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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뜻 넘어옴|독일 연방공화국|1949년부터 1990년 10월 3일까지의 분단 정부|서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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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이칠란트 연방공화국''' 또는 독일 연방공화국(獨逸 聯邦共和國, {{llang|de|Bundesrepublik Deutschland|분데스레푸블리크 도이칠란트}}), 줄여서 도이칠란트 또는 '''독일'''({{llang|de|Deutschland|도이칠란트}}, {{소리|De-Deutschland.ogg|듣기}}, {{llang|en|Federal Republic of Germany}}, {{문화어|도이췰란드}})은 [[중앙유럽]]에 있는 [[나라]]이다. [[북쪽]]으로 [[덴마크]]와 [[북해]], [[발트해]], [[동쪽]]으로 [[폴란드]]와 [[체코]], [[남쪽]]으로 [[오스트리아]]와 [[스위스]], [[서쪽]]으로 [[프랑스]], [[룩셈부르크]], [[벨기에]], [[네덜란드]]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독일 영토는 357,021 [[제곱킬로미터]]이며, [[기후]]는 주로 [[온대 기후]]를 보인다. 인구는 [[2011년]] 기준 80,219,695명으로<ref>[http://epp.eurostat.ec.europa.eu/cache/ITY_OFFPUB/KS-QA-09-047/EN/KS-QA-09-047-EN.PDF First demographic estimates for 2009], [[유럽 통계국]].</ref> [[유럽 연합]]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이며, 이민자 인구는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다.<ref>{{웹 인용|title=Germany Top Migration Land After U.S. in New OECD Ranking|url=http://www.bloomberg.com/news/2014-05-20/immigration-boom-propels-germany-past-u-k-in-new-oecd-ranking.html|publisher=Bloomberg|date=20 May 2014|accessdate=29 August 2014}}</ref> [[공용어]]는 [[독일어]]이고, 소수 민족어나 [[러시아어]], [[영어]], [[소르브어]], [[덴마크어]], [[프리지아어]]도 쓰인다. 주요 도시는 [[베를린]]([[수도]]), [[뮌헨]], [[라이프치히]], [[드레스덴]]이 있다. [[고대]]에 여러 [[게르만족]]이 살던 독일 땅은 [[게르마니아]]로 알려져 있었으며, [[100년]] 이전에 [[게르마니아 (책)|관련 기록]]이 남아 있다. [[10세기]]부터 [[게르만족]]의 땅은 [[1806년]]까지 존속한 [[신성 로마 제국]]의 중심부를 이루었다. [[16세기]]에 북독일은 [[루터교회]]가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분리된 [[종교 개혁]](Reformation)의 핵심부로 자리 잡았다. [[1871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중에 독일은 최초로 [[독일의 통일|통일]]을 이루어 근대적인 [[국민 국가]]가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1949년]]에 독일은 연합군 점령지 경계선을 따라 [[동독]]과 [[서독]]으로 [[분단]]되었으나, [[1990년]]에 [[독일의 재통일|통일]]되었다. 독일은 [[연방제]]와 [[의원내각제]]를 채택한 [[공화국]]으로 [[독일의 주|16개 주]]로 이루어져 있다. [[수도]]는 국내 최대 도시인 [[베를린]]이다. 이 나라는 [[유엔]]과 [[북대서양 조약 기구]], [[G8]], [[G20]], [[경제 협력 개발 기구]], [[세계 무역 기구]], [[유럽 연합]]의 회원국이다. 독일은 오늘날 [[유럽]] 최강대국으로 명목 [[국내총생산]] 기준으로 세계 4위의 경제 대국이며, [[구매력 평가]] 기준으로는 세계 5위이다. 수출과 수입 규모는 세계 2위이다. 연간 [[정부 개발 원조|개발 원조액]]은 세계 2위이며,<ref>[http://www.topnews.in/germany-worlds-second-biggest-aid-donor-after-us-229970 Germany world's second biggest aid donor after US] TopNews, India. Retrieved 2008-04-10.</ref> 군비 지출액은 6위를 보인다.<ref>[http://www.sipri.org/contents/milap/milex/mex_major_spenders.pdf/download The fifteen major spenders in 2006], [http://web.archive.org/web/20070814224502/http://www.sipri.org/contents/milap/milex/mex_major_spenders.pdf/download Archive Page], 2007, PDF, Recent trends in military expenditure, Stockholm International Peace Research Institute.</ref> <!-- 관련 순위 목록 페이지 연결 필요 --> 독일은
== 국명 ==
{{본문|독일의 국명}}
독일을 가리키는 명칭은 [[유럽]]의 그 어느 나라보다 다양하다. 예를 들어 독일 내에서 헌법상이나 [[외교 관계]] 등에서 사용하는 [[독일어|자국어]] 표기는 '''도이칠란트'''({{lang|de|Deutschland}})이지만, [[영어]]로는 '저머니'({{lang|en|Germany}})라고 하며 [[프랑스어]]로는 '알마뉴'({{lang|fr|Allemagne}}), [[폴란드어]]로는 '니엠치'({{lang|pl|Niemcy}}), [[중국어]]로는 '더궈'({{lang|zh|德国}})라고 한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쓰이는 '''독일'''이라는 [[한국어]] 명칭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어]]식 [[한자]] 음차 표기인 '도이쓰'({{llang|ja|独逸}})<ref>현재
▲현재 [[대한민국]]에서 쓰이는 '''독일'''이라는 [[한국어]] 명칭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어]]식 [[한자]] 음차 표기인 '도이쓰'({{llang|ja|独逸}})<ref>현재 일본에서는 한자 음역은 쓰이지 않고 가타카나로만 '도이쓰'로 표기한다.</ref>를 받아들여 이를 한국식 한자음으로 읽은 것이며, 그 전에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 '''덕국'''(德國)이라 불렀다. 해방 후에는 [[일제 강점기]]의 잔재를 없애고 독일어 원발음에 좀더 가깝게 하기 위해 '''도이칠란트'''로 표기하기도 했으나 [[대한민국]]에서는 이 표기법이 정착하지 못하였고,<ref>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183029&ctg=20{{깨진 링크|url=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183029&ctg=20 }}</ref><ref>단, 도이칠란트는 현재까지 독일과 함께 이 나라를 가리키는 명칭의 복수 [[표준어]]로 인정되고 있다.</ref> 현재는 대한민국 주재 대사관에서도 스스로를 '주한 독일 대사관'으로 일컫고 있다.
{{본문|도이치 (어원)}}
▲독일어의 "deutsch"의 어원적인 전형태들은 본래 "종족에 속하다"는 의미를 가졌으며 우선은 대륙성 [[서게르만어군]]의 [[방언 연속체]]를 지칭하였다. 도이칠란트라는 명칭은 15세기부터 사용되었지만 개별문서에서는 이미 그 이전에도 기록이 되어있다. 그 이전에는 "deutsch"라는 수식어가 "Land(땅, 나라)"와 조합되어 사용된 예만 확인되었다. 가령 부정관사와 단수형태의 "ein deutsches Land" 또는 정관사와 복수형태의 "die deutschen Länder"처럼 쓰였지만 정관사의 단수형태인 "das deutsche Land"으로는 사용되지 않았다.
== 역사 ==
{{본문|독일의 역사}}
{{본문|게르만족|게르마니아}}
[[파일:Gehrts Armin verabschiedet sich von Thusnelda 1884.jpg|섬네일|왼쪽|150px|아르미니우스]]
[[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로마의 [[푸블리우스 큉크틸리우스 바루스]] 장군이 게르마니아(로마인들은 대체로 [[라인강]]에서 [[우랄 산맥]]에 이르는 영토를 이렇게 불렀다)를 침략하였는데, 이 시기에 게르만족은 부족의 정체성을 지키면서도 로마식 전술에도 익숙해졌다. 서기 [[9년]]에 바루스가 이끄는 3개 로마 군단이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에서 [[케루스키족]] 족장 [[아르미니우스]](헤르만)에게 전멸당하였다. 이로써 라인강에서 [[도나우강]]에 이르는 오늘날의 독일 땅은 로마 제국의 지배권에 편입되지 않았다. [[타키투스]]가 《[[게르마니아 (책)|게르마니아]]》를 쓴 [[100년]]경에 게르만족은 [[리메스 게르마니쿠스|라인강에서 도나우강에 이르는 선]]을 따라 모여 살았는데, 이들이 살던 땅은 오늘날의 독일 영토 대부분을 차지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남부 [[바이에른]], 서부 [[라인란트]] 지방에서는 로마 속주가 설치되었다. [[3세기]]에는 [[알라마니족]], [[프랑크족]], [[카티족]], [[작센족]], 프리지아족, 시캄브리족, 투링기족 등 규모가 큰 서부 게르만 부족이 나타났다. [[260년]]경에 게르만족은 [[리메스 게르마니쿠스|로마 제국 국경]]와 도나우강 국경선을 넘어 로마 영내로 들어왔다.
=== 신성 로마 제국 (962년 ~ 1814년) ===
{{본문|신성 로마 제국}}
{{참고|동방 식민지}}
[[
▲[[잘리어 왕가]] 치세([[1024년]] ~ [[1125년]])에 신성 로마 제국은 북부 [[이탈리아]]와 [[부르고뉴 지방]]을 흡수하였으나, [[서임권 분쟁]]으로 말미암아 잘리어 왕가의 황제들은 권력을 잃었다. [[호엔슈타우펜 왕가]] 치세([[1138년]] ~ [[1254년]])에 독일의 제후들은 슬라브족이 사는 남쪽과 동쪽 지방으로 영향력을 넓혔는데, 전부터 이들 지방과 [[동방 식민지]](오스트지들룽)에는 독일의 정착지가 있었다. 북독일의 도시들은 [[한자 동맹]]의 일원이 되어 번영하였다. [[1315년]]의 [[대기근 (1315년 ~ 1317년)|대기근]]이 일어나고 뒤이어 [[1348년]] ~ [[1350년]] 사이에 [[흑사병]]이 창궐하면서 독일의 인구는 급감하였다.
[[파일:Martin Luther, 1529.jpg|섬네일|위오른쪽|왼쪽|마르틴 루터]]
[[1356년]]에 나온 [[금인칙서 (1356년)|금인칙서]]는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할 때까지 제국의 기본 [[헌법]]이 되었다. 금인칙서에서는 강력한 공국이나 [[주교령]]을 다스리는 [[선거후]] 일곱 사람이 [[황제]]를 선출하도록 규정하였다. [[15세기]]부터 제국에서 선출된 황제 제위는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합스부르크 왕가]]가 독차지하였다. [[1517년]]에 [[로마 가톨릭교회]] [[사제]]였던 [[마르틴 루터]]는 [[95개조 반박문]]을 출간하여 [[로마 가톨릭교회]]의 [[신학]]과 관습에 대항하여 [[종교 개혁]]을 일으켰다. [[마르틴
▲[[1517년]]에 [[로마 가톨릭교회]] [[사제]]였던 [[마르틴 루터]]는 [[95개조 반박문]]을 출간하여 [[로마 가톨릭교회]]의 [[신학]]과 관습에 대항하여 [[종교 개혁]]을 일으켰다. 마르틴 루터의 파문, 보름스 국회 심문, 농민전쟁, 에라스뮈스와의 ‘자유 의지론’을 둘러싼 논쟁을 통한 인문주의와의 결별 등을 거쳐 분리된 [[루터교회]]는 [[1530년]] 이후 독일 내 여러 나라들의 공식적 교회가 되었다.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간의 종교 분쟁으로 [[30년 전쟁]]이 일어났으며 그 결과 독일은 황폐화되었다. 독일에 있던 나라들의 인구는 30% 정도 줄어들었다. [[1648년]]의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되면서 독일의 종교 전쟁은 종식되었으나, 신성 로마 제국은 사실상 수많은 독립 공국으로 갈라졌다. [[1740년]]부터 [[합스부르크 제국]]와 [[프로이센 왕국]]간의 대립이 독일 역사의 주요 양상으로 나타난다. [[1806년]]에 [[나폴레옹 전쟁]]으로 신성 로마 제국이 멸망하였다.
=== 반동과 혁명 (1815년 ~ 1870년) ===
{{본문|독일 연방}}
[[파일:Maerz1848 berlin.jpg|오른쪽|200픽셀|섬네일|1848년 3월 19일, 베를린에서 일어난 혁명 봉기]]
[[파일:Deutscher Bund.svg|섬네일|250px| [[독일 연방]] 1815–1866.]]
▲유럽의 [[1848년 혁명]]으로 프랑스에서 공화정이 성립하자, 독일의 지식인들과 평민들도 혁명을 일으켰다. 처음에 군주들은 혁명주의자들의 자유주의 요구를 수용하였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황제]] 칭호를 받았으나 권력을 잃자 왕위를 거부하고 헌법을 제한하여 일시적으로 혁명 운동에 제동을 걸었다. [[프로이센 왕국|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와 자유주의 세력이 강해진 의회는 [[1862년]]에 군제 개혁을 놓고 갈등하였다. 왕은 [[오토 폰 비스마르크]]를 [[프로이센의 총리]]로 임명하였다. 비스마르크는 [[1864년]]에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에서 덴마크를 무찔렀다. [[1866년]]에는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에서 승리하여 비스마르크는 [[북독일 연방]]을 창설할 수 있게 되었으며 과거 독일의 강대국이었던 [[오스트리아 제국]]은 여타 독일 국가들의 내정에 간섭하지 못하게 되었다.
=== 독일 제국 (1871년 ~ 1918년) ===
{{본문|독일 제국|제1차 세계 대전}}
[[파일:LenbachFürstBismarck1895.jpg|섬네일|오른쪽|150px|비스마르크]]
[[1871년]]에 [[독일 제국]]이 사상 최초로 [[독일의 통일]]을 이룬 근대 국가가 되었는데, 이 가운데 [[프로이센 왕국]]이 가장 큰 몫을 차지하고 있었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프로이센]]이 [[프랑스]]를 무찌르면서 [[1871년]] [[1월 18일]]에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제국]]의 건국이 선포되었다. [[프로이센]]의 [[호엔촐레른 왕가]]가 [[독일 제국]] 전체의 [[황제]]를 겸임했으며, [[수도]]는 [[베를린]]이었다. [[독일 제국]]은 [[오스트리아]] 외의 독일의 모든 지방을 통일하였다.([[소독일주의]]) [[1884년]]부터 독일은 [[유럽]] 바깥 지역에 [[식민지]]를 확보하기 시작하였다. [[독일의 통일]] 이후 [[그륀더차이트]] 시대(창설 시대)에 [[독일 제국]]은 수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비스마르크]]의 지도로 타 열강들과 평화 관계를 유지하면서 2중 3중의 비밀 외교로 [[프랑스 제3공화국|프랑스]]를 고립시키는 [[외교 정책]]을 추진하였다. 독일은 [[영국]], [[프랑스]] 등과 불필요한 마찰을 피하기 위하여 해외 식민지 쟁탈 경쟁에도 뛰어들지 않았다. 대신 독일은 "식민지 대신 [[화학]]을"이라는 슬로건처럼 뒤늦게 [[산업 혁명]]을 추진하여 산업 국가로 거듭났다. 그러나 산업화 과정에서 독일은 내부 모순 및 문제에 직면했으며 이 내부 문제는 [[노동조합]]과 [[독일 사회민주당]]을 주축으로 한 사회주의 세력의 활발한 운동으로 표면화되었다. 뒤이어 [[황제]]로 등극한 [[빌헬름 2세]]는 [[유럽]]의 다른 열강처럼 [[제국주의]] 정책을 내세워 이웃 나라들과 마찰을 빚었다. 이 때문에 이전에 독일이 맺고 있던 거의 대부분의 동맹이 갱신되지 않았으며, 새로운 동맹에서는 독일이 빠졌다. 특히 [[프랑스]]는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영국]])과 [[영국 협상]](Entente Cordiale)을 맺고 [[러시아 제국]]과 긴밀한 관계를 확보하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와 관계를 맺은 것 외에 독일은 점차 고립되었다. 독일은 자국 영내를 벗어나 유럽 열강들이 벌이고 있던 [[아프리카]] [[식민지]] 쟁탈전에 뛰어들었다. [[베를린 회의 (1884년)|베를린 회의]]에서 유럽 열강은 [[아프리카]]를 나눠가지기로 합의하였다. 독일은 [[독일령 동아프리카]], [[독일령 남서부 아프리카]], [[카메룬]], 토골란드를 비롯한 [[아프리카]]의 여러 [[영토]]를 확보하였다. [[아프리카 쟁탈전]]으로 열강 사이에 긴장 상황이 벌어졌으며, 이는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는 데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1914년]]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사라예보]]에서 [[살해]]당하면서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다. [[동맹국]] 측에 섰던 독일은 역사상 최악의 전쟁으로 손꼽히는 이 전쟁에서 [[연합국 (제1차 세계 대전)|연합국]]에 [[패배]]하였다. [[전쟁]] 중 독일군 전사자는 2백만 명에 이른다.<ref>[http://www.spiegel.de/international/germany/0,1518,530319,00.html Last German World War I Veteran Believed to Have Died]. Spiegel Online. January 22, 2008.</ref> [[1918년]] [[11월]]에 [[독일 혁명]]이 일어나자 [[빌헬름 2세]]와 독일의 모든 제후가 [[폐위]]되었다. 그해 [[11월 11일]]에 [[휴전 협정 (제1차 세계 대전)|휴전 협정]]이 체결되어 전쟁이 끝났으며, 독일은 [[1919년]] [[6월]]에 [[베르사유 조약]]에 [[서명]]해야 했다. 전통적인 전후 외교 방식과 달리 당시 협상에서는 패전국인 동맹국이 배제되었다. 독일에서는 [[베르사유 조약]]이 다른 수단을 통한 치욕스러운 전쟁의 연속으로 여겨졌으며, 조약에서 규정한 가혹한 조건 때문에 이후 [[나치즘]]이 발흥하는 [[배경]]이 되었다고 보는 입장도 있다.
=== 바이마르 공화국 (1919년 ~ 1933년) ===
{{본문|바이마르 공화국}}
[[독일 11월 혁명|독일 혁명]]이 일어나자 독일은 [[공화국]]으로 선포되고 왕정이 무너졌다. 그러나 권력 투쟁은 이어졌는데 급진 좌익세력이 [[바이에른]]에서 권력을 잡았지만, 독일 전체를 장악하지는 못하였다. 독일 혁명은 [[1919년]] [[8월]]에 [[바이마르 공화국]]이 공식 출범하면서 끝을 맺는다. [[1919년]] [[8월 11일]]에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독일의 대통령|대통령]]이 [[바이마르 헌법]]에 서명하면서 헌법이 발효하였다. [[베르사유 조약]]에서 독일은 가혹한 화의 조건을 강요받은데다 마침 [[대공황]]까지 닥쳤으며, 불안정한 정부들이 세워지고 무너지기를 거듭하자 독일 사람들은 점차 [[의회 민주주의]] 정치 체체와 주류 정당들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게다가 극우 세력([[루터교]], 국가주의자, [[나치]])들은 독일이 [[제1차 세계
[[파일:Stab-in-the-back postcard.jpg|섬네일|오른쪽|"[[등 뒤의 칼 찌르기]]"]]
▲[[베르사유 조약]]에서 독일은 가혹한 화의 조건을 강요받은데다 마침 [[대공황]]까지 닥쳤으며, 불안정한 정부들이 세워지고 무너지기를 거듭하자 독일 사람들은 점차 [[의회 민주주의]] 정치 체체와 주류 정당들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게다가 극우 세력(루터교, 국가주의자, 나치)들은 독일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한 까닭은 정부 전복을 원하는 자들 때문이라는 소위 [[등 뒤의 칼 찌르기 이야기]](Dolchstoßlegende)를 퍼뜨리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바이마르 정부의 수뇌부는 베르사유 조약에 서명했다는 이유로 독일 민족을 배신하였다는 비난을 받았으며, [[스파르타쿠스단]]과 같은 급진 좌익 공산주의자들은 [[평의회 공산주의]](Räterepublik)를 지지하며 "자본주의 지배"를 철폐하기 위한 혁명을 원하였다.
=== 나치 독일 (1933년 ~ 1945년) ===
{{본문|나치 독일}}
[[1933년]] [[2월 27일]] [[독일 국회의사당]]이 불길에 휩싸였으며 뒤를 이은 [[의회 방화에 대한 법령|비상 법령]]으로 시민 기본권이 폐지되었다. 의회에서 [[수권법]]이 통과되면서 [[히틀러]]는 무제한적인 입법권을 부여받았다. 이 때 [[사회민주당]]만이 반대표를 던졌는데, [[독일 공산당]] 의원들은 이미 투옥된 상황이었다. [[히틀러]]는 자신의 권력으로 모든 반대 세력을 무너뜨리고 몇 달도 안되어 중앙집권적인 [[전체주의]] 국가를 세웠다. 군사 재무장에 역점을 두어 산업이 회생하였다. [[베르사유 조약]] 당시 독일은 [[자르]]와 [[라인란트]]를 잃었는데, [[1935년]]에 독일은 [[국제 연맹]]이 관리하던 [[자르 (국제 연맹)|자르 지방]]을 되찾았으며 [[1936년]]에는 [[라인란트]]를 [[군대]]로 장악하였다. 군사 재무장과 더불어 독일의 외교 정책은 더욱 공격적이고 확장적인 방향을 취하여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키기에 이른다. 독일은 [[1938년]]과 [[1939년]]에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를 각각 점령하였으며, [[폴란드 침공]]을 준비하였다.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 [[글라이비츠 방송국 공격 사건]]) [[1939년]] [[9월 1일]], [[독일 국방군]]은 [[폴란드 제2공화국|폴란드]]에 [[전격전]]을 개시하여 폴란드는 순식간에 독일과 [[소련]]의 [[붉은 군대]]에 점령당하였다. 이에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하면서 [[유럽]]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였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독일과 여타 [[추축국]]은 [[유럽 대륙]]의 상당 지역을 장악하였다. [[1941년]] [[6월 22일]], 독일은 독소 불가침 조약을 파기하고 [[소련을]] [[침공]]하였다. 같은 해에 [[일본]]이 [[진주만]]의 [[미군 기지]]를 기습하였으며, [[일본]]과 [[동맹]]을 맺은 독일은 [[미국]]에 [[선전포고]]하였다. 독일 군대는 소련 영내로 신속히 진군하였으나,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전황이 뒤집혔다. 이후 [[독일군]]은 [[동부 전선 (제2차 세계 대전)|동부 전선]]에서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1943년]] [[9월]]에 독일의 동맹국인 [[이탈리아]]가 항복하자 [[독일군]]이 [[이탈리아]]를 [[점령]]하면서 독일은 새로운 전선을 감당해야 했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 역시 [[서부 전선 (제2차 세계 대전)|서부 전선]]을 열면서 2차 대전의 전환점이 되었는데, 독일은 얼마 안 되어 [[패배]]하였다. [[1945년]] [[5월 8일]], [[붉은 군대]]가 [[베를린]]을 [[점령]]한 후 [[독일군]]이 항복하였다. 이 [[전쟁]]에서 독일인 군인 및 민간인([[중앙유럽]]의 독일계 인구도 포함하여) 7백만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ref>Steinberg, Heinz Günter. ''Die Bevölkerungsentwicklung in Deutschland im Zweiten Weltkrieg : mit einem Überblick über die Entwicklung von 1945 bis 1990.'' Bonn 1991. Also see [https://en.wikipedia.org/wiki/World_War_II_casualties#endnote_Germany1 World War II casualties]</ref> 독일 [[제3제국]]은 나중에 '[[홀로코스트]]'라고 불린 대학살을 통하여 수많은 반대 세력과 소수 집단을 직접 탄압하기 위한 정책을 실행하였다. 홀로코스트로 1,700만 명이 살해당하였는데, 그 가운데는 [[유대인]] 600만 명, [[집시]]와 [[폴란드인]], [[소련]]의 [[전쟁 포로]]를 비롯한 [[러시아인]], [[동성애자]], [[장애인]], 정치적 반대 세력 상당수도 있었다.<ref>Niewyk, Donald L. and Nicosia, Francis R. ''[http://books.google.ca/books?id=lpDTIUklB2MC&pg=PP1&dq=Niewyk,+Donald+L.+The+Columbia+Guide+to+the+Holocaust&sig=4igufxQHRCNrkjwRuMt1if_mf5M#PPA45,M1 The Columbia Guide to the Holocaust]'', [[Columbia University Press]], 2000, pp. 45-52.</ref> 제2차 세계 대전과 나치의 학살로 유럽에서 죽은 사람의 수가 4천여 만 명이 넘는다.<ref>"[http://news.bbc.co.uk/2/hi/europe/4530565.stm Leaders mourn Soviet wartime dead]". BBC News. May 9, 2005.</ref> 전후 [[나치의 전쟁 범죄]]를 심판한 [[뉘른베르크 재판]]이 열렸다.
[[파일:Hitler as young man.jpg|섬네일|왼쪽|150px|히틀러]]
=== 분단과 재통일 (1945년 ~ 199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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