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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국경 지대인 [[함경북도]] [[경성군]]에서 1923년 8월 4일 태어났다. 그는 간도특설대 1기생으로 1938년부터 일제가 패망하던 1945년까지 [[간도특설대]]에서 근무하였다.<ref>[http://blog.daum.net/yeodonhual/17447397 이용의 진술조서]</ref> 그는[[간도특설대]]는 간도특설대에만주국 대해북부에 제대로있던 증언한[[사회주의]] 유일한계열 사람이었다.민족 일제가해방세력인 만주에서[[팔로군]], “조선인 항일세력은 조선인의 손으로 잡는다”는 목표 아래 친일파를 앞세워 만든 조선인 부대로[[동북항일연군]], 항일무장세력을[[조선의용대]]와 토벌하는만주 역할을북서부에 하였다.잔존해 그는있던 [[대한독립군단]]을 부대토벌하기 1기생으로위한 일제가특수 패망할목적을 때까지 복무했다.독립군 1938년토벌 지원 당시 그의 나이 17세부대였다. 그는간도특설대가 “군인이살해한 되고항일무장세력과 싶었는데,민간인은 조선인172명에 부대라고 하기에 지원했다”고 말했다달한다. 그 시절의 기억을 숨기지 않았다. “만주에서 독립정신과 민족의식을 함양하며 무예를 연마했다”(간도특설대 출신으로 제2대 해병대 사령관을 지낸 김석범 회고강간·약탈·1987년고문을 ‘만주국군지’)는당한 따위의이들도 모순된 얘기도 하지 않았다적잖다. 그저 담담하게 그 시절을 고백했다. 간도특설대는 열하로 옮기기 전 백두산 밑 안투현에서 토벌을 했다. 토벌 대상은 김일성 부대였다고 밝혔다. 다만 재중동포(조선족) 사회에서 간도특설대의 만행으로 전해지는 부녀자 성폭행,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는 부인했다. “군기가 엄한 부대로, 민폐는커녕 오히려 도와준 일이 많다”고 주장했다.<ref>{{저널 인용
|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469&aid=0000409460
|제목=일본군 장교 되어 독립군 토벌했는데, 독립유공자 묘역 옆에 잠들다니…
|출판사 =한국일보
|날짜=2019.07.30}}</ref>
 
그는 간도특설대 출신으로서 간도특설대에 대해 제대로 증언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일제가 만주에서 “조선인 항일세력은 조선인의 손으로 잡는다”는 목표 아래 친일파를 앞세워 만든 조선인 부대로, 항일무장세력을 토벌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는 이 부대 1기생으로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복무했다. 1938년 지원 당시 그의 나이 17세. 그는 “군인이 되고 싶었는데, 조선인 부대라고 하기에 지원했다”고 말했다. 그 시절의 기억을 숨기지 않았다. “만주에서 독립정신과 민족의식을 함양하며 무예를 연마했다”(간도특설대 출신으로 제2대 해병대 사령관을 지낸 김석범 회고·1987년 ‘만주국군지’)는 따위의 모순된 얘기도 하지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그 시절을 고백했다. 간도특설대는 열하로 옮기기 전 백두산 밑 안투현에서 토벌을 했다. 토벌 대상은 김일성 부대였다고 밝혔다. 다만 재중동포(조선족) 사회에서 간도특설대의 만행으로 전해지는 부녀자 성폭행,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는 부인했다. “군기가 엄한 부대로, 민폐는커녕 오히려 도와준 일이 많다”고 주장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간도특설대 근무설에 대해서는 “아니다. 그분은 만주 보병 8퇀(團)”이라고 했다. 박 전 대통령의 비밀광복군 활동설에 대해서도 “그건 거짓말”이라고 말했다. 박정희·신현준이 광복군 김학규 장군에게서 “적당한 시기에 일본군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고 1945년 7월에 베이징에서 다시 철석부대로 돌아오는 등 비밀광복군이었다는 얘기는 거짓말이라고 증언했다. <ref>{{저널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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