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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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김일성]]의 명령 하에, 대한민국이 공격해 왔으므로 부득이 반격한다는 허위 선전을 하면서, 소비에트 연방에서 지원한 전차를 앞세운 [[조선인민군]]이 1950년 6월 25일 오전 4시, 38도선과 동해안 연선(沿線) 등 11개소에서 경계를 넘어 대한민국을 기습 남침하였다.<ref>《[[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현대 사회의 발달/시련과 민주주의의 발전/6·25전쟁#전쟁 발발 직전의 정황|전쟁 발발 직전의 정황]]〉 “이러한 상황 하에서 북한의 김일성은 ‘대한민국이 공격해 왔으므로 부득이 반격한다’는 허위 선전을 하면서 6월 25일 새벽을 기해 침략을 개시하였다.”</ref> 대한민국은 수적으로 열세인데다 장비도 부족했다. 오전 9시경에는 개성방어선을 격파하고 당일 오전에 [[동두천시|동두천]]과 [[포천시|포천]]을 함락시켰다. 26일 오후에 [[의정부시|의정부]]를, 27일 정오에는 이미 [[서울특별시|서울]] [[도봉구]]의 창동방어선을 넘었다. 창동방어선이 뚫린 [[대한민국 국군]]은 미아리방어선을 구축하였으나 조선인민군의 전차에 의해 붕괴되었다. 28일 새벽에는 서울 시내가 점령되고, 오전 2시 30분에 폭파를 맡은 장교 세 사람에 의해 한강 대교가 폭파되었다. 미국 공군 항공기가 “당시 미 공군이 사용하던 항공기 투하용 ‘AN-M64’ 미제 폭탄”을 [[한강 대교]]와 [[한강 철교]]에 투하했다.<ref>{{뉴스 인용|제목=한강 철교 수중에서 6·25때 사용한 불발탄 인양|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POD&mid=sec&sid1=001&oid=001&aid=0008046055&sid2=140&isYeonhapFlash=Y|날짜=2015-12-11}}</ref>
 
북한의 남침은 때마침 냉전으로 긴장되어 있는 전 세계에 미친 바, 파문은 참으로 전에 없던 것이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본국과 연락이 두절된 주미 한국대사 겸 UN 한국 대표 [[장면]]은 때를 놓치지 않고서 국난을 타개하는 중책을 짊어지고 비장한 결의로 6월 24일 당일(미국은 한국보다 하루 늦음) 우선 미 국무성과 철야 협의한 결과 한국문제를 익일 UN안보이사회에 긴급제소하여 25일과 27일의 결의로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즉시 38선 이북으로 철퇴할 것과 회원 국가는 이 침략자를 원조하지 말뿐 아니라 이를 격퇴시키는데 협력할 것을 결의하였다. 사태를 중시한 미국 대통령 [[해리 S. 트루먼]]은 27일 미해공군에 출동을 명령하고 다시 30일에는 미지상군의 한국 출동을 명령함과 동시에 한국 전 해안의 해상 봉쇄를 명하였다. 그 사이, 6월 28일 [[서울 특별시|서울]]은 [[조선인민군]]에게 함락당하였으나 [[장면]]은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방송을 통해 유엔 결의 사항 등을 본국에 방송하였다. 이어 7월7일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유엔군이 조직되었고 8일에는 유엔 결의에 의한 유엔 깃발이 처음으로 전장에 나타나게 되었다.<ref>{{뉴스 인용|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508190032920200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5-08-19&officeId=00032&pageNo=2&printNo=2977&publishType=00020|제목 = 光復十年의 발자취(19): 六 · 二五事變|날짜 = 1955-08-19|출판사 = 경향신문|인용문 = <!-- 이와 반면에 북한괴뢰는 치밀한 계획하에 남침을 기도하고 드디어 1950년 6월 25일 未明 괴로군을 북위 38도선 및 동해안 沿線 11개소로부터 대거 대한민국에 침공을 개시하였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감행된 이 불법 공격은 蘇製電車重砲등을 주력으로 하는 본격적인 것으로서 수적 열세와 장비 부족으로 38선 수비가 붕괴되어 26일 하오 8시에는 이미 서울로 통하는 북방의 관문인 의정부를 철수하였으며 개전 제4일째인 28일 새벽에는 서울이 적의 수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 六 · 二五 사변은 청천벽력으로서 때마침 냉전으로 긴장되어 있는 전 세계에 미친 바 파문은 참으로 前無의 것이었다. 사변이 발발하자 본국과 연락이 두절된 당시의 주미대사 겸 UN 한국 대표이던 장면 박사는 때를 놓치지 않고서 ... 국난을 타개하는 중책을 짊어지고 비장한 결의로 6월 24일 당일(미국은 한국보다 하루 늦음) 우선 미국무성과 철야 협의한 결과 한국문제를 익일 UN 안보 이사회에 긴급 제소하여 25일과 27일의 결의로 북한괴뢰 집단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즉시 38선 이북으로 철퇴할 것과 회원 국가는 이 침략자를 원조하지 말뿐 아니라 이를 격퇴시키는데 협력할 것을 결의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사태를 중시한 당시의 미대통령 「트루만」은 27일 미해공군에 출동을 명령하고 다시 30일에는 미지상군의 한국출동을 명령함과 동시에 한국 전 해안의 해상 봉쇄를 명하였다. 이어 7월 7일 맥아더 원수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國聯 연합군이 조직되었고 8일에는 국련결의에 의한 國聯旗가 처음으로 전장에 나타나게 되었다. --> }}</ref> 7월 14일에는 [[대한민국 국군]]의 지휘권이 미군에게 넘어갔다. [[윌리엄 F. 딘]] 소장이 행방불명이 된 것으로 유명한 [[대전 전투]](7월 20일)를 비롯한 전쟁 초기에 있어서 미국 제24사단과 국군은, 압도적인 병력과 장비를 갖춘 북한군의 작전에 대항하여 지연 작전으로써 후방의 한 · 미군의 증원 전개를 위한 귀중한 시간을 얻었던 것이다. 한편 대전을 넘어선 북한군은 진로를 세 방면([[호남]], [[경북]] 왜관([[낙동강]]), [[영천]] 및 [[포항]])으로 침공을 계속하였다. 북한군은 호남 평야를 휩쓸고서 남해안 연안으로 침입하는 한편 경북 북부 전선과 동해안 전선과 호응하여 세 방면으로부터 부산-대구의 미군 보급선을 절단하여 한미 양군을 바다로 몰아넣으려는 작전을 강행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북한군의 공세에 밀린 [[대한민국 정부]]는 [[대전 광역시|대전]]과 [[대구 광역시|대구]]를 거쳐 [[부산 광역시|부산]]까지 이전하였다. 한 · 미 연합군은 낙동강을 최전선으로 동해안의 포항으로부터 북부의 왜관 남부 해안의 마산을 연락하는 워커 라인(부산 반월형 진지)를 구축하고 최후의 결전을 전개하였다.<ref>{{뉴스 인용|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508190032920200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5-08-19&officeId=00032&pageNo=2&printNo=2977&publishType=00020|제목 = 光復十年의 발자취(19): 六 · 二五事變|날짜 = 1955-08-19|출판사 = 경향신문|인용문 = <!-- 띤 소장이 행방불명이 된 유명한 대전 전투(7월 20일)를 비롯한 전쟁 초기에 있어서 미 제24사단과 국군은 압도적인 병력과 장비를 갖춘 괴뢰군의 작전에 대항하여 恒常阻止작전과 지연 작전으로써 후방 한․미군의 증원 전개를 위한 귀중한 시간을 얻었던 것이다. 한편 대전을 넘어선 괴뢰군은 호남 평야를 휩쓸고서 남해안 沿邊으로 침입하는 한편 북부 전선과 동해안 전선과 호응하여 3방면으로부터 부산 대구의 미군 보급선을 절단하여 한․미 양군을 바다로 몰아넣으려는 작전을 강행하기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한․미 연합군은 낙동강을 최전선으로 동해안의 포항으로부터 북부의 왜관 남부 해안의 마산을 연락하는 워커 라인(부산 반월형 진지)를 구축하고 최후의 결전을 전개하였다.--> }}</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