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티파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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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차 인티파다 ==
=== 배경 ===
팔레스타인 봉기가 발생하기 몇 주 전에 가자 지구에서 한 유대인이 팔레스타인 소녀를 총으로 살해했다. 살인자는 보석금을 내고 풀려났고, [[1989년]] 9월 무죄판결이 내려졌다. 그가 석방되는 날 이스라엘 군인들이 아이들을 향해 발포해 다섯 명이 부상당했다. 이 사건에 대한 처리결과도 마찬가지였으며, 서방에는 이러한 사실들이 알려지지 않았다.<ref name="gj">{{서적 인용 |편집자= 유달승 |제목= 예루살렘:분쟁의 도시에서 평화의 도시로 |초판발행일자날짜= 2010-101-30 |판= |출판사= 국제지역연구 제13권 제4호 |쪽= 366 }}</ref>
 
[[1987년]] 12월 8일 [[가자 지구]]의 난민캠프에 사는 4명의 청년이 이스라엘의 군용트럭에 깔려 죽은 사건을 계기로 봉기가 확대, 순식간에 이스라엘 점령하의 [[요르단 강 서안 지구]], [[가자 지구]]를 석권, 장기화하는 이스라엘군의 주둔에 저항하는 인티파다로 발전했다.<ref name="mj">{{서적 인용 |편집자= 편집실 |제목= 중동의 민족문제 |초판발행일자날짜= 2001-303 |판= |출판사= 민족연구 제10호 |쪽= 31 }}</ref>
 
=== 영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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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따라 [[2000년]] 9월 28일 평화협상을 반대하는 [[아리엘 샤론]] 전 국방장관은 동예루살렘 이슬람교 성지인 알 악사 모스크를 무장 호위병을 대동, 방문했다. 이를 본 팔레스타인 민중이 일제히 봉기했으며, 요르단 강 서안 지구, 가자 지구의 주민과 팔레스타인 난민, 이스라엘에 사는 아랍인까지 합세하여 아랍과 이슬람 세계로 파급되었다.
 
더욱이 팔레스타인인들의 시위에 기름을 부은 것은, [[2000년]] 9월 30일 가자지구의 내차림 정착촌 부근에서 아버지와 외출하였던 12살짜리 어린이인 무함마드 라미 알 두라 소년이 이스라엘군의 총격에 희생된 사건이다. 시위 군중과 이스라엘 보안군 사이에 갇힌 아버지와 아들이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모습이 TV를 통하여 전 세계에 방영되었다. 아랍인과 전 세계는 이스라엘에 분노하였다.<ref name="kr">{{서적 인용 |편집자= 홍순남 |제목= 중동평화와 팔레스타인 민족봉기 |초판발행일자날짜= 2003-808 |판= |출판사= 한국중동학회 |쪽= 96 }}</ref>
 
=== 영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