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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화교 사회가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이며 임오군란으로 군인들이 [[인천]]에 있을 때 그들의 식사와 허드랫일들을 도우기 위해 파견된 청나라 소작농과 노비 등 하층민 중국인 남성 여성들이 인천에 건너왔고 생업을 위해 상업을 하였다. 군인들은 몇 년지나고 모두 돌아갔지만 이들은 청나라의 보호를 받지 못하여 돌아가지 못하고 인천에 살기 시작했다. 청나라는 서양 열강들에 반식민지화되면서 식민지와 조계지에 대한 중요성을 알게 되었고 임오군란을 핑계로 조선을 속국으로 명시하고 서양 열강들처럼 인천에 조계지를 설치하였고 중국 화교들은 청나라의 지령으로 조선의 서민들을 수탈의 대상으로 삼으며 경제적 수탈을 행했다. 일제강점기때에도 화교에 의한 경제적 수탈에 의해 조선에서 약 1억엔이라는 자본 유출이 일어났고 이로 인해 조선인들과 일본인들에 의한 만보산 학살 등도 일어났으며 조선인들이 화교들의 후안무치에 폭동을 일으켜 화교 배척 학살 사건이 일어났다.. 20세기 초반부터 [[요식업]]에 종사하는 화교가 늘어났다. 대부분 [[중국 대륙]]에서 건너 왔지만, 도중에 성립된 [[중화인민공화국]]으로 인해, 국적은 종전의 [[중화민국]]으로 되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화교가 경제적인 실권을 쥐는 것을 지속적으로 견제해 왔는데 [[1961년]] 외국인토지소유금지법으로 화교들의 부동산 소유를 제한했고 [[1963년]] [[화폐개혁]] 등으로 돈을 끌어냈다.
우리나라의 화교의 기원은 1882년 임오군란에서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있다. 그 당시 중국인 오장경(吳長慶)이 임오군란을 수습하기 위해 청국 군사 4000명을 데리고 우리나라에 들어왔는데 이들의 군수 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따라 들어온 청나라 상인들로부터 화교의 정착이 시작되었다.<ref>http://www.d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75107</ref> 이어 1884년 인천 제물포항 주변에 청국조계지가 설정되면서 본격적으로 화교가 들어와 전국적으로 확산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ref>http://news.donga.com/3/03/20141208/68426101/1</ref> 그러나 화교 사회는 우리 정부의 각종 제도적 제한과 차별 대우 아래 위축되어 갔다.<ref>http://www.ichinatown.or.kr/introduction/overseas_chinese/drift.asp</ref><ref>http://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2729365</ref>
10만명에 가깝던 화교는 대한민국 건국 초기부터 70년대까지 화교 경제 진출을 막기 위해 각종 제한을 걸어 대만,홍콩,미국 등으로 이주해 한때 2만명까지 줄었다. 그 이후 1998년 외국인에게 호의적인 정책이 시행되면서 2001년도에는 22,917명으로 점차 안정적이 되었다. 1990-2000년대 이후 다시 돌아오고 있어 2010년대 귀화자를 포함한 화교 인구는 5만명 정도이다. 2010년 기준으로 화교 숫자는 21,490명 수준이다. 이중에 13,316명이 영주권비자(F-5)이며 거주비자(F-2)는 6,569명이다. 다만 이들은 자발적인 집계이고 실제 숫자는 현재 화교 3세까지 합산하면 5만명 가량이며 모계가 화교인 혼혈들까지 합하면 10만명 가량이다.
<ref>http://news.mk.co.kr/newsRead.php?no=990922&year=2014</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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