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주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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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설 ==
17세기 후반에 시작되어 18세기에 장미빛으로 개화(開花)된 계몽 운동은 정치나 경제·사회·종교·사상 등에 있어서의 전근대적인 어둠에 이성의 빛을 비추었다. 전근대적인 어둠이란 전근대적이며 봉건적·종교적인 권위·특권·부정·압제(壓制)·인습(因習)·전통·편견·미신(迷信) 등이다. 계몽(어둠에 빛을 비추어 밝고 현명하게 하는 일)의 사상가는, 이성을 척도로 하여 이 어둠을 비판하고 심판했다. 거기서는 종교도 자연관(自然觀)도, 사회도 국가도, 모든 것이 용서 없이 비판되었다. 이제까지의 사회 형태라든지 전통적인 사고방식이 불리한 것으로서 쓰레기통에 던져졌다. 이성에 의해서 생각해 낸 것이 모든 인간 행위나 사회 형태의 기준으로서 요구되었다. 이성에 입각한 영원한 진리, 영원한 정의가 종래의 암우(暗愚)와 대치되어야 했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일체가 신의 권위에 입각한 [[중세]](中世)에 대해서, 모든 것을 인간의 두뇌의 사고(理性)에 입각하게 한다는 역전이었다. 이성적 정신의 열광이 세계를 뒤흔들었던 것이다.
 
먼저 정치에 관해서는 계약론(契約論)이 주장되었다. 인간은 침범되어서는 안 되는 [[자연권]](自然權)을 가지고 있다. 자연에 입각해서 자유이며, 평등이다. 생존과 재산 소유의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사람은 계약에 의해 국가를 만들었다. 따라서 우리는 기본적인 권리가 침해당했을 경우, 비판하고 저항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 견지에서 계몽사상가들은 왕권이나 낡은 제도나 압제나 불평등에 대해서 날카로운 비판과 공격을 가했다. 그리하여 그것에 의해서 근대적인 여러 혁명에 이론적 지주(支柱)를 제공했다. 그들 계몽사상가들은, 사람은 노동에 의해서 비로소 재산을 자기 것으로 할 수 있다고 하는 주장을 전개했다. 이로써 한편에서는 전근대적 착취를 비난하고, 또 한편에서는 흥륭(興隆)하는 자본주의적 사유(私有)를 옹호했다.
 
종교에 있어서는 이성의 입장에서 [[이신론]](理神論), 자연종교, 이성종교, 나아가 [[무신론]](無神論) 등이 나타나서 [[신앙의 자유]], 종교적 관용(寬容), 교권으로부터의 해방 등이 요구되었다. 도덕에 관해서는 한편으로 순수한 이성에 따르는 것을 선(善)이라고 보는 이성주의가, 또 한편으로는 인간적인 행복을 제1의로 하는 행복론(幸福論)이 주장되었다. 또한 인식론에서는 감각적 소여(所與)를 오성(悟性) 내지 자아가 종합하는 데에서 진리가 성립한다는 감성(感性)·오성론, 감각적 경험을 중시하는 [[경험주의]] 내지 [[감각론]], 나아가서 [[유물론]] 등이 나타났다.
 
이와 같은 계몽사상을 급속도로 발전해 온 자본주의 내지 부르주아 시민의식과 과학 내지 기술의 진보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계몽 운동은 자본주의가 가장 발전한 영국에서 시작되어(로크, 흄, 스미스 등), 프랑스에 가서(몽테스키외, 볼테르, 루소, 백과전서파 등), 독일로 파급되어 갔다(라이프니츠, 볼프, 칸트 등). 영국이나 프랑스에서의 계몽운동은 하층(下層)으로부터 상층으로의 상승(上昇)의 반영이었다. 따라서 근대혁명의 이론적 지주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근대화에서 뒤떨어진 독일에서는 이와 같은 하층에서의 상승이 결여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계몽사상은 머리 속에서만의 자유나 평등이나 인권 존중에 그쳐야 했다. 독일의 계몽사상을 계몽된 전제군주(專制君主)에 의한 '위에서부터의 개혁'에 독일의 근대화를 기대했던 것이다. 이성에 입각한 모든 사람의 자유나 평등이나 인격 존중이나 사회권 보장 등은, 실질적으로는 발흥(勃興)하는 [[부르주아지|부르주아]] 시민계급을 위한 바로 그것이었다. 여기에 계몽사상의 한계가 있다. 계몽사상은 후에 자본주의의 모순이 나타남과 동시에 스스로의 무력(無力)에 봉착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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