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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이력 = [[손원일]] [[대한민국의 국방부 장관|대한민국 국방부 장관 예하 특별행정보좌관 직무대리]]([[1954년]] [[11월 22일]] ~ [[1954년]] [[12월 16일]])
}}
'''김창룡'''(金昌龍, [[1920년]] [[7월 18일]]<ref>{{웹 인용 |url=http://www.ihs21.org/sub4-html/7pjs.htm# |제목=보관 된 사본 |확인날짜=2006-12-24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71007150810/http://www.ihs21.org/sub4-html/7pjs.htm# |보존날짜=2007-10-07 |깨진링크=예 }}</ref> ~ [[1956년]] [[1월 30일]])은 [[일본군]]과 [[대한민국 국군]]에서 복무를 한 [[대한민국]]의 [[군인]]이다. 호(號)는 산남(山南)이다. 헌병 출신으로 일제하 항일조직을 무너뜨리고 독립군을 체포하고 고문한 것으로 유명하고유명하다. 해방 전 2년 동안 적발한 항일조직은 50여개에 달한다. 해방 후에는 이승만 세력에 가담해 반공 투사로 변신했다. 그는 1952년 부산 정치파동의 계기가 된 ‘부산 금정산 공비 위장사건’을 꾸미는 등 용공조작을 일삼았다. 그가 백범 김구 선생의 암살을 주도했다는 증거 역시 다수 발견됐다. 그러나 김창룡은 국립대전현충원 장군1묘역 69호에 묻혀 있다. 친일인명사전에 올랐다.
 
== 주요 이력 ==
그 뒤 김창룡은 헌병교습소의 훈련을 마치고 관동군 헌병이 되었으며, 소련-만주 국경에 파견되어 소련 공산당과 중국 공산당의 움직임을 탐지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 뒤 일본 사복헌병이 되어, 사복차림으로 일본의 정탐원으로 활약했다.
 
[[1943년]] [[상하이]]에서 파견되어 활동 중이던 [[중국공산당]]의 [[왕근례]]를 체포하였고, 이로 인해 왕근례가 이끌던 비밀 조직이 일망타진되는 성과를 올렸다. 김창룡은 공로를 인정받아 오장(伍長)(국군의 하사)으로 진급하였으며 이후로도 많은 비밀 조직을 적발하는 공을 세웠다. 해방 전 2년 동안 적발한 항일조직은 50여개에 달한다.
 
==== 미군정 ====
군내 좌익숙청을 기치로한 숙군사업의 이면에는 국군을 구성하는 각 파벌들의 생존과 주도권 투쟁의 성격을 포함하였고, 만주군, 일본군, 광복군 모든 파벌을 포괄하는 경력을 지닌 박정희의 구명은 손쉽게 각파벌에게 양해될 수 있는 사안이었다.</ref>
 
1948년 12월에서 1949년 1월까지 국방부 장관([[이범석 (1900년)|이범석]]) 예하 군사정보행정특보보좌관 직을 잠시 지낸 그는 [[1949년]] 1월 방첩대장으로 부임하였고, 그해 [[6월]] [[한국독립당]] 당수 [[김구]]가 암살되었다. 이때 암살자가 방첩대 소속 현역 육군포병 중위 [[안두희]]였으므로, 그의 배후로 의심받았다의심받는 등 백범 김구 선생의 암살을 주도했다는 증거 역시 다수 발견됐다.
 
==== 한국 전쟁 참전 ====
 
==== 제1공화국 이후 ====
6·25전쟁중 서울수복 직후에도 군·검찰·경찰 합동수사본부장이 되어 잔류 시민들의 부역자 여부를 색출, 탐문, 조사했다. 이 과정에서 좌익 부역자들을 엄히 다루어 원성을 샀다. 특무대장으로 있으면서 '동해안 반란사건', '국가원수 암살미수사건' 등 각종 정치사건을 조작하여 정치에 깊이 관여하고 [[이승만]] 대통령의 반대파를 축출하였다. 1952년 부산 정치파동의 계기가 된 ‘부산 금정산 공비 위장사건’을 꾸미는 등 용공조작을 일삼았다.
 
[[1953년]] 국제간첩 [[정국은]]을 적발한 사건도 [[이범석 (1900년)|이범석]]의 족청계 숙청을 위해 조작 또는 과장된 사건이라는 설이 있었다. 그밖에 동해안 1군단이 연루된 동해안 반란사건, [[1955년]] 한국 전쟁 때 북으로 간 [[조소앙]]이 이승만 암살 지령을 내렸다는 개천절 이승만 암살 음모 사건도 마찬가지이다.<ref name="idomin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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