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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뜻 넘어옴|독일 연방공화국|1949년부터 1990년 10월 3일까지의 분단 정부|서독}}
{{독일 표}}
'''도이칠란트 연방공화국''' 또는 독일 연방공화국(獨逸 聯邦共和國, {{llang|de|Bundesrepublik Deutschland|분데스레푸블리크 도이칠란트}}), 줄여서 도이칠란트 또는 '''독일'''({{llang|de|Deutschland|도이칠란트}}, {{소리|De-Deutschland.ogg|듣기}}, {{llang|en|Federal Republic of Germany}}, {{문화어|도이췰란드}})은 [[중앙유럽]]에 있는 [[나라]]이다. [[북쪽]]으로 [[덴마크]]와 [[북해]], [[발트해]], [[동쪽]]으로 [[폴란드]]와 [[체코]], [[남쪽]]으로 [[오스트리아]]와 [[스위스]], [[서쪽]]으로 [[프랑스]], [[룩셈부르크]], [[벨기에]], [[네덜란드]]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독일 영토는 357,021 [[제곱킬로미터]]이며, [[기후]]는 주로 [[온대 기후]]를 보인다. 인구는 [[2011년]] 기준 80,219,695명으로<ref>[http://epp.eurostat.ec.europa.eu/cache/ITY_OFFPUB/KS-QA-09-047/EN/KS-QA-09-047-EN.PDF First demographic estimates for 2009], [[유럽 통계국]].</ref> [[유럽 연합]]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이며, 이민자 인구는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다.<ref>{{웹 인용|title=Germany Top Migration Land After U.S. in New OECD Ranking|url=http://www.bloomberg.com/news/2014-05-20/immigration-boom-propels-germany-past-u-k-in-new-oecd-ranking.html|publisher=Bloomberg|date=20 May 2014|accessdate=29 August 2014}}</ref> [[공용어]]는 [[독일어]]이고, 소수 민족어나 [[러시아어]], [[영어]], [[소르브어]], [[덴마크어]], [[프리지아어]]도 쓰인다. 주요 도시는 [[베를린]]([[수도]]), [[뮌헨]], [[라이프치히]], [[드레스덴]]이 있다. [[고대]]에 여러 [[게르만족]]이 살던 독일 땅은 [[게르마니아]]로 알려져 있었으며, [[100년]] 이전에 [[게르마니아 (책)|관련 기록]]이 남아 있다. [[10세기]]부터 [[게르만족]]의 땅은 [[1806년]]까지 존속한 [[신성 로마 제국]]의 중심부를 이루었다. [[16세기]]에 북독일은 [[루터교회]]가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분리된 [[종교 개혁]](Reformation)의 핵심부로 자리 잡았다. [[1871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중에 독일은 최초로 [[독일의 통일|통일]]을 이루어 근대적인 [[국민 국가]]가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1949년]]에 독일은 연합군 점령지 경계선을 따라 [[동독]]과 [[서독]]으로 [[분단]]되었으나, [[1990년]]에 [[독일의 재통일|통일]]되었다. 독일은 [[연방제]]와 [[의원내각제]]를 채택한 [[공화국]]으로 [[독일의 주|16개 주]]로 이루어져 있다. [[수도]]는 국내 최대 도시인 [[베를린]]이다. 이 나라는 [[유엔]]과 [[북대서양 조약 기구]], [[G8]], [[G20]], [[경제 협력 개발 기구]], [[세계 무역 기구]], [[유럽 연합]]의 회원국이다. 독일은 오늘날 [[유럽]] 최강대국으로 명목 [[국내총생산]] 기준으로 세계 4위의 경제 대국이며, [[구매력 평가]] 기준으로는 세계 5위이다. 수출과 수입 규모는 세계 2위이다. 연간 [[정부 개발 원조|개발 원조액]]은 세계 2위이며,<ref>[http://www.topnews.in/germany-worlds-second-biggest-aid-donor-after-us-229970 Germany world's second biggest aid donor after US] TopNews, India. Retrieved 2008-04-10.</ref> 군비 지출액은 6위를 보인다.<ref>[http://www.sipri.org/contents/milap/milex/mex_major_spenders.pdf/download The fifteen major spenders in 2006], [http://web.archive.org/web/20070814224502/http://www.sipri.org/contents/milap/milex/mex_major_spenders.pdf/download Archive Page], 2007, PDF, Recent trends in military expenditure, Stockholm International Peace Research Institute.</ref> <!-- 관련 순위 목록 페이지 연결 필요 --> 독일은 생활수준이[[생활수준]]이 높으며 광범위한 [[사회 보장]] 제도를 이룬 나라이다나라다. 또 독일은 여러 과학 기술 분야에서 선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독일 연구소는 전 세계 연구소 중에서 과학기술이[[과학기술]]이 세계 1위이다.<ref>[http://www.innovations-report.de/html/berichte/informationstechnologie/bericht-109339.html Confidently into the Future with Reliable Technology] www.innovations-report.de. May 7, 2008. Retrieved 2008-04-04.</ref> 대졸자 초봉은 [[2012년]] 기준으로 약 35,000[[유로]](한화 약 4,673만원)로, [[G7]] 국가들 가운데 두 번째로 높다.
 
== 국명 ==
{{본문|독일의 국명}}
독일을 가리키는 명칭은 [[유럽]]의 그 어느 나라보다 다양하다. 예를 들어 독일 내에서 헌법상이나 [[외교 관계]] 등에서 사용하는 [[독일어|자국어]] 표기는 '''도이칠란트'''({{lang|de|Deutschland}})이지만, [[영어]]로는 '저머니'({{lang|en|Germany}})라고 하며 [[프랑스어]]로는 '알마뉴'({{lang|fr|Allemagne}}), [[폴란드어]]로는 '니엠치'({{lang|pl|Niemcy}}), [[중국어]]로는 '더궈'({{lang|zh|德国}})라고 한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쓰이는 '''독일'''이라는 [[한국어]] 명칭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어]]식 [[한자]] 음차 표기인 '도이쓰'({{llang|ja|独逸}})<ref>현재 일본에서는[[일본]]에서는 한자 음역은 쓰이지 않고 가타카나로만[[가타카나]]로만 '도이쓰'로 표기한다.</ref>를 받아들여 이를 한국식 한자음으로 읽은 것이며, 그 전에는 중국의[[중화인민공화국|중국]]의 영향을 받아 '''덕국'''(德國)이라 불렀다. 해방 후에는 [[일제 강점기]]의 잔재를 없애고 독일어 원발음에 좀더 가깝게 하기 위해 '''도이칠란트'''로 표기하기도 했으나 [[대한민국]]에서는 이 표기법이 정착하지 못하였고,<ref>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183029&ctg=20{{깨진 링크|url=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183029&ctg=20 }}</ref><ref>단, 도이칠란트는 현재까지 독일과 함께 이 나라를 가리키는 명칭의 복수 [[표준어]]로 인정되고 있다.</ref> 현재는 대한민국 주재 대사관에서도 스스로를 '주한 독일 대사관'으로 일컫고 있다.
 
독일을 가리키는 명칭은 유럽의 그 어느 나라보다 다양하다. 예를 들어 독일 내에서 헌법상이나 외교 관계 등에서 사용하는 [[독일어|자국어]] 표기는 '''도이칠란트'''({{lang|de|Deutschland}})이지만, [[영어]]로는 '저머니'({{lang|en|Germany}})라고 하며 [[프랑스어]]로는 '알마뉴'({{lang|fr|Allemagne}}), [[폴란드어]]로는 '니엠치'({{lang|pl|Niemcy}}), [[중국어]]로는 '더궈'({{lang|zh|德国}})라고 한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쓰이는 '''독일'''이라는 [[한국어]] 명칭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어]]식 [[한자]] 음차 표기인 '도이쓰'({{llang|ja|独逸}})<ref>현재 일본에서는 한자 음역은 쓰이지 않고 가타카나로만 '도이쓰'로 표기한다.</ref>를 받아들여 이를 한국식 한자음으로 읽은 것이며, 그 전에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 '''덕국'''(德國)이라 불렀다. 해방 후에는 [[일제 강점기]]의 잔재를 없애고 독일어 원발음에 좀더 가깝게 하기 위해 '''도이칠란트'''로 표기하기도 했으나 [[대한민국]]에서는 이 표기법이 정착하지 못하였고,<ref>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183029&ctg=20{{깨진 링크|url=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183029&ctg=20 }}</ref><ref>단, 도이칠란트는 현재까지 독일과 함께 이 나라를 가리키는 명칭의 복수 [[표준어]]로 인정되고 있다.</ref> 현재는 대한민국 주재 대사관에서도 스스로를 '주한 독일 대사관'으로 일컫고 있다.
 
{{본문|도이치 (어원)}}
독일어의[[독일어]]의 "deutsch"의 어원적인 전형태들은 본래 "종족에 속하다"는 의미를 가졌으며 우선은 대륙성 [[서게르만어군]]의 [[방언 연속체]]를 지칭하였다. 도이칠란트라는 명칭은 15세기부터 사용되었지만 개별문서에서는 이미 그 이전에도 기록이 되어있다. 그 이전에는 "deutsch"라는 수식어가 "Land(땅, 나라)"와 조합되어 사용된 예만 확인되었다. 가령 부정관사와 단수형태의 "ein deutsches Land" 또는 정관사와 복수형태의 "die deutschen Länder"처럼 쓰였지만 정관사의 단수형태인 "das deutsche Land"으로는 사용되지 않았다.
 
독일어의 "deutsch"의 어원적인 전형태들은 본래 "종족에 속하다"는 의미를 가졌으며 우선은 대륙성 [[서게르만어군]]의 [[방언 연속체]]를 지칭하였다. 도이칠란트라는 명칭은 15세기부터 사용되었지만 개별문서에서는 이미 그 이전에도 기록이 되어있다. 그 이전에는 "deutsch"라는 수식어가 "Land(땅, 나라)"와 조합되어 사용된 예만 확인되었다. 가령 부정관사와 단수형태의 "ein deutsches Land" 또는 정관사와 복수형태의 "die deutschen Länder"처럼 쓰였지만 정관사의 단수형태인 "das deutsche Land"으로는 사용되지 않았다.
 
== 역사 ==
{{본문|독일의 역사}}
 
{{본문|게르만족|게르마니아}}
 
[[파일:Gehrts Armin verabschiedet sich von Thusnelda 1884.jpg|섬네일|왼쪽|150px|아르미니우스]]
[[아우구스투스게르만족]]은 [[북유럽 청동기 시대]]에 들어서서 가장 늦게 자리 잡아 [[청동기 시대|로마 이전 청동기 시대]]에 처음 문명이 발생 한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1세기]]에 [[게르만족]]은 남부 [[스칸디나비아]]와 북독일에서 [[남쪽]], [[동쪽]], [[서쪽]]으로 진출하여 [[동유럽]]의 [[이란인]], [[발트족]], [[슬라브족]]을 비롯하여 [[갈리아]]의 [[켈트족]]과 만나게 되었다. [[게르만족]]의 초기 역사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으나, 이들과 접촉한 [[로마 제국]]에서는 관련 기록이 남아 있고, [[어원학|어원론]]이나 [[고고학]]상의 발굴을 통해서도 관련된 자료들이 있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로마의[[로마]]의 [[푸블리우스 큉크틸리우스 바루스]] 장군이 [[게르마니아]](로마인들은 대체로 [[라인강]]에서 [[우랄 산맥]]에 이르는 영토를[[영토]]를 이렇게 불렀다)를 침략하였는데, 이 시기에 게르만족은[[게르만족]]은 부족의 정체성을 지키면서도 로마식 전술에도 익숙해졌다. [[서력 기원|서기]] [[9년]]에 바루스가 이끄는 3개 [[로마 군단이군단]]이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에서 [[케루스키족]] 족장 [[아르미니우스]](헤르만)에게 전멸당하였다. 이로써 라인강에서[[라인강]]에서 [[도나우강]]에 이르는 오늘날의[[오늘날]]의 독일 땅은 [[로마 제국의제국]]의 지배권에[[지배권]]에 편입되지 않았다. [[타키투스]]가 《[[게르마니아 (책)|게르마니아]]》를 쓴 [[100년]]경에 게르만족은[[게르만족]]은 [[리메스 게르마니쿠스|라인강에서 도나우강에 이르는 선]]을 따라 모여 살았는데, 이들이 살던 땅은[[땅]]은 오늘날의[[오늘날]]의 독일 영토 대부분을 차지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남부 [[바이에른]], 서부 [[라인란트]] 지방에서는 로마 속주가 설치되었다. [[3세기]]에는 [[알라마니족]], [[프랑크족]], [[카티족]], [[작센족]], [[프리지아족]], 시캄브리족, 투링기족 등 규모가 큰 서부 게르만 부족이 나타났다. [[260년]]경에 게르만족은[[게르만족]]은 [[리메스 게르마니쿠스|로마 제국 국경]]와 [[도나우강]] 국경선을[[국경선]]을 넘어 로마 영내로 들어왔다.
 
[[게르만족]]은 [[북유럽 청동기 시대]]에 들어서서 가장 늦게 자리 잡아 [[청동기 시대|로마 이전 청동기 시대]]에 처음 문명이 발생 한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1세기]]에 게르만족은 남부 [[스칸디나비아]]와 북독일에서 남쪽, 동쪽, 서쪽으로 진출하여 [[동유럽]]의 [[이란인]], [[발트족]], [[슬라브족]]을 비롯하여 [[갈리아]]의 [[켈트족]]과 만나게 되었다. 게르만족의 초기 역사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으나, 이들과 접촉한 [[로마 제국]]에서는 관련 기록이 남아 있고, [[어원학|어원론]]이나 [[고고학]]상의 발굴을 통해서도 관련된 자료들이 있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로마의 [[푸블리우스 큉크틸리우스 바루스]] 장군이 게르마니아(로마인들은 대체로 [[라인강]]에서 [[우랄 산맥]]에 이르는 영토를 이렇게 불렀다)를 침략하였는데, 이 시기에 게르만족은 부족의 정체성을 지키면서도 로마식 전술에도 익숙해졌다. 서기 [[9년]]에 바루스가 이끄는 3개 로마 군단이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에서 [[케루스키족]] 족장 [[아르미니우스]](헤르만)에게 전멸당하였다. 이로써 라인강에서 [[도나우강]]에 이르는 오늘날의 독일 땅은 로마 제국의 지배권에 편입되지 않았다. [[타키투스]]가 《[[게르마니아 (책)|게르마니아]]》를 쓴 [[100년]]경에 게르만족은 [[리메스 게르마니쿠스|라인강에서 도나우강에 이르는 선]]을 따라 모여 살았는데, 이들이 살던 땅은 오늘날의 독일 영토 대부분을 차지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남부 [[바이에른]], 서부 [[라인란트]] 지방에서는 로마 속주가 설치되었다. [[3세기]]에는 [[알라마니족]], [[프랑크족]], [[카티족]], [[작센족]], 프리지아족, 시캄브리족, 투링기족 등 규모가 큰 서부 게르만 부족이 나타났다. [[260년]]경에 게르만족은 [[리메스 게르마니쿠스|로마 제국 국경]]와 도나우강 국경선을 넘어 로마 영내로 들어왔다.
 
=== 신성 로마 제국 (962년 ~ 1814년) ===
{{본문|신성 로마 제국}}
 
{{참고|동방 식민지}}
[[잘리어800년]] [[12월 25일]]에 [[샤를마뉴]]는 [[카롤링거 제국]]을 세웠으나, [[843년]]의 [[베르됭 조약]]으로 나라는 세 왕국으로 분리되었다. 그 가운데 한 부분인 [[동프랑크 왕국]]이 [[962년]]에 [[신성 로마 제국]]으로 이어져 [[1806년]]까지 존속하였다. [[신성 로마 제국]]의 [[영토]]는 [[북쪽]]의 [[아이더 강]]에서 [[남쪽]]의 [[지중해]] [[해안]]에 이르렀다. [[오토 왕가]] 치세([[919년]]~[[1024년]])에 ~[[로타링기아 공국]], [[작센 공국]], [[프랑켄|프랑켄 공국]], [[슈바벤|슈바벤 공국]], [[튀링엔|튀링엔 공국]], [[바이에른|바이에른 공국]]이 합방하였으며, [[962년]]에 독일 왕이 이들 지역을 지배하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즉위하였다. [[잘리어 왕가]] 치세([[1024년]]~[[1125년]])에 [[신성 로마 제국은 북부제국]]은 [[북부 이탈리아]]와 [[부르고뉴 지방]]을 흡수하였으나, [[서임권 분쟁]]으로 말미암아 [[잘리어 왕가의왕가]]의 황제들은 권력을 잃었다. [[호엔슈타우펜 왕가]] 치세([[1138년]] ~ [[1254년]])에 독일의 제후들은 슬라브족이[[슬라브족]]이 사는 남쪽과[[남쪽]]과 동쪽 지방으로 영향력을 넓혔는데, 전부터 이들 지방과 [[동방 식민지]](오스트지들룽)에는 독일의 정착지가 있었다. 북독일의 도시들은 [[한자 동맹]]의 일원이 되어 번영하였다. [[1315년]]의 [[대기근 (1315년 ~ 1317년)|대기근]]이 일어나고 뒤이어 [[1348년]] ~ [[1350년]] 사이에 [[흑사병]]이 창궐하면서 독일의 인구는 급감하였다.
 
[[800년]] [[12월 25일]]에 [[샤를마뉴]]는 [[카롤링거 제국]]을 세웠으나, [[843년]]의 [[베르됭 조약]]으로 나라는 세 왕국으로 분리되었다. 그 가운데 한 부분인 [[동프랑크 왕국]]이 [[962년]]에 [[신성 로마 제국]]으로 이어져 [[1806년]]까지 존속하였다. 신성 로마 제국의 영토는 북쪽의 [[아이더 강]]에서 남쪽의 [[지중해]] 해안에 이르렀다.
 
[[오토 왕가]]의 치세([[919년]] ~ [[1024년]])에 [[로타링기아 공국]], [[작센 공국]], [[프랑켄|프랑켄 공국]], [[슈바벤|슈바벤 공국]], [[튀링엔|튀링엔 공국]], [[바이에른|바이에른 공국]]이 합방하였으며, [[962년]]에 독일 왕이 이들 지역을 지배하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즉위하였다.
 
[[잘리어 왕가]] 치세([[1024년]] ~ [[1125년]])에 신성 로마 제국은 북부 [[이탈리아]]와 [[부르고뉴 지방]]을 흡수하였으나, [[서임권 분쟁]]으로 말미암아 잘리어 왕가의 황제들은 권력을 잃었다. [[호엔슈타우펜 왕가]] 치세([[1138년]] ~ [[1254년]])에 독일의 제후들은 슬라브족이 사는 남쪽과 동쪽 지방으로 영향력을 넓혔는데, 전부터 이들 지방과 [[동방 식민지]](오스트지들룽)에는 독일의 정착지가 있었다. 북독일의 도시들은 [[한자 동맹]]의 일원이 되어 번영하였다. [[1315년]]의 [[대기근 (1315년 ~ 1317년)|대기근]]이 일어나고 뒤이어 [[1348년]] ~ [[1350년]] 사이에 [[흑사병]]이 창궐하면서 독일의 인구는 급감하였다.
 
[[파일:Martin Luther, 1529.jpg|섬네일|위오른쪽|왼쪽|마르틴 루터]]
[[1356년]]에 나온 [[금인칙서 (1356년)|금인칙서]]는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할 때까지 제국의 기본 [[헌법]]이 되었다. 금인칙서에서는 강력한 공국이나 [[주교령]]을 다스리는 [[선거후]] 일곱 사람이 [[황제]]를 선출하도록 규정하였다. [[15세기]]부터 제국에서 선출된 황제 제위는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합스부르크 왕가]]가 독차지하였다. [[1517년]]에 [[로마 가톨릭교회]] [[사제]]였던 [[마르틴 루터]]는 [[95개조 반박문]]을 출간하여 [[로마 가톨릭교회]]의 [[신학]]과 관습에 대항하여 [[종교 개혁]]을 일으켰다. [[마르틴 루터의루터]]의 [[파문]], 보름스 국회 심문, [[독일 농민 전쟁|농민전쟁]], 에라스뮈스와의[[에라스뮈스]]와의 ‘자유 의지론’을 둘러싼 논쟁을 통한 인문주의와의[[인문주의]]와의 결별 등을 거쳐 분리된 [[루터교회]]는 [[1530년]] 이후 독일 내 여러 나라들의 공식적 교회가 되었다.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간의가톨릭]]간의 종교 분쟁으로 [[30년 전쟁]]이 일어났으며 그 결과 독일은 황폐화되었다. 독일에 있던 나라들의 인구는 30% 정도 줄어들었다. [[1648년]]의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되면서 독일의 [[종교 전쟁은전쟁]]은 종식되었으나, [[신성 로마 제국은제국]]은 사실상 수많은 독립 공국으로 갈라졌다. [[1740년]]부터 [[합스부르크 제국]]와 [[프로이센 왕국]]간의 대립이 독일 역사의 주요 양상으로 나타난다. [[1806년]]에 [[나폴레옹 전쟁]]으로 [[신성 로마 제국이제국]]이 멸망하였다.
 
[[1356년]]에 나온 [[금인칙서 (1356년)|금인칙서]]는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할 때까지 제국의 기본 [[헌법]]이 되었다. 금인칙서에서는 강력한 공국이나 [[주교]]령을 다스리는 [[선거후]] 일곱 사람이 황제를 선출하도록 규정하였다. [[15세기]]부터 제국에서 선출된 황제 제위는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합스부르크 왕가]]가 독차지하였다.
 
[[1517년]]에 [[로마 가톨릭교회]] [[사제]]였던 [[마르틴 루터]]는 [[95개조 반박문]]을 출간하여 [[로마 가톨릭교회]]의 [[신학]]과 관습에 대항하여 [[종교 개혁]]을 일으켰다. 마르틴 루터의 파문, 보름스 국회 심문, 농민전쟁, 에라스뮈스와의 ‘자유 의지론’을 둘러싼 논쟁을 통한 인문주의와의 결별 등을 거쳐 분리된 [[루터교회]]는 [[1530년]] 이후 독일 내 여러 나라들의 공식적 교회가 되었다.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간의 종교 분쟁으로 [[30년 전쟁]]이 일어났으며 그 결과 독일은 황폐화되었다. 독일에 있던 나라들의 인구는 30% 정도 줄어들었다. [[1648년]]의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되면서 독일의 종교 전쟁은 종식되었으나, 신성 로마 제국은 사실상 수많은 독립 공국으로 갈라졌다. [[1740년]]부터 [[합스부르크 제국]]와 [[프로이센 왕국]]간의 대립이 독일 역사의 주요 양상으로 나타난다. [[1806년]]에 [[나폴레옹 전쟁]]으로 신성 로마 제국이 멸망하였다.
 
=== 반동과 혁명 (1815년 ~ 1870년) ===
{{본문|독일 연방}}
 
[[파일:Maerz1848 berlin.jpg|오른쪽|200픽셀|섬네일|1848년 3월 19일, 베를린에서 일어난 혁명 봉기]]
[[파일:Deutscher Bund.svg|섬네일|250px| [[독일 연방]] 1815–1866.]]
유럽의[[프랑스]]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몰락하고 [[1815년]]에 [[빈 회의]]가 소집되었으며, 39개 주권국의 느슨한 연맹체인 [[독일 연방]]이 성립하였다. [[왕정 복고]]를 놓고 이견이 나타나면서, 통합과 자유를 요구하는 자유주의 운동이 발흥하는데 일조하였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의 정치가 [[메테르니히]]는 이러한 자유주의 운동을 탄압하였다. [[독일 관세 동맹]](Zollverein)은 독일 내 여러 나라들의 경제 통합을 크게 진전시켰다. 이 시기에 여러 독일인들은 [[프랑스 혁명]]의 이상에 경도되었으며 [[민족주의]]가 특히 지식인들 사이에서 힘을 얻게 되었다. 당초 [[검은색]], [[붉은색]], [[황금색]]은 독일 민족주의 운동의 상징이었으나, 나중에 [[독일 국기]]의 [[색]]이 된다. [[유럽]]의 [[1848년 혁명]]으로 프랑스에서[[프랑스]]에서 공화정이 성립하자, 독일의 지식인들과 평민들도 혁명을[[혁명]]을 일으켰다. 처음에 군주들은 혁명주의자들의 자유주의 요구를 수용하였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황제]] 칭호를 받았으나 권력을 잃자 왕위를 거부하고 헌법을[[헌법]]을 제한하여 일시적으로 혁명 운동에 제동을 걸었다. [[프로이센 왕국|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와 자유주의 세력이 강해진 의회는 [[1862년]]에 군제 개혁을 놓고 갈등하였다[[갈등]]하였다. 왕은 [[오토 폰 비스마르크]]를 [[프로이센의 총리]]로 임명하였다. 비스마르크는[[오토 폰 비스마르크|비스마르크]]는 [[1864년]]에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에서 덴마크를[[덴마크]]를 무찔렀다. [[1866년]]에는 프로이센이[[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에서 승리하여[[승리]]하여 비스마르크는[[오토 폰 비스마르크|비스마르크]]는 [[북독일 연방]]을 창설할 수 있게 되었으며 과거 독일의 강대국이었던[[강대국]]이었던 [[오스트리아 제국]]은 여타 독일 국가들의 내정에 간섭하지 못하게 되었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몰락하고 [[1815년]]에 [[빈 회의]]가 소집되었으며, 39개 주권국의 느슨한 연맹체인 [[독일 연방]]이 성립하였다. [[왕정 복고]]를 놓고 이견이 나타나면서, 통합과 자유를 요구하는 자유주의 운동이 발흥하는데 일조하였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의 정치가 [[메테르니히]]는 이러한 자유주의 운동을 탄압하였다. [[독일 관세 동맹]](Zollverein)은 독일 내 여러 나라들의 경제 통합을 크게 진전시켰다. 이 시기에 여러 독일인들은 [[프랑스 혁명]]의 이상에 경도되었으며 [[민족주의]]가 특히 지식인들 사이에서 힘을 얻게 되었다. 당초 검은색, 붉은색, 황금색은 독일 민족주의 운동의 상징이었으나, 나중에 [[독일의 국기|독일 국기]]의 색이 된다.
 
유럽의 [[1848년 혁명]]으로 프랑스에서 공화정이 성립하자, 독일의 지식인들과 평민들도 혁명을 일으켰다. 처음에 군주들은 혁명주의자들의 자유주의 요구를 수용하였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황제]] 칭호를 받았으나 권력을 잃자 왕위를 거부하고 헌법을 제한하여 일시적으로 혁명 운동에 제동을 걸었다. [[프로이센 왕국|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와 자유주의 세력이 강해진 의회는 [[1862년]]에 군제 개혁을 놓고 갈등하였다. 왕은 [[오토 폰 비스마르크]]를 [[프로이센의 총리]]로 임명하였다. 비스마르크는 [[1864년]]에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에서 덴마크를 무찔렀다. [[1866년]]에는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에서 승리하여 비스마르크는 [[북독일 연방]]을 창설할 수 있게 되었으며 과거 독일의 강대국이었던 [[오스트리아 제국]]은 여타 독일 국가들의 내정에 간섭하지 못하게 되었다.
 
=== 독일 제국 (1871년 ~ 1918년) ===
{{본문|독일 제국|제1차 세계 대전}}
 
[[파일:LenbachFürstBismarck1895.jpg|섬네일|오른쪽|150px|비스마르크]]
[[1871년]]에 [[독일 제국]]이 사상 최초로 [[독일의 통일]]을 이룬 근대 국가가 되었는데, 이 가운데 [[프로이센 왕국]]이 가장 큰 몫을 차지하고 있었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프로이센]]이 [[프랑스]]를 무찌르면서 [[1871년]] [[1월 18일]]에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제국]]의 건국이 선포되었다. [[프로이센]]의 [[호엔촐레른 왕가]]가 [[독일 제국]] 전체의 [[황제]]를 겸임했으며, [[수도]]는 [[베를린]]이었다. [[독일 제국]]은 [[오스트리아]] 외의 독일의 모든 지방을 통일하였다.([[소독일주의]]) [[1884년]]부터 독일은 [[유럽]] 바깥 지역에 [[식민지]]를 확보하기 시작하였다. [[독일의 통일]] 이후 [[그륀더차이트]] 시대(창설 시대)에 [[독일 제국]]은 수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비스마르크]]의 지도로 타 열강들과 평화 관계를 유지하면서 2중 3중의 비밀 외교로 [[프랑스 제3공화국|프랑스]]를 고립시키는 [[외교 정책]]을 추진하였다. 독일은 [[영국]], [[프랑스]] 등과 불필요한 마찰을 피하기 위하여 해외 식민지 쟁탈 경쟁에도 뛰어들지 않았다. 대신 독일은 "식민지 대신 [[화학]]을"이라는 슬로건처럼 뒤늦게 [[산업 혁명]]을 추진하여 산업 국가로 거듭났다. 그러나 산업화 과정에서 독일은 내부 모순 및 문제에 직면했으며 이 내부 문제는 [[노동조합]]과 [[독일 사회민주당]]을 주축으로 한 사회주의 세력의 활발한 운동으로 표면화되었다. 뒤이어 [[황제]]로 등극한 [[빌헬름 2세]]는 [[유럽]]의 다른 열강처럼 [[제국주의]] 정책을 내세워 이웃 나라들과 마찰을 빚었다. 이 때문에 이전에 독일이 맺고 있던 거의 대부분의 동맹이 갱신되지 않았으며, 새로운 동맹에서는 독일이 빠졌다. 특히 [[프랑스]]는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영국]])과 [[영국 협상]](Entente Cordiale)을 맺고 [[러시아 제국]]과 긴밀한 관계를 확보하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와 관계를 맺은 것 외에 독일은 점차 고립되었다. 독일은 자국 영내를 벗어나 유럽 열강들이 벌이고 있던 [[아프리카]] [[식민지]] 쟁탈전에 뛰어들었다. [[베를린 회의 (1884년)|베를린 회의]]에서 유럽 열강은 [[아프리카]]를 나눠가지기로 합의하였다. 독일은 [[독일령 동아프리카]], [[독일령 남서부 아프리카]], [[카메룬]], 토골란드를 비롯한 [[아프리카]]의 여러 [[영토]]를 확보하였다. [[아프리카 쟁탈전]]으로 열강 사이에 긴장 상황이 벌어졌으며, 이는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는 데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1914년]]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사라예보]]에서 [[살해]]당하면서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다. [[동맹국]] 측에 섰던 독일은 역사상 최악의 전쟁으로 손꼽히는 이 전쟁에서 [[연합국 (제1차 세계 대전)|연합국]]에 [[패배]]하였다. [[전쟁]] 중 독일군 전사자는 2백만 명에 이른다.<ref>[http://www.spiegel.de/international/germany/0,1518,530319,00.html Last German World War I Veteran Believed to Have Died]. Spiegel Online. January 22, 2008.</ref> [[1918년]] [[11월]]에 [[독일 혁명]]이 일어나자 [[빌헬름 2세]]와 독일의 모든 제후가 [[폐위]]되었다. 그해 [[11월 11일]]에 [[휴전 협정 (제1차 세계 대전)|휴전 협정]]이 체결되어 전쟁이 끝났으며, 독일은 [[1919년]] [[6월]]에 [[베르사유 조약]]에 [[서명]]해야 했다. 전통적인 전후 외교 방식과 달리 당시 협상에서는 패전국인 동맹국이 배제되었다. 독일에서는 [[베르사유 조약]]이 다른 수단을 통한 치욕스러운 전쟁의 연속으로 여겨졌으며, 조약에서 규정한 가혹한 조건 때문에 이후 [[나치즘]]이 발흥하는 [[배경]]이 되었다고 보는 입장도 있다.
 
[[1871년]]에 [[독일 제국]]이 사상 최초로 독일의 통일을 이룬 [[근대]] 국가가 되었는데, 이 가운데 [[프로이센 왕국]]이 가장 큰 몫을 차지하고 있었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프로이센이 프랑스를 무찌르면서 [[1871년]] [[1월 18일]]에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제국의 건국이 선포되었다. 프로이센의 [[호엔촐레른 왕가]]가 독일 제국 전체의 황제를 겸임했으며, 수도는 [[베를린]]이었다. 독일 제국은 오스트리아 외의 독일의 모든 지방을 통일하였다. ([[소독일주의]]) [[1884년]]부터 독일은 유럽 바깥 지역에 식민지를 확보하기 시작하였다.
 
[[독일의 통일]] 이후 [[그륀더차이트]] 시대(창설 시대)에 독일 제국은 수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비스마르크]]의 지도로 타 열강들과 평화 관계를 유지하면서 이중 삼중의 비밀 외교로 [[프랑스 제3공화국|프랑스]]를 고립시키는 외교 정책을 추진하였다. 독일은 영국, 프랑스 등과 불필요한 마찰을 피하기 위하여 해외 식민지 쟁탈 경쟁에도 뛰어들지 않았다. 대신 독일은 "식민지 대신 [[화학]]을"이라는 슬로건처럼 뒤늦게 [[산업 혁명]]을 추진하여 산업 국가로 거듭났다. 그러나 산업화 과정에서 독일은 내부 모순 및 문제에 직면했으며 이 내부 문제는 [[노동조합]]과 [[독일 사회민주당]]을 주축으로 한 사회주의 세력의 활발한 운동으로 표면화되었다. 뒤이어 황제로 등극한 [[빌헬름 2세]]는 유럽의 다른 열강처럼 [[제국주의]] 정책을 내세워 이웃 나라들과 마찰을 빚었다. 이 때문에 이전에 독일이 맺고 있던 거의 대부분의 동맹이 갱신되지 않았으며, 새로운 동맹에서는 독일이 빠졌다. 특히 프랑스는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영국)과 [[영국 협상]](Entente Cordiale)을 맺고 [[러시아 제국]]과 긴밀한 관계를 확보하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와 관계를 맺은 것 외에 독일은 점차 고립되었다.
 
독일은 자국 영내를 벗어나 유럽 열강들이 벌이고 있던 [[아프리카]] 식민지 쟁탈전에 뛰어들었다. [[베를린 회의 (1884년)|베를린 회의]]에서 유럽 열강은 아프리카를 나눠가지기로 합의하였다. 독일은 [[독일령 동아프리카]], [[독일령 남서부 아프리카]], [[카메룬]], 토골란드를 비롯한 아프리카의 여러 영토를 확보하였다. [[아프리카 쟁탈전]]으로 열강 사이에 긴장 상황이 벌어졌으며, 이는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는 데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1914년]]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사라예보 사건|사라예보에서 살해]]당하면서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다. [[동맹국]] 측에 섰던 독일은 역사상 최악의 전쟁으로 손꼽히는 이 전쟁에서 [[연합국 (제1차 세계 대전)|연합국]]에 패배하였다. 전쟁 중 독일군 전사자는 2백만 명에 이른다.<ref>[http://www.spiegel.de/international/germany/0,1518,530319,00.html Last German World War I Veteran Believed to Have Died]. Spiegel Online. January 22, 2008.</ref> [[1918년]] 11월에 [[독일 혁명]]이 일어나자 빌헬름 2세와 독일의 모든 제후가 [[폐위]]되었다. 그해 [[11월 11일]]에 [[휴전 협정 (제1차 세계 대전)|휴전 협정]]이 체결되어 전쟁이 끝났으며, 독일은 [[1919년]] 6월에 [[베르사유 조약]]에 서명해야 했다. 전통적인 전후 외교 방식과 달리 당시 협상에서는 패전국인 동맹국이 배제되었다. 독일에서는 베르사유 조약이 다른 수단을 통한 치욕스러운 전쟁의 연속으로 여겨졌으며, 조약에서 규정한 가혹한 조건 때문에 이후 [[나치즘]]이 발흥하는 배경이 되었다고 보는 입장도 있다.
 
=== 바이마르 공화국 (1919년 ~ 1933년) ===
{{본문|바이마르 공화국}}
[[독일 11월 혁명|독일 혁명]]이 일어나자 독일은 [[공화국]]으로 선포되고 왕정이 무너졌다. 그러나 권력 투쟁은 이어졌는데 급진 좌익세력이 [[바이에른]]에서 권력을 잡았지만, 독일 전체를 장악하지는 못하였다. 독일 혁명은 [[1919년]] [[8월]]에 [[바이마르 공화국]]이 공식 출범하면서 끝을 맺는다. [[1919년]] [[8월 11일]]에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독일의 대통령|대통령]]이 [[바이마르 헌법]]에 서명하면서 헌법이 발효하였다. [[베르사유 조약]]에서 독일은 가혹한 화의 조건을 강요받은데다 마침 [[대공황]]까지 닥쳤으며, 불안정한 정부들이 세워지고 무너지기를 거듭하자 독일 사람들은 점차 [[의회 민주주의]] 정치 체체와 주류 정당들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게다가 극우 세력([[루터교]], 국가주의자, [[나치]])들은 독일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대전]]에서 패배한[[패배]]한 까닭은[[까닭]]은 정부 전복을 원하는 자들 때문이라는 소위 [[등 뒤의 칼 찌르기 이야기]](Dolchstoßlegende)를 퍼뜨리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바이마르 정부의 수뇌부는 [[베르사유 조약에조약]]에 서명했다는[[서명]]했다는 이유로 독일 민족을 배신하였다는 비난을 받았으며, [[스파르타쿠스단]]과 같은 급진 좌익 공산주의자들은 [[평의회 공산주의]](Räterepublik)를 지지하며 "자본주의 지배"를 철폐하기 위한 혁명을 원하였다. 새 바이마르 정부에 대한 불만 때문에 [[독일 공산당]]이 성장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여러 보수주의자들은 반동적이거나 혁명적인 극우로 쏠렸는데, 그 가운데는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이 있었다. [[1932년]]에 공산당과 나치가 의회 다수([[1932년]] [[7월]] 기준으로 총 296석)를 차지하였다. 여러 내각이 [[실패]]를 거듭한 끝에 [[파울 폰 힌덴부르크]]는 별다른 대안이 없음을 알고 우익 고문들의 압박으로 [[1933년]] [[1월 30일]]에 [[아돌프 히틀러]]를 [[독일의 총리]]로 임명한다는 중대한 결단을 내린다.
 
[[독일 11월 혁명|독일 혁명]]이 일어나자 독일은 [[공화국]]으로 선포되고 왕정이 무너졌다. 그러나 권력 투쟁은 이어졌는데 급진 좌익세력이 [[바이에른 사회주의 공화국|바이에른에서 권력을 잡았지만]], 독일 전체를 장악하지는 못하였다. 독일 혁명은 1919년 8월에 [[바이마르 공화국]]이 공식 출범하면서 끝을 맺는다. [[1919년]] [[8월 11일]]에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독일의 대통령|대통령]]이 [[바이마르 헌법]]에 서명하면서 헌법이 발효하였다.
 
[[파일:Stab-in-the-back postcard.jpg|섬네일|오른쪽|"[[등 뒤의 칼 찌르기]]"]]
 
[[베르사유 조약]]에서 독일은 가혹한 화의 조건을 강요받은데다 마침 [[대공황]]까지 닥쳤으며, 불안정한 정부들이 세워지고 무너지기를 거듭하자 독일 사람들은 점차 [[의회 민주주의]] 정치 체체와 주류 정당들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게다가 극우 세력(루터교, 국가주의자, 나치)들은 독일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한 까닭은 정부 전복을 원하는 자들 때문이라는 소위 [[등 뒤의 칼 찌르기 이야기]](Dolchstoßlegende)를 퍼뜨리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바이마르 정부의 수뇌부는 베르사유 조약에 서명했다는 이유로 독일 민족을 배신하였다는 비난을 받았으며, [[스파르타쿠스단]]과 같은 급진 좌익 공산주의자들은 [[평의회 공산주의]](Räterepublik)를 지지하며 "자본주의 지배"를 철폐하기 위한 혁명을 원하였다.
 
새 바이마르 정부에 대한 불만 때문에 [[독일 공산당]]이 성장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여러 보수주의자들은 반동적이거나 혁명적인 극우로 쏠렸는데, 그 가운데는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이 있었다. [[1932년]]에 공산당과 나치가 의회 다수([[1932년]] 7월 기준으로 총 296석)를 차지하였다. 여러 내각이 실패를 거듭한 끝에 [[파울 폰 힌덴부르크]]는 별다른 대안이 없음을 알고 우익 고문들의 압박으로 [[1933년]] [[1월 30일]]에 [[아돌프 히틀러]]를 [[독일의 총리]]로 임명한다는 중대한 결단을 내린다.
 
=== 나치 독일 (1933년 ~ 1945년) ===
{{본문|나치 독일}}
[[1933년]] [[2월 27일]] [[독일 국회의사당]]이 불길에 휩싸였으며 뒤를 이은 [[의회 방화에 대한 법령|비상 법령]]으로 시민 기본권이 폐지되었다. 의회에서 [[수권법]]이 통과되면서 [[히틀러]]는 무제한적인 입법권을 부여받았다. 이 때 [[사회민주당]]만이 반대표를 던졌는데, [[독일 공산당]] 의원들은 이미 투옥된 상황이었다. [[히틀러]]는 자신의 권력으로 모든 반대 세력을 무너뜨리고 몇 달도 안되어 중앙집권적인 [[전체주의]] 국가를 세웠다. 군사 재무장에 역점을 두어 산업이 회생하였다. [[베르사유 조약]] 당시 독일은 [[자르]]와 [[라인란트]]를 잃었는데, [[1935년]]에 독일은 [[국제 연맹]]이 관리하던 [[자르 (국제 연맹)|자르 지방]]을 되찾았으며 [[1936년]]에는 [[라인란트]]를 [[군대]]로 장악하였다. 군사 재무장과 더불어 독일의 외교 정책은 더욱 공격적이고 확장적인 방향을 취하여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키기에 이른다. 독일은 [[1938년]]과 [[1939년]]에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를 각각 점령하였으며, [[폴란드 침공]]을 준비하였다.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 [[글라이비츠 방송국 공격 사건]]) [[1939년]] [[9월 1일]], [[독일 국방군]]은 [[폴란드 제2공화국|폴란드]]에 [[전격전]]을 개시하여 폴란드는 순식간에 독일과 [[소련]]의 [[붉은 군대]]에 점령당하였다. 이에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하면서 [[유럽]]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였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독일과 여타 [[추축국]]은 [[유럽 대륙]]의 상당 지역을 장악하였다. [[1941년]] [[6월 22일]], 독일은 독소 불가침 조약을 파기하고 [[소련을]] [[침공]]하였다. 같은 해에 [[일본]]이 [[진주만]]의 [[미군 기지]]를 기습하였으며, [[일본]]과 [[동맹]]을 맺은 독일은 [[미국]]에 [[선전포고]]하였다. 독일 군대는 소련 영내로 신속히 진군하였으나,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전황이 뒤집혔다. 이후 [[독일군]]은 [[동부 전선 (제2차 세계 대전)|동부 전선]]에서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1943년]] [[9월]]에 독일의 동맹국인 [[이탈리아]]가 항복하자 [[독일군]]이 [[이탈리아]]를 [[점령]]하면서 독일은 새로운 전선을 감당해야 했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 역시 [[서부 전선 (제2차 세계 대전)|서부 전선]]을 열면서 2차 대전의 전환점이 되었는데, 독일은 얼마 안 되어 [[패배]]하였다. [[1945년]] [[5월 8일]], [[붉은 군대]]가 [[베를린]]을 [[점령]]한 후 [[독일군]]이 항복하였다. 이 [[전쟁]]에서 독일인 군인 및 민간인([[중앙유럽]]의 독일계 인구도 포함하여) 7백만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ref>Steinberg, Heinz Günter. ''Die Bevölkerungsentwicklung in Deutschland im Zweiten Weltkrieg : mit einem Überblick über die Entwicklung von 1945 bis 1990.'' Bonn 1991. Also see [https://en.wikipedia.org/wiki/World_War_II_casualties#endnote_Germany1 World War II casualties]</ref> 독일 [[제3제국]]은 나중에 '[[홀로코스트]]'라고 불린 대학살을 통하여 수많은 반대 세력과 소수 집단을 직접 탄압하기 위한 정책을 실행하였다. 홀로코스트로 1,700만 명이 살해당하였는데, 그 가운데는 [[유대인]] 600만 명, [[집시]]와 [[폴란드인]], [[소련]]의 [[전쟁 포로]]를 비롯한 [[러시아인]], [[동성애자]], [[장애인]], 정치적 반대 세력 상당수도 있었다.<ref>Niewyk, Donald L. and Nicosia, Francis R. ''[http://books.google.ca/books?id=lpDTIUklB2MC&pg=PP1&dq=Niewyk,+Donald+L.+The+Columbia+Guide+to+the+Holocaust&sig=4igufxQHRCNrkjwRuMt1if_mf5M#PPA45,M1 The Columbia Guide to the Holocaust]'', [[Columbia University Press]], 2000, pp. 45-52.</ref> 제2차 세계 대전과 나치의 학살로 유럽에서 죽은 사람의 수가 4천여 만 명이 넘는다.<ref>"[http://news.bbc.co.uk/2/hi/europe/4530565.stm Leaders mourn Soviet wartime dead]". BBC News. May 9, 2005.</ref> 전후 [[나치의 전쟁 범죄]]를 심판한 [[뉘른베르크 재판]]이 열렸다.
 
[[1933년]] [[2월 27일]] [[독일 국회의사당]]이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불길에 휩싸였으며]] 뒤를 이은 [[의회 방화에 대한 법령|비상 법령]]으로 시민 기본권이 폐지되었다. 의회에서 [[수권법]]이 통과되면서 히틀러는 무제한적인 입법권을 부여받았다. 이때 [[사회민주당]]만이 반대표를 던졌는데, [[독일 공산당]] 의원들은 이미 투옥된 상황이었다. 히틀러는 자신의 권력으로 모든 반대 세력을 무너뜨리고 몇 달도 안되어 중앙집권적인 [[전체주의]] 국가를 세웠다. 군사 재무장에 역점을 두어 산업이 회생하였다. 베르사유 조약 당시 독일은 [[자르]]와 [[라인란트]]를 잃었는데, [[1935년]]에 독일은 [[국제 연맹]]이 관리하던 [[자르 (국제 연맹)|자르]] 지방을 되찾았으며 [[1936년]]에는 라인란트를 군대로 장악하였다.
 
[[파일:Hitler as young man.jpg|섬네일|왼쪽|150px|히틀러]]
 
군사 재무장과 더불어 독일의 외교 정책은 더욱 공격적이고 확장적인 방향을 취하여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키기에 이른다. 독일은 [[1938년]]과 [[1939년]]에 [[오스트리아 병합|오스트리아]]와 [[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 점령|체코슬로바키아]]를 각각 점령하였으며, [[폴란드 침공]]을 준비하였다.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 [[글라이비츠 방송국 공격 사건]]) [[1939년]] [[9월 1일]], [[독일 국방군]]은 [[폴란드 제2공화국|폴란드]]에 [[전격전]]을 개시하여 폴란드는 순식간에 독일과 소련의 [[붉은 군대]]에 점령당하였다. 이에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하면서 유럽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였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독일과 여타 [[추축국]]은 유럽 대륙의 상당 지역을 장악하였다.
 
[[1941년]] [[6월 22일]], 독일은 독소 불가침 조약을 파기하고 [[바르바로사 작전|소련을 침공]]하였다. 같은 해에 [[진주만 공격|일본이 진주만의 미군 기지를 기습]]하였으며, 일본과 동맹을 맺은 독일은 [[미국]]에 선전포고하였다. 독일 군대는 소련 영내로 신속히 진군하였으나,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전황이 뒤집혔다. 이후 독일군은 [[동부 전선 (제2차 세계 대전)|동부 전선]]에서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1943년 9월에 독일의 동맹국인 이탈리아가 항복하자 독일군이 이탈리아를 점령하면서 독일은 [[이탈리아 전역 (제2차 세계 대전)|새로운 전선]]을 감당해야 했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 역시 [[서부 전선 (제2차 세계 대전)|서부 전선]]을 열면서 2차 대전의 전환점이 되었는데, 독일은 얼마 안되어 패배하였다. 1945년 5월 8일, 붉은 군대가 베를린을 점령한 뒤 독일군이 항복하였다. 이 전쟁에서 독일인 군인 및 민간인(중앙유럽의 독일계 인구도 포함하여) 7백만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ref>Steinberg, Heinz Günter. ''Die Bevölkerungsentwicklung in Deutschland im Zweiten Weltkrieg : mit einem Überblick über die Entwicklung von 1945 bis 1990.'' Bonn 1991. Also see [https://en.wikipedia.org/wiki/World_War_II_casualties#endnote_Germany1 World War II casualties]</ref>
 
독일 제3제국은 나중에 '[[홀로코스트]]'라고 불린 대학살을 통하여 수많은 반대 세력과 소수 집단을 직접 탄압하기 위한 정책을 실행하였다. 홀로코스트로 1,700만 명이 살해당하였는데, 그 가운데는 [[유대인]] 600만 명, [[집시]]와 폴란드인, 소련의 전쟁 포로를 비롯한 [[러시아인]], [[동성애자]], [[장애인]], 정치적 반대 세력 상당수도 있었다.<ref>Niewyk, Donald L. and Nicosia, Francis R. ''[http://books.google.ca/books?id=lpDTIUklB2MC&pg=PP1&dq=Niewyk,+Donald+L.+The+Columbia+Guide+to+the+Holocaust&sig=4igufxQHRCNrkjwRuMt1if_mf5M#PPA45,M1 The Columbia Guide to the Holocaust]'', [[Columbia University Press]], 2000, pp. 45-52.</ref> 제2차 세계 대전과 나치의 학살로 유럽에서 죽은 사람의 수가 4천여 만 명이 넘는다.<ref>"[http://news.bbc.co.uk/2/hi/europe/4530565.stm Leaders mourn Soviet wartime dead]". BBC News. May 9, 2005.</ref> 전후 [[나치의 전쟁 범죄]]를 심판한 [[뉘른베르크 재판]]이 열렸다.
 
=== 분단과 재통일 (1945년 ~ 1990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