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천량 해전: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TedBot (토론 | 기여)
잔글 봇: 틀 이름 및 스타일 정리
→‎칠천량 해전: 원균이 판옥선 100척 이상과 거북선 3척을 가지고 부산포 앞바다로 향한것을 양력 8월 26일 음력 7월 14일이다
51번째 줄:
== 칠천량 해전 ==
[[파일:Location Chilcheonryang.png|섬네일|칠천량의 위치]]
[[1597년]] [[8월 16일|8월 26일]]([[음력 7월 4일14일]]) 100척이 훨씬 넘는 판옥선, 거북선과 1만여명에 달하는 조선수군을 총동원한 원균<ref>조선 수군의 지휘관은 원균이었다. 원균도 이 싸움이 조선에게 불리하고 참패할 것을 우려했지만 조정의 무리한 요구로 어쩔 수 없이 전투를 감행한다. 원래 이순신이 조선 수군을 승리로 이끌었던 이유는 적진에 들어가서 싸우는 방식이 아니라 적선을 자기 진영에 유인해서 함정에 빠뜨리는 방식으로 일본 수군의 전력을 조금씩 상대하는 전투였다. 사실상 조선 수군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전략이었다. 그런데 1,000여척에 달하는 적진에 뛰어드는 것이 자살 행위임을 원균이 모를리 없었다. 이 전투에서 원균도 전사한다.</ref>은 [[부산]] 인근에서 바람과 파도를 고려하지 않고 적을 추격하다가 12척의 [[판옥선]]을 표류하게 해 잃어버리고, 9일에는 오히려 적의 반격을 받아 역시 많은 전선을 잃게 된다. 실록에서는 이 때 아군이 활 한 번 제대로 쏘지 못 한 채 패했다고 하면서 아군의 대응을 문제삼았고, 케이넨의 [[조선일기]]에는 이 때 반격한 병력이 일본 수군이 아닌 육군 수송함대 병력인 것이 확인된다.
 
조선 수군은 가덕도에서 물을 확보하기 위해 내리는데 이 때 적의 기습을 받았고, 원균은 400명의 아군을 버리고 도주한다. [[1597년]] 2월 이순신이 [[부산포]]로 출동했을 때 가덕도에서 물을 긷던 초동 5명이 왜군에게 끌려가자 가덕왜성을 직접 공격해서 요시라가 직접 와서 포로들을 풀어주며 화친을 구걸했던 것과는 비교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