내준 1883년 조약을 폐지했다. 이 때 일본에 의한 미곡수탈과 산업용 작물 생산을 강요한 정책, 홍수, 제방 파손으로 인해 심각한 기근이 발생했고, 그 결과 북부 베트남 1천만 인구 중 2백만 명이 기아로 사망했다.<ref name="론리"/>{{Rp|20}}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했고, 베트남 제국도 1945년 8월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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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refs=
<ref name="론리">{{서적 인용 |저자= 메이슨 플로랜스, 버지니아 젤러스 |편집자= |기타= 책임감수 최하나|제목=론리플래닛:베트남 |초판발행일자날짜= 2003-11-17|판= 초판|출판사= 인그라픽스 |출판위치= 서울}}</ref>
}}
{{각주|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