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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으로 들어오기 전 태사(太師)라 칭했다.(190년 3월 25일(음력 2월 12일, 정축(丁丑)일))<ref>《[[후한서]]》 〈[[:s:zh:後漢書/卷9|제9권]]〉 “二年[...]二月丁丑,董卓自為太師。”</ref> [[황태자]] 급의 [[수레]]<ref>[[사마표]], 《[[속한지]]》(續漢志) 29권 여복上 청개거 녹거(靑蓋車 綠車)</ref> 와 복식을 사용하였고, [[동생]] 동민(董旻)에게는 [[좌장군]]과 호후(鄠侯), 큰조카 동황(董璜)에게는 시중과 중군[[교위]]를 주는 등 동탁의 가문 사람은 [[어린애]]라도 모두 한 자리씩 가졌다. [[미현]](郿縣)에 오(塢)를 쌓고 만세오(萬歲塢)라 하였다. [[높이]]가 높은 곳은 7장(丈)에 이르렀으며 30년 치 [[식량]]을 비축했으므로 동탁 스스로 “일이 잘되면 천하를 웅거하고 잘 안되면 이곳을 지키며 여생을 보내겠다”고 자신했다. 법령이 가혹하고 문란하여 억울하게 죽은 자가 많았다. [[관중 (지명)|관중]]의 귀족들은 반역죄를 뒤집어쓰기도 했다.
 
동탁은 여포를 매우 신임해서 [[양아들]]로 삼고 [[경호]]를 맡겼었다. 어느날 동탁은 사소한 일로 화가 나서 여포에게 수극을 던졌다. 민첩하게 피했기에 망정이지 죽을 뻔한 여포는 이 일이 앙금으로 남았다. 거기다 동탁의 시중드는 계집종과 몰래 정을 통한 일도 있어 발각될까 두려웠다. [[왕윤]]은 [[상서복야]] [[사손서]]와 동탁 주살을 모의하고 있었는데 여포가 수극에 죽을 뻔한 일을 듣고는 여포도 회유하였다. 여포는 처음에는 부자 사이에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펄쩍 뛰었지만 왕윤이 ‘친부도 아닐 뿐더러 [[아버지]]가 [[아들]]에게 수극을 던지겠느냐’고 설득하니 결국 동참하였다.<ref>《삼국지》7권 위서 제7 여포, 《후한서》75권 열전 제65 여포</ref>
 
192년 4월 동탁이 여포 등 호위병을 거느리고 궁궐로 들어가는데 [[기도위]] [[이숙 (삼국지)|이숙]] 등 10여 명의 습격을 받았다. 동탁은 속에 [[갑옷]]을 입은지라 [[팔]]에만 부상을 입고 수레에서 떨어졌다. 큰 [[소리]]로 여포를 찾자 여포는 “조서를 받들어 역적 동탁을 치노라”고 하였고, 동탁은 “개새끼, 감히 이럴 수 있느냐!”<ref>庸狗敢如是邪</ref> 란 마지막 말을 남기고 죽었다.(5월 22일, 음력 4월 23일, 신사(辛巳)일) 이를 만방에 알리니 사졸들은 [[만세]]를 부르고 사람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노래]]하고 [[춤]]추며 [[잔치]]를 벌였다. 미오는 [[황보숭]]이 점령하였으며 동탁의 시체는 거리에 내버려지고 그 일족은 멸족되었다.<ref>《[[후한서]]》 〈[[:s:zh:後漢書/卷9|제9권]]〉 “三年[...]夏四月辛巳,誅董卓,夷三族。”</ref> 동탁은 [[금]] 이삼만 근, [[은]] 팔구만 근, 비단과 [[구슬]] 등 온갖 보물을 [[산]]처럼 모아 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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